<럭셔리> 2024년 12월호

박정민이 세계를 넓힐 때

배우 박정민의 인물들은 다채롭지만 명료하다. 장르와 성격을 불문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누비면서도 매 작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인물의 존재감을 선명히 새겨놓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박정민은 오늘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또 한 뼘, 우리의 세계를 넓힌다.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양중산


겹쳐 입은 블랙과 차콜 컬러 셔츠, 디테일이 돋보이는 팬츠, 테일러드 코트, 블랙 컬러 부츠 모두 질 샌더.



컬러 배색이 특징인 모크 넥 니트는 설밤 by 무이, 와이드 팬츠는 렉토.



한 해를 끝맺는 12월, 출연한 두 편의 영화가 개봉합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반가운 선물 같기도 한데요. 작품을 책임지는 배우로서는 어떤 기분인가요?

솔직히 털어놓자면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오히려 염려되고 곤란한 마음이 커요. 모두 최선을 다해 촬영한 작품인데 거의 같은 시기에 개봉하다 보니 알리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나눠 써야 하는 게 아쉽죠. 흥행 성적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배우로서 작품을 알리고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하니까요.


<1승>과 <하얼빈> 모두 많은 이가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린 기대작이죠. 우선 <1승>은 국내 첫 배구 영화라는 점에서부터 관심을 끕니다. 어떻게 만나게 된 작품인가요?

영화 <동주>의 각본과 제작을 맡은 분이 <1승>의 신연식 감독님이었어요. <동주> 개봉 후 감독님과 둘이 홍콩 영화제에 참석하게 됐는데,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라 “저도 뭐 하나 시켜주세요” 그랬죠. 그러곤 꽤 시간이 흘러 송강호 선배님이 캐스팅됐고 구단주 역할을 제안하고 싶단 연락을 받은 거예요. 무조건 해야겠다 싶었어요.


정민 씨야말로 여자 배구의 오랜 팬으로도 잘 알려져 있잖아요.

스포츠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여자 프로 배구 경기는 빠뜨리지 않고 챙겨 보는 편이죠. 아버지가 여자 배구 팬이셔서 어릴 때부터 자주 함께 봤어요. 선수 개개인의 이름, 플레이 스타일, 기량 등을 하나둘 알게 되다 보니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자연스레 좋아하게 됐어요. 한창 빠져 있을 때는 당시 집이 분당이어서 성남시가 연고인 도로공사 경기를 거의 매번 보러 다녔어요.


많은 배우가 함께 연기하고 싶어 하는 선배, 송강호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촬영한 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그 순간들이 생생해요. 정말 소중하고 행복했어요. 어릴 적부터 워낙 좋아하고 동경했던 분이니까 한 작품 안에서, 한 프레임 안에서 연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찼죠. 사실 그래서 긴장도 많이 했어요. 왜,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조심스러워지잖아요. 말도 아끼게 되고요. 함께 합을 맞추며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생각보다 같이 하는 장면이 많지 않아서 아쉽기도 했고요. 선배님과 촬영할 회차가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였으니까요. 다음에는 좀 더 길게, 오래 뵙고 싶어요.


<1승>의 ‘핑크스톰’ 팀은 ‘단 1승만이라도’란 간절함으로 달려가죠. 당신에게도 꼭 한 번 이루고 싶던 목표, 이기고 싶던 무언가가 있었나요?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어려운 질문인데요. 당장 떠오르는 답은 ‘뛰어난 배우가 되고 싶다’인데 좀 진부하죠? 현재진행형이기도 하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해본다면 ‘단 하루만이라도 불안해하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 늘 하는 생각이거든요.



블랙 컬러 모크 넥 톱과 오버사이즈 셔츠, 레더 와이드 팬츠 모두 보테가 베네타.



배우로서 많은 사랑을 받는 지금도 카메라 앞에서 불안함을 느끼나요?

저는요, 매일이 불안해요. 다음 촬영은 어떻게 할까,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되고요. 연습과 준비만이 답이라 생각해서 열심히 하지만 막상 현장에 서면 생각과 다를 때가 많죠. 좀 더 스스로를 믿고 유연해져도 좋을 것 같은데, 저로서는 쉽지가 않아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쭉, 아니 오히려 시간과 경험이 쌓일수록 어깨에 얹고 가는 책임감은 더 크고 무거워지는 것 같고요. 그럴 때마다 되뇌는 건 ‘함께하는 이들을 믿자’예요.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분들과 동료 배우들, 그들이 분명 멋지게 작품을 완성해줄 것을 믿어요. 그렇게 조금이나마 안심하며 저 또한 잘하고 싶다는 의욕을 불태워봅니다.


<1승>과 같은 스포츠 영화의 매력이라면 아무래도 가능성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아닐까요? 정민 씨는 요즘 무엇을 발견하고 꿈꾸고 있나요?

제가 세운 출판사를 어엿하게 발전시키겠다는 꿈이 있어요. ‘무제MUZE’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최근 두 번째 책을 펴냈어요. 출판사 운영이 쉽진 않지만, 좋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세상에 전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기쁨, 내 아이디어가 녹아 있는 책이 편집되어 나왔을 때의 희열, 독자분들이 잘 읽었다고 피드백 해주실 때의 감동이 대단해요. 계속해서 책을 기획하고 선보이고 싶은 이유고요.


‘무제’가 추구하는 이야기의 기준이 있다면요?

사람들이 살면서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잖아요. 일상의 관심에서 비켜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갈 생각이에요. 출간한 <살리는 일>, <자매일기>를 통해 보호받지 못하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지금은 시각장애인분들을 위한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물론 이런 주제들이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끌긴 어렵겠죠. 하지만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최소한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려 해요.


작가로서 직접 쓴 책을 낼 계획은 없나요? 올 초까지 연재한 문학동네 뉴스레터도 반응이 좋았는데요.

당장은 아닌데 염두에 두고는 있어요. 출판사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한 전략으로요. 물론 제 책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나마 작가 지급 비용이 빠지니 제작비가 덜 들 거잖아요.(웃음) 사실 더 큰 이유는 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긴 한데요. 산문집 <쓸 만한 인간>을 내놓은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거든요. 심지어 책 초반 글은 2011~2012년 즈음에 쓴 거고요. 요즘 그 글들이 제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 생각은 많이 변하며 확장되었는데 글은 그대로 20대 중반의 박정민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다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한 건 없어요. 글 쓸 때 엄청 괴로워하는 편이거든요. 즐겁게 잘 쓰는 법부터 연구해봐야죠.


영화 <하얼빈>에서는 일상의 얼굴을 완전히 지우고 독립군 투사 ‘우덕순’을 연기합니다. 끝까지 안중근 의사의 작전을 함께했던 인물이죠?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굳건하고 우직한 사람이에요. 사실 전 처음 <하얼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또?’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대본을 받아보고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어요. 처음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거든요. 학창 시절 역사 시간에 독립투사에 대한 내용을 배우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이 영화는 모두가 아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함께했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통해 바라보고 느끼게 하는 이야기예요.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으로 큰 울림을 남긴 영화 <동주> 생각도 나는데요.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영웅을 연기한다는 데 책임감이랄까, 부담감도 컸을 것 같네요.

네, 그랬어요. 그분들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고요. 다만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인간으로서 그분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보고자 했어요. 사실 <동주> 때까지만 해도 저는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이 매우 뜨거운 불같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는 ‘그들도 흔들린다’는 걸 알았어요. 그들의 앞에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을 것이며, 얼마나 무서운 순간들이 많았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이와 갈등을 겪었겠느냐 하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싸웠다는 것. 조금이나마 그 마음들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인물의 고뇌와 두려움, 긍지의 마음을 따라가며 개인적으로는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요?

우덕순 선생님은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아도 동지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끝까지 곁에서 함께하고자 하는 분인 것 같더라고요. 연기하면서 그런 자세를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원래 저는 촬영 현장에서나 일하면서 사람들과 가깝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에요.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이번엔 전혀 안 그랬어요. 안중근 역의 현빈 형 옆에, 다른 배우들 곁에 늘 붙어 있었죠. 감독님하고도 가깝게 어울렸고요. 진짜 동지들을 얻은 것 같았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는 제 자신에게 조금 놀라기도 했고요. 여러모로 많은 것을 깨닫고 느낀 작품이에요.



옐로 컬러 퍼 니트는 아미.



요즘 그야말로 ‘열 일’ 중인데요. 이토록 열심히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 같나요?

사람들이죠. 함께하는 사람들, 자극을 주는 사람들, 저를 찾아주는 사람들요. 빼곡히 채워진 스케줄표를 보면서 쓰러질 것 같다고 볼멘소리를 하다가도 막상 현장에 가면 텐션이 올라가요. 촬영장도 재미있고 작품 홍보를 위한 일도 즐겁고요. 그리고 사실 최근 굵직한 작품 개봉이 몰려서 그렇지 특별히 많은 작품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원래 1년에 두어 작품 정도, 꾸준히 열심히 일해왔거든요.


배우가 된 걸 후회해본 적은 없나요? 배우가 아닌 다른 삶을 상상해본 적은요?

후회는 매일 하는걸요.(웃음) ‘왜 힘들게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잘하지도 못하면서 왜 연기를 하려고 했을까’ 하고요. 그런데 분명한 건 다른 일을 했으면 지금보다 더 크게 후회하며 살았을지 모른다는 거예요. 적어도 작품은 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이 모여서 서로를 믿고 지지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요. 그들을 통해 효용감과 성취감도 느끼고요. 얼마 전만 해도 그래요. <밀수>를 함께 작업했던 류승완 감독님이 새 작품 <휴민트> 출연 제안을 주셨을 때, ‘적어도 내가 진짜 엉망은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제게는 그런 인정과 피드백이 꽤 큰 동력이 돼요.


올 한 해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는데요. 1년을 잘 살아낸 자신과 모두에게 격려의 말을 해준다면요?

늘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2024년은 특히 순식간에 흐른 것 같네요. 정신없이 지낸 와중에도 뭔가를 크게 잘못하거나 빼먹거나 그르쳐서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고 상처 입게 하지 않았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어요. 저 자신에게도 고생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요. 마지막 날은 촬영장에서 보낼 것 같은데 미리 인사를 남길게요. 올해가 힘들었던 분들은 새해 새로운 용기를 얻으셨으면 하고요. 행복하셨다면 오늘 같은 기쁜 내일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버건디 컬러 셔츠와 베스트는 페라가모. 팬츠는 렉토.



STYLIST  이혜영  HAIR  박은지(위위)  MAKEUP  이혜진(위위)

COOPERATION  렉토(790-0797), 보테가 베네타(3438-7682), 설밤 by 무이(3446-8074), 아미(6956-8782), 질 샌더(6905-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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