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10월호

BOOKS OF MY LIFE - 시인 고명재

마침내 도착한 가을, 새로운 계절을 나기 위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시대가 주목하는 한국 문학 작가들에게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새긴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박규태

그레이 컬러 코트와 셔츠, 레이어드한 차콜 컬러 셔츠와 그레이 팬츠, 블랙 부츠 모두 질 샌더.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펴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잘난 점을 쓰는 게 아닌, 어떤 사람이 어떻게 숭고하게 빛났는지를 잘 표현하라는 거라고 믿는다.



은밀한 곳에서 피어난 누군가를 향한 애틋함, 시인 고명재

“우리 삶의 절망과 희망이 교직되는 순간순간을 절실하게 잘 드러냈다”라는 평과 함께 데뷔한 고명재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을 읽다 보면, ‘겨드랑이’를 드문드문 마주하게 된다. 사랑을 읊조린다는 시에서 신체의 은밀한 부위인 겨드랑이가 등장하다니···. 만약 시인의 기묘한 펜촉이 여기서 온점을 찍었다면, 의뭉스러운 감정을 거두지 못했을 터. 그러나 꿋꿋(?)하게도 그는 ‘얼얼’이란 시에선 ‘매복’이란 단어를 사랑과 이빨에 덧대더라. 아! 사랑은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고명재는 사랑이란 감정을 미미한 곳에서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멀리 떠나보내면서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저에게 건넸던 물건, 저를 물들인 습관 등의 흔적을 통해 소멸과 존재가 같이 있음을 느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히 원하는데, 더는 볼 수 없기에 아주 내밀한 구석에서 발견하고 싶은 마음. 관념으로는 거대하던 사랑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작아지잖아요. 추울 때 양손을 겨드랑이에 넣으면 따뜻해지듯이, 체온이 잘 유지되는 공간에 애틋함을 간직하는 것이죠.” 이러한 고명재가 구축한 사랑의 세계에 온전히 스며들기 위해선 그의 산문집을 펼치는 것이 필수다.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는 어느 날 김민정 시인의 “명재 씨는 무채색으로 글을 써보면 좋겠어요”라는 권유가 씨앗이 돼 탄생한 책이다. 흡사 디렉터스 컷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표지가 잔잔하다. 사랑을 주제로 한 글이 무채색이라니 쉬이 이해가 안 된다. “스님 손에 자라서 승복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고요하게 저를 사랑하다가 돌아가셨죠. 사랑에 빠지고, 태어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으로 찾아오기에 이야기 배열을 무작위로 했습니다. 물에 닿으면 울어버리는 재생지를 사용한 것 역시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담아내는 데 의의가 있어요.” 하지만 고명재가 써 내려간 시와 산문이 모두 우울로 침잠하진 않는다. 수육을 “색을 다 뺀 무지개를 툭툭 썰어서 간장에 찍어 삼키면 입속에서 일곱 색이 번들거리고”라고, 입술을 “잠시 붙었다 떨어져야 언어가 피듯, 만나고 떨어지며 우리는 산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을 가장한 죽음일까, 죽음을 가장한 사랑일까. 작가가 밖으로 내뱉은, 혹은 속으로 곱씹은 말들이 별글로 다가오기에 책장을 넘기는 내내 애달프다 충만해진다.



내 인생의 책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처음 시와 사랑에 빠지게 한 시인. 허수경의 시는 빛나고, 아름답고, 처연하다. 자기의 사랑을 노래하던 그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부터 국경, 난민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생살의 문제처럼 껴안는 시집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가느다란 실타래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어”라고 말하는 듯하다.

<녹스>, 앤 카슨  22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하고 헤어져 지내던 오빠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녹스>는 책의 형태가 미학적 사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코디언처럼 책이 펼쳐지는데, 마치 끝없는 파도의 형상처럼 죽음과 삶의 간극을 표현한 것 같다. 더욱이 관에 수납하는 형식으로 책 커버를 디자인해 애도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강렬한 철학의 인상을 남긴 저자. 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돌돌돌···”밖에 표현하지 못했는데, 롤랑 바르트는 문장을 화려하게 쓰더라. 내가 못 가진 것을 가졌기에 흠모하게 됐다. 책에는 사랑할 때 사람들이 내뱉는, 가령 ‘근사해’, ‘사랑해’같이 탄성처럼 내뱉는 말에 관한 해석이 담겨 있어 읽는 동안 내가 했던 사랑이 정돈됐다.


HAIR & MAKEUP  황령경  STYLIST  이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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