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을 휘젓는 본능적 제스처·신디 지혜 김
사진: Lance Brewer
1990년 인천 태생. 현재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인간 정신의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작품 세계와 모노톤의 이미지로 전 세계 미술 신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신디 지혜 김이 지난해 ‘프리즈 서울’ 프랑수아 게발리 갤러리 부스에서 보여준 작품은 스스로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어요.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국인이라는 자아가 서서히 죽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 상징적 죽음 그리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조국과의 점차적 단절을 작품에 반영하고 싶었습니다.” ‘레퀴엠’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애도의 과정을 반영한 시리즈 작품을 만들고 싶던 찰나, 고대 한국의 장례용품과 무덤 벽화를 접했어요. 고구려 고분 벽을 장식한 곡두, 신화 속 신과 생물의 모습 같은 의례용 물건이 죽은 자를 수호하고 다음 세계로 안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이런 고대 사물과 이미지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구분이 무너져 있었어요. 그래서 명확한 내러티브보다는 역사의 파편을 찾아 시각적 기록으로 전환하는 디아스포라적 방식으로, 이런 레퍼런스를 콜라주하고 통합하고 싶었어요.”

작가는 12세 때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후, 어린 시절부터 필연적으로 소외감과 그리움을 마주쳐야만 했다. 이런 상실감이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동양인 혹은 이민자의 정체성으로 치부하기보다는 현대 생활의 한 단면으로 파악한다는 점이 그녀의 작품이 특별한 이유다. 작가는 인간의 심리를 파고들어 현실과 환상 속을 오가며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춤이나 대화와 비슷해요. 제 손의 움직임이 그림 표현에 나타내는 형태를 따라가기도 하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제가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각과 감정을 반영하니까 작품에서 현실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것 같아요. 자칫 딱딱하거나 답답하게 보일 수 있는 사실주의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놀 때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에 집중하려고 노력해요.”
그런 신디 지혜 김의 작품에는 (건축 공사장의) 비계, 이젤, 십자가 같은 구조물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척추, 골반, 갈비뼈 같은 골격 구조나 전갈과 거미의 외골격 구조 또한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치다. 작가에게 이런 이미지는 ‘권위와 제약, 보호와 지지’를 상징한다고.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프는 어린 시절의 억압된 트라우마, 악몽, 신체적 상해 등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특정 내러티브나 분위기를 의도하기보다는 본능적 행위와 표현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특히 흑백과 모노톤 컬러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작가 특유의 흑백 팔레트는 르네상스 시대, 회색조의 색채만을 사용해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기법인 ‘그리자유grisaille’를 기반으로 하며, 눈에 보이는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어두운 요소를 암시한다. “그리자유에서 영감을 받아 회색 톤 팔레트에 처음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흑연과 목탄을 주재료로 밑그림의 숨겨진 층위와 우리 정신세계의 무의식적 영역을 비유하고 싶었어요. 한국에서 배운 데생도 생각했고요. 무의식처럼 데생은 제 손이 잊을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근육 깊이 밴 기억이거든요. 훈련된 손을 풀어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다 보니 작업의 중요한 내러티브 요소가 된 거죠.” 무언가 꾸준히 배우고 활용하는 자세 또한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지난 몇 년간 점성술과 십이지 주기의 역사를 주목했어요. 어렸을 때 본 그리스·로마신화를 다시 읽었고, 고대 지식의 한 형태인 달력 체계를 배웠죠. 심오한 경험이었어요. 고대인들이 시간을 시각화하고 추적한 방법은 물론이고 태양, 달, 행성의 움직임이 어떻게 대지와 연결됐는지 등을 연구했어요. 지금은 고대 아시아의 달력 체계 육십갑자를 공부하고 있어요.”
신디 지혜 김은 지갤러리의 전시
익숙하면서 낯선·쥘 드 발랭쿠르
© Gautier Deblonde, Courtesy the artist and Victoria Miro
1972년 프랑스 파리 태생으로 현재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활동 중이다. 추상과 구상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를 줄다리기한다.

프랑스 파리 출신으로 10세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현재는 미국 브루클린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쥘 드 발랭쿠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자신만의 시선과 심상으로 투과해 풍부한 색채와 기법으로 독특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작가다.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채도 높은 컬러와 추상성과 구상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작품 스타일이 특징이다. 10대 초반부터 이민자로 살아온 작가는 활동 초기 이방인으로서 권력과 영향력의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주로 선보였다. 사회 논평이나 반보수적 성향 등 무거운 주제의 작품도 다수 제작했다. 당시 사회, 정치, 기술, 대중매체, 대중문화 속 고정관념 또한 그의 단골 주제였으나, 겉으로는 무해한 듯한 장면 뒤로 복잡한 사회적 논평을 숨겨두는 방식으로 주로 작업했다. 지금도 그의 작품 곳곳에서 유머러스한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지도 기반 작품을 선보이면서 추상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데, 대륙이나 국가, 국경에 기반한 정확한 묘사보다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시공간의 감각, 내면세계를 그려내며 추상성을 바탕으로 도식적 이미지보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발랭쿠르는 20년이 넘도록 기하학적이고 추상에 가까운 작품부터 아메리카나 테마의 팝적인 구상 회화에 이르기까지, 팝아트와 민중미술 등 여러 사조를 폭넓게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작품 안에서 문화적·역사적 내러티브를 충실히 다루면서도, 사물을 분열하고 감각적으로 재결합해 거칠고 날것에 가까운 질감과 밝고 풍부한 색채로 순수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시각적 매력 또한 놓치지 않았다. 다양한 형식적 속성을 하나의 몽환적 공간에서 통합하며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융합하는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매끄럽게 이어지는 듯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의도적으로 분리된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작품 안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을 왜곡해 묘사하며 불균형하고 불안정한 세상을 암시하는 발랭쿠르의 몽환적 화면에서도 익숙함이 묻어나는 이유는 그가 대부분 작품에서 인물과 집단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지는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그 안에선 인물이 살아 숨 쉰다. 실제로 그는 공동체의 삶에 관심이 많다고. 몇 해 전 동시대 작가인 마르셀 드자마Marcel Dzama가 그를 인터뷰하면서 “당신의 작업에서는 늘 공동체 의식이 느껴집니다. 밝은 색상과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경향이 있어요. 인간미가 느껴지죠. (···) 작품에서 배어나오는 희망적 느낌이 좋아요. 삶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이미지들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발랭쿠르는 “아무리 새로운 실험을 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해도, 사람들이 모이는 장면이나 커뮤니티가 (작품에) 나타나는 것 같아요. 오랜 세월 그림을 그리면서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나 욕구를 포기하고, 대신 유토피아적 에덴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이에 있는 공간에 집중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제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또 다른 반복되는 주제는 자연, 풍경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입니다”라는 답변에서도 그의 일관적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현재 쥘 드 발랭쿠르는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 개인전
고독한 탄생과 죽음·루양
Courtesy of the artist and PARCEL
1984년 중국 상하이 태생으로 도쿄와 상하이를 기반으로 활동 중.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 ‘DOKU The Flow’로 포커스 아시아 스탠드상을 수상했다.

루양은 불교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종교, 정체성, 삶, 성별, 종교, 기술, 영적 체험 등의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다. 특히 아바타를 설정해 디지털 세상에서 불교 사상을 풀어내는데, 동양의 종교 사상과 디지털 매체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작품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을 뿜어낸다. 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루양은 영상 작품 ‘DOKU The Flow’(2024)로 포커스 아시아 스탠드상을 받았다. 이는 지난 4월 파리 루이 비통 재단에서 선보인 ‘DOKU’ 시리즈의 두 번째 장이다. 작가의 중심축을 이루는 아바타 ‘도쿠DOKU’는 모든 현상과 사물이 고정된 실체나 본질을 갖지 않는다는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한 디지털 페르소나로, 석가의 가르침인 ‘독생독사 독거독래’에서 유래했다. 이는 현실 세계나 가상공간 등 다른 차원에서도 삶은 고독하다는 뜻. “모든 존재는 홀로 태어나고 홀로 죽는다는 생명의 고독한 본질을 강조하는 의미예요. 삶에서는 많은 이와 상호작용하고 연계하지만, 탄생과 죽음만은 순전히 개인적 경험이잖아요. 각 개인이 자신의 행동과 결과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개념이죠. 이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일시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성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불교의 ‘비자아’ 교리와도 연결돼요. 자아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줄이고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를 키우는 데 도움을 주는 깨달음이랄까요.” 그동안 그의 아바타는 변화와 진화를 거듭했다. “이전 작품은 대부분 새로운 캐릭터를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최근에 주로 쓰는 도쿠는 제 세계관을 전달하는 일종의 채널이에요. 하지만 도쿠는 저를 표현하는 임시적인 그릇일 뿐입니다. 이미 가상 세계에 존재하는 캐릭터니까 이분법적 분류로 한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성별, 국적, 나이도 중요하지 않아요.”
도쿠와 함께하는 루양의 디지털 세상은 과학자, 심리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해 탄생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과 게임 엔진을 창작 매체로 폭넓게 활용하는데, 매체를 선택하는 과정도 자유롭다. 작가에게는 모든 매체가 작품을 담는 그릇이자 시각 요소일 뿐, 핵심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고. “기술이 창작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트렌드를 따라 특정 매체를 선택하지는 않아요. 단지 현재 진행하는 프로젝트 혹은 지금 단계에서 제 생각을 표현하기에 알맞은 매체인지만 관찰하죠.” 음악 또한 루 양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동안 오페라 작곡가, 블랙 메탈 밴드, 일본 오타쿠 프로듀서 등 작품에 필요한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뮤지션과 협업해왔다. 특히 ‘DOKU’ 시리즈에서 함께 작업한 상하이 기반의 뮤지션 리liiii와의 호흡이 굉장히 잘 맞았다고.

이러한 그의 작품은 초현실적이고 강렬하지만, 일부러 특별해 보이는 작품을 만들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의도적으로 남들과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발전 법칙을 따른다. 게다가 그는 명상과 사색을 하면서 작품의 출발 지점을 찾아낸다고. “자연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요. 그 시간 동안 우주가 제게 에너지와 정보를 보내고, 이미지와 개념이 자연스럽게 제 마음에서 흘러나와 정신에 깊게 각인돼요. 이후 제작을 시작하죠. 묵상의 시간을 떠올리면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을 때마다 처음 그 시점으로 돌아가 지침을 얻어요. 마치 3D 모델을 회전시키듯 다차원적 아이디어를 이동하고 조작하지요. 게임에서 저장된 모든 정보를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세이브 파일처럼요. 그다음에는 이성적, 논리적 사고로 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해 이런 정신적 측면을 일시적으로 억제해요. 창작 과정은 간단합니다. 대부분 처음 구상한 콘셉트와 완성작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중간에 제 생각이나 창작물을 바꾸지도 않고요.”
루양의 작품을 보노라면, 어느새 작품에 빠져들어 그가 보여주는 세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예술가로서 그의 가치는 이미 충분하지 않을까. “저에게 창작은 이타적 행위입니다. 우주에 관한 제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불교의 지혜를 나누고 전파하고 싶어요. 현시대에 근본적 변화를 불러오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지혜를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음과 생각에서 비롯해요. 비록 마음은 형태가 없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원천임이 틀림없습니다. 저 같은 개인이 세상을 위해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제 작업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제 존재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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