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9월호

내 안의 소리를 따라, 문소리

“저는 미친 짓을 많이 했어요. 그중 최고는 연기를 한다고 했던 거였어요.” 이야기를 좇아, 즐거움을 찾아, 연기에 빠져, 줄곧 기세 넘치는 배우로 살아온 문소리는 지금도,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친 듯이’ 뜨거운 삶을 살아나갈 예정이다.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김선혜


촬영 내내 포토그래퍼가 당신을 보며 “카메라에 담고 싶은 배우, 사진 찍기 좋은 얼굴”이라고 말하더군요. 뷰파인더로 보는 자신의 모습이 어떤가요?

말도 못하게 어색해요. 그래서 예전부터 포토제닉한 배우들이 부러웠어요. 작품을 할 때는 어쨌든 그 캐릭터로 살면 되는데, 사진 촬영이나 인터뷰 자리에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나마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요즘에야 겨우 뭔가 흉내라도 내게 됐어요. 아직 제대로 즐기지는 못하지만요.


데뷔 때부터 많은 감독이 당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싶어 했어요. 타고난 외모나 이미지 같은 본연의 것들이 배우에게 도움을 주기도, 또는 제약이 되기도 하죠. 당신에겐 어땠나요?

사실 저는 매우 배우다운, 다시 말해 포토제닉한 얼굴은 아니거든요. 외려 평범함에 가깝죠. 그런데 그런 외적 자질이 제 연기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현실성을 담보하고 나아가 신뢰감을 부여하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데뷔 초엔 몰랐는데 지금은 그게 큰 장점이지 않나 싶어요. 물론 사람들이 배우의 얼굴을 보며 로망과 판타지를 충족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모든 배우가 그걸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거든요. 제가 지향하는 작품이나 방향에 꼭 필요한 요소도 아니고요. 지금은 배우로서 제가 가진 것들을 긍정하고 만족하며 살고 있어요.


몇 년 전 영화진흥위원회가 진행한 ‘코리안 액터스 200’ 캠페인에서는 당신을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자’라고 소개하더군요. 굉장히 적확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오래전에 에니어그램 테스트라는 걸 해봤는데, 성격 유형이 ‘개척자’로 나오더라고요. 마음에 안 들어서 여러 번 다시 해봤는데도 결과가 같았어요. 인정하긴 싫지만 제게 그런 기질이 잠재되어 있나 봐요. 앞장서서 길을 개척해가는 성격이요. 실제로 겁이 많지만, 대신 준비를 많이 해요. 못할 것 같다가도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데뷔작부터 쭉 누구도 가지 않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죠. 어려운 작품, 힘든 캐릭터를 많이 맡았어요.

그런데 제가 혼자 해낸 게 아니에요. 든든한 멘토가 되어준 감독님들과 선배님들, 좋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자꾸만 스스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게 그분들이 항상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넌 다치지 않을 거야”라며 이끌어줬어요. 덕분에 결과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감 있게 제 길을 갈 수 있었죠. 만약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금방 나을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편히 마음먹을 수 있었고요. 그러면서 일의 기쁨도, 성취의 보람도 크게 느꼈어요. 결국은 함께한 이들 덕분이에요.


그렇다면 직접 자신을 설명해보죠. 어떻게 표현하고 싶나요?

고백하자면 저는 엄청난 울보예요. 굉장히 감성적이고 무엇보다 눈물이 많아요. 울컥할 때가 많은데, 어릴 때는 사람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으려고 애썼죠. 괜히 약해 보일 것 같고 스스로도 뭔가 지는 느낌이 들어서요. 이제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 느끼는 대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해요. 요즘은 연극 연습을 하며 거의 매일 눈물 바람이에요.


매번 눈물을 부르는 연극은 어떤 작품인가요?

인간관계, 창작의 고뇌,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예요. 50대 영문학부 교수 ‘벨라’와 미스터리한 학생 ‘크리스토퍼’의 대화로 이루어져요. 지극히 외로운 사람들의 만남이죠. 사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우리 모두 외로움을 품고 살잖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면서요. 아마도 많은 분이 둘의 격렬한 대화를 지켜보며 깊은 공감과 위안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점에 이끌려 출연을 결심하게 됐나요?

글쎄요, 지금쯤 이런 이야기가 끌릴 시기가 된 것 같기도 해요. 인생의 전환기라고 할까요. 일단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극중 거론되는 문학 작품들 때문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워낙 문학 작품을 좋아했고 영향도 많이 받았거든요. 벨라의 삶에서도 문학이 큰 역할을 해요. 대본에 나와 있는 여러 작품들을 보며 마치 좋아하는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받을 때처럼 설렜어요. 벨라에게서 추천 도서 목록을 전달받은 것 같고, 그것들을 읽고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2022년 <광부화가들> 이후 오랜만에 무대에 서요. 계속해서 다시금 무대를 찾게 되는 이유는 뭔가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접한 연극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최민식 선배의 <에쿠우스>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선배는 제 배우 인생을 책임져야 해요.(웃음) 농담이고, 무대는 정말 특별한 곳이죠. 배우로서 살아 있다는, 관객들과 함께한다는 ‘진짜’의 감각을 맛보게 하거든요. 참 아름다운 공간이기도 하고요. 무대에 설 때면 아름다움에 홀려 따라가지만 너무나 멀리 있어 잡을 수는 없는, 마치 별을 따러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그런 마음이 있어 무대를 좋아해요. 무엇보다 연극에는 뭔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치유의 힘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특히 많은 스타 배우가 연극 무대에 서고 있죠. 그 영향력과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요.

좋은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연극의 저변이 좀 더 넓어질 수 있겠죠. 다만 저는 그래도 무대는 좀 더 순수한 예술에 가까운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만큼 연극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고요. 더욱 과감한 시도가 빛나는, 공격적인 질문을 남기는, 다양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연극이 더 자주 무대에 오르고 더 많은 관객과 만났으면 해요.


작가, 감독, 제작자로서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전하기도 하죠. 창작자로서의 행보에 대해서도 기대가 큰데요.

제가 좀 게으른 창작자이긴 하죠. 생각과 마음은 매일 주변을 떠다니고 있는데 아직 그걸 끌어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좋은 때가 되면 이야기의 씨앗들을 잘 모으고 붙여서 키워봐야죠. 사실 지금은 저희 집에 계신 다른 창작자 분(남편 장준환 감독)이 한창 몰두해야 할 때라 곁에서 열심히 돕고 있어요. 장 감독의 배가 어느 정도 파도 위에 오르면 그때 저도 제 배를 띄워보려고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여배우들의 일과 삶을 그린 단편영화와 이를 묶은 장편 <여배우는 오늘도>를 선보이기도 했잖아요. 여배우로 살아가기, 과연 요즘은 어떤가요?

꽤 괜찮아요.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또 의미 있는 시간인 것 같아요. 연극 연출을 맡은 박천휴 작가를 비롯한 스태프들 그리고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이 대체로 젊은데요.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품을 만들어나가면서 참 좋은 자극과 에너지를 받아요. 그래서인지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제게 “얼굴 좋아졌다”는 인사를 건네더라고요. 솔직히 대사 량도 어마어마하고 연습도 고된 편이라 몸이 정말 힘들거든요? 그런데도 소진되는 느낌이 없어요. 오히려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랄까요.


언제나 과감하고 용감하게, 앞장서 걸을 수 있는 문소리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뭐든 지키려고 애쓰지 않아서 그래요. 머무르고 유지하려고 하면 힘들지만, 내려놓고 지나가면 그만이에요. 사실 저는 지키고 싶은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더 궁금한 것을 찾아서, 혹은 더 새로운 곳으로 넘어가면 되니까요. 앞으로도 쭉 그런 여정이었으면 좋겠어요. 뭔가를 차지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계속 즐겁게 흘러가고 싶어요. 사실 연기에서 ‘몰입’이라는 게 한 점으로 수렴되는 게 아니거든요. 흐름인 거죠. 연기가 그런 것처럼 저는 인생도, 배우의 길도, 모두 좋은 흐름이길 바라요.


그럼에도 휩쓸리지 않고 지켜내고자 하는 것, 흔들리지 않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요?

사람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애정이요. 그게 없다면 결코 좋은 연기도 없어요. 어떠한 순간이 오더라도 그 마음이 제 안에서 사그라지지 않길 바라요.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을 지켜내는 거요.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고,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었고, 그래서 더욱 다양하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했어요. 꾸준히 이야기들을 좇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고요. 특히 요즘 연극을 하면서 새삼 제가 ‘이야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앞으로의 바람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거예요. 그보다 더 좋아하는 걸 아직은 찾지 못했거든요.


오늘의 문소리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만족하며 살고 있나요?

꽤 많이? 오늘만 해도 무대에 오를 체력을 키우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운동을 하고, 이어서 그간 연기하며 틀어진 몸의 근육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탄츠플레이 레슨을 받으러 가서 열심히 몸을 움직였어요. 오후에는 내내 연습실에서 작품에 몰두했고 저녁엔 이렇게 멋진 화보도 찍었고요. 하루의 곳곳에서 즐거움과 작은 성취를 느끼며 나름 괜찮게 보냈다 생각해요. 이 정도면 제법 충만한 날들 아닌가요? 배우 문소리의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원래 제가 스스로에게 무척 엄격하고 웬만해선 만족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좀 더 넓게 받아들이게 되고 너그러워지더라고요. 불안하고 못마땅한 마음이 들 때는 제가 저에게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려 해요. 해이해지진 않되, 한 뼘 더 넉넉해지는 것. 오늘의 제가 내일의 저에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STYLIST  구원서  HAIR  우빈  MAKEUP  수경

COOPERATION  네헤라(3438-6173), 로에베(3479-1785), 에트로(3446-1969), 토템(1522-0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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