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패션위크의 대미를 장식하는 도시 파리. 지난 9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파리에서는 2025년 봄·여름 트렌드를 망라하는 패션위크가 열렸다. 9일간 펼쳐진 총 60여 개의 패션쇼와 38개의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수많은 장외 이벤트로 인해, 도시는 흐린 날씨와는 대조되게 활기를 띠었다. 분위기를 고조시킨 첫 번째 주자는 단연 디올. 지난 올림픽의 열기를 되새기듯 양궁 선수로도 활동하는 아티스트 사그 나폴리가 오프닝에 등장해 런웨이 한가운데서 활시위를 당기며 쇼를 시작했다. 로에베는 영국 아티스트 트레이시 에민의 설치 작품 하나로 공간을 구성했고, 에르메스는 흰 캔버스가 가득 찬 아틀리에를 재현해 전 세계 프레스와 패션 관계자를 초대했다. 패션위크 피날레의 주인공은 루이 비통이었다. 이번 쇼를 위해 루브르박물관 내에 거울로 뒤덮인 쇼장을 만들고, 트렁크를 켜켜이 쌓아 독창적인 런웨이를 완성했다. 이렇듯 컬렉션을 관통하는 테마로 베뉴를 설정한 패션 하우스가 있는가 하면 인물을 내세워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한 곳도 있다. 생 로랑 쇼에서는 본업에 복귀한 벨라 하디드를 만날 수 있었으며, 베트멍 쇼에서는 오프닝으로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깜짝 등장해 시선을 끌었다. (여자)아이들의 민니도 미우 미우 쇼에 모델로 나타나 런웨이 위에서도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장외 열기도 뜨거웠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K-팝 스타들이 있었다. 쇼장 근처에 몰린 인파를 보고 K-팝 스타의 등장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 블랙 핑크 멤버 모두 각 브랜드의 앰배서더로서 파리를 찾았고, 세븐틴의 에스쿱스, 차은우, 나나, 윤아 등 수많은 셀러브러티가 등장해 파리 패션위크를 빛냈다.
DIOR

고대 신화 속 여성 전사들을 현대로 소환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모던한 스포티즘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색채를 최대한 덜어낸80벌이 넘는 방대한 컬렉션 중 대부분은 블랙 & 화이트 컬러를 사용했고, 그중에서도 블랙에 집중했다. 어깨를 드러낸 재킷, 원 숄더 톱, 절개 등의 디테일을 통해 액티브한 무드를 배가한 것도 눈여겨볼 포인트. 글래디에이터 스타일의 하이톱 스니커즈, 크로스로 착용한 짐 백, 헤어밴드 역시 컬렉션의 맥을 이어간다.
LOEWE

오프닝으로 플라워 프린트의 크리놀린 드레스가 등장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절제된 화이트 큐브 쇼장은 입체적인 실루엣을 강조하기 위한 철저한 계산이었다는 걸 깨우치게 된다. 풍성하게 물결치는 재킷과 팬츠, 짧은 기장의 트래피즈 라인 드레스, 밑단이 들린 듯한 레더 코트 등 어느 하나 직선으로 떨어지는 요소 없이 유니크한 실루엣을 자랑한다. 여기에 모차르트, 바흐를 비롯해 반 고흐의 그림 등을 프린트한 깃털 톱은 조너선 앤더슨의 위트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HERMÈS

에르메스는 관능적인 실용주의에 입각한 룩을 대거 선보이며 2025년 봄·여름을 예고했다. 특히 속이 훤히 보이는 메시 소재의 톱, 드레스, 팬츠, 스커트는 이번 컬렉션을 대표하는 아이템이다. 이를 활용한 다채로운 레이어드 룩 또한 마주할 수 있다. 여기에 샌드에서 다크 브라운 컬러로 이어지는 컬러 팔레트는 고급스러움을 자아내며, 자홍색으로 포인트를 줘 풍성한 색채를 완성했다.
LOUIS VUITTON

1000개가 넘는 트렁크로 런웨이를 완성한 루이 비통은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함께한 10년의 여정을 기념하는 듯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복식 특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 이번 컬렉션에서는 퍼프 슬리브, 페플럼 디테일 등을 쉽게 마주할 수 있었다. 컬렉션의 대미는 프랑스 예술가 로랑 그라소와 협업해 그의 연작인 'Studies into the Past'를 재킷에 담아낸 것. 고전적인 미학과 현대적인 기술을 한데 버무린 컬렉션을 완성한 셈이다.
AKRIS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베르트 크리믈러는 프레스코화에서 영감받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컬렉션을 내놓았다. 화이트, 에크루, 페일 핑크 등 소프트한 색채는 미니멀한 실루엣, 고급스러운 소재와 만나 서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강조한다. 여기에 아웃도어 코드를 더해, 페미닌 드레스와 점퍼를 믹스하는 방식으로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또 창립자의 이름을 딴 직사각 형태의 ‘앨리스’ 백을 선보여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ISABEL MARANT

이자벨 마랑은 팔레 루아얄을 노을빛처럼 붉게 물들이고 아마존에서 영감받은 디테일을 적극 활용했다. 야생 나비가 연상되는 패턴, 강인한 여전사를 떠올리게 하는 저지 드레스가 이를 증명한다. 여기에 패치워크, 프린지 등 수공예적 터치를 가미한 룩은 와일드한 매력과 페미닌 감성을 동시에 표출한다. 글래디에이터 슈즈, 토속적인 네크리스, 팔뚝에 찬 뱅글은 전체적인 무드를 짙게 하는 데 한몫한다.
JUNYA WATANABE

준야 와타나베는 해체와 결합을 반복해 퓨처리즘에 초점을 맞춘 룩을 소개했다. 반사 패치, 방음 폼, 러버 카펫 등 리사이클링한 첨단 기능성 소재를 사용해 눈길을 끈다. 쇼는 준야 와타나베의 추상적 사고가 현실에 안착하듯이 점차 웨어러블하게 흘러갔다. 강직한 소재를 섬세하게 재조합해 곡선미를 살린 드레스는 원래 형태를 잊을 정도로 우아하게 재탄생했다.
NOIR KEI NINOMIYA

느와 케이 니노미야의 쇼는 뿌옇게 설정된 공간에서 붉은빛을 내는 구조적인 드레스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블랙, 레드, 화이트만 사용해 색을 절제하고 벨트, 하네스, 후드 등의 디테일을 거침없이 사용해 독창적인 실루엣을 완성했다. 헤어는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컬 스타일에 청동 주전자나 오브제를 장식했고, 리복과 협업한 레드 스니커즈로 이목을 사로잡았다.
COMME DES GARÇONS

모델이 새하얀 도자기 같은 옷을 입고서 런웨이에 나타난 순간, 쇼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연이어 등장한 룩 역시 옷이라기보다는 아트 피스에 가까웠고, 패션쇼보다는 퍼포먼스의 느낌이 강했다. ‘옷을 입는다’는 개념을 초월한 가와쿠보 레이에게 인체는 자신의 상상력을 펼치는 오브제에 불과한 것. 웨어러블한 옷이 즐비한 레디투웨어 쇼에서 꼼데가르송이 선사하는 패션의 재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쾌했다.
MIU MIU

미우치아 프라다는 어린 시절에 대한 짙은 향수를 작아진 옷으로 풀어낸다. 가장 순수했던 유년기 시절을 화이트 코튼 드레스에 투영하고 줄어든 니트와 비틀린 셔츠를 뷔스티에처럼 착용해 철학적인 아웃핏을 제안한다. 아기 옷장에 있을 법한 블루머즈를 팬츠로 스타일링한 것 역시 같은 맥락. 과거에 집중했다는 점은 컬렉션 곳곳에서 마주한 레트로 패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SACAI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사카이는 클래식한 아이템에 쿠튀르 요소를 더한 룩을 소개하며 이목을 사로잡았다. 네크라인에서 흩날리는 흰색 칼라와 러플은 이번 시즌 사카이 쇼를 관통하는 디테일. 밀리터리 코트나 점프슈트 같은 투박한 옷에 러플이나 퍼처럼 보이는 풍성한 프린지를 가미해 페미닌 요소를 적절하게 믹스했다.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는 아베 치토세의 디자인 철학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STELLA McCARTNEY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야외에서 펼쳐진 스텔라 맥카트니 쇼는 디자이너의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한 룩을 내세웠다. 재활용 플라스틱을 활용해 거품처럼 표현한 미니드레스, 학살당하는 새를 보호하자는 의미로 비둘기 패턴을 적용한 옷들이 바로 그것. 쇼에 선보인 룩의 90%가 한 마리의 생물도 해치지 않은 의식적 소재를 사용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YOHJI YAMAMOTO

큼지막한 샹들리에 아래 놓인 그랜드피아노에서 파벨 콜레스니코프의 라이브 연주로 시작된 쇼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피아노 선율과 대조를 이뤘다. 원단을 평이하게 사용한 룩이 거의 없을 만큼 모든 요소를 찢고, 조각하고, 뒤섞은 것. 체크 패턴, 레이스, 벨벳, 데님 등 서로 충돌하는 원단을 섞어 부조화 속 조화를 이끌어냈다.
DURAN LANTINK

2024년 LVMH 프라이즈에서 준우승에 준하는 칼 라거펠트 특별상을 받은 뒤란 랭틴크는 파리 패션 위크에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임을 다시금 증명했다. 볼륨감으로 과장된 형태의 실루엣은 이번 시즌에도 이어간다. 차별점이 있다면 리얼웨이에서도 입을 수 있을 만큼 절충안을 찾은 것. 독창성과 재미 그리고 현실성까지 갖춘 셈이다.
THE ROW

10억 달러의 투자 유치와 파리 플래그십 오픈 등 기분 좋은 소식으로 순항 중인 더 로우는 묵묵히 갈 길을 가겠다는 듯 ‘더 로우’다운 룩으로 다가오는 시즌을 준비했다. 오버사이즈 핏의 재킷, 워크웨어에서 착안한 블루 블루종, 우아한 이브닝드레스까지. 편안하고 입기 좋은 ‘드뫼르demeure’ 룩이 취향인 이들이 참고할 만하다.
SAINT LAURENT

지난 맨즈웨어 쇼에서 이브 생 로랑을 복제한 안토니 바카렐로는 이번 시즌 쇼를 위해 한 번 더 이브 생 로랑을 소환했다. 여성 버전의 이브 생 로랑은 남성복보다 더 격식을 차린 슈트 룩을 고수해 눈길을 끌었다. 피날레로 갈수록 브로케이드, 레이스로 완성한 이브닝 룩이 등장하며, 전반과 후반이 전혀 다른 쇼인 것처럼 대조적이었다.
VALENTINO

파리 패션위크 7일 차의 빅 이벤트는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알리는 발렌티노의 쇼였다. 공개 직후 ‘미켈레가 미켈레 했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콰이어트 럭셔리로 점잖아진 패션계에 다시금 불을 지폈다. 메종의 시그너처 요소와 미켈레의 코드를 결합해 리본, 술, 플리츠, 퍼 등의 모든 장식을 가미한 룩을 무려 85벌이나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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