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M> 2024년 7월호

도예가 박종진, 정직하게 쌓아 올린 시간의 미학

손으로 다듬고 매만지며 빚어내는 아름다움, 도예는 어떤 다른 힘이나 꾸밈 없이 
오롯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근원적 예술이다. 가장 진실하고 성실한 자세로 오늘을 쌓아 올리는 
박종진 작가는 누구보다 그 본질적 아름다움의 의미를 믿는다.

EDITOR 이연우 PHOTOGRAPHER 김규한

박종진  국민대학교에서 도자공예학을 전공하고 웨일스 카디프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도예 전공 석사 학위를, 국민대학교에서 도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라믹 아트 런던, 피노크 아난티, KCDF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최근에는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 및 프로젝트도 추진 중이다. 서울여자대학교 공예 전공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시간을 쌓는 도예가 박종진은 종이와 흙,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재료를 사용해 의도적 결합이 이끌어내는 우발적 작용의 조형을 만든다. 다양한 방식으로 포개어진 종이는 흙물과 결합해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고온의 가마에서 다시 불을 만나 예측할 수 없는 나름의 모습으로 단단해진다. 수없이 반복된 행위는 순간의 공기와 함께 차곡차곡 쌓여 시간을 가두고, 함축된 시간은 지층의 형태로 예술 작품이 된다.

그의 독특한 작품 세계는 석사과정을 밟던 영국 유학 시절에 형성됐다. 원래 달항아리를 비롯한 백자 작업을 하던 그는 낯선 환경에서 기존에 익숙하게 떠올리던 개념과 생각들을 모조리 전복시키는 경험을 하게 됐다. 잘 안다고 여기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기. 도자기와 재료에 대한 모든 관념을 내려놓고 가장 기본에서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질성에 대한 확장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인간이 물질을 처음 대했을 때의 호기심을 다뤄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제일 먼저 시도한 게 종이였어요.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마음으로 온갖 시도를 해봤지요.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키친타월에 물을 뿌려 구조체를 만들고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재료를 재활용하려고 쌓아 놓은 키친타월 더미를 보고 있는데 문득 ‘나의 지난 일주일과 그동안 했던 물질에 대한 생각들이 저기 들어 있구나’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작은 더미에 엄청난 사건과 현상, 기록들이 응축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침 그즈음 걸으며 보았던 카디프 지방 해안가의 지층 형상이 연상됐다. 절벽에 남은 시간의 적층, 그리고 눈앞의 종이 더미는 경험과 시간을 품고 있었다. 박 작가는 여기에 또 한 번 흙이라는 물질을 쌓고, 소성하는 과정을 씌웠다. 소결된 종이는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다시 태어나고, 층 사이 생성된 틈을 메우거나 표면을 깎아내거나 색을 바르는 등의 가공을 거쳐 ‘의외의’ 결과물을 완성하게 됐다. “제 작업은 곳곳이 반전입니다. 특히 가마에서 굽는 과정 중에 변형이 많이 일어나죠. 심지어 형태가 무너져 아예 전복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래서 더욱 흥미롭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계속해서 다채롭게 작업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모험과도 같은 작업은 매일 성실하게 이루어진다. 일상에서 놓여나는 밤 11시부터 딱 3시간. 최소 천 번 이상 흙물을 종이 위에 붓질하고 더하는 과정은 때론 고행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몸이 힘들기 때문에 더 긴 시간을 쏟지도 못한다. 허락된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역사를 만들어갈 뿐. 하지만 확실한 건, 절대 매일의 작업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식이로든 성실하게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결코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니거든요. 번뜩이는 영감, 놀라운 감각은 특별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에요. 꾸준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제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아요.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합니다. 분명 학습으로 감각을 키울 수 있다고요. 다만, 열린 마음으로 흡수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체득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죠. 멈추지 않고 한결같이요.”

요즘의 그는 시간이 흐르며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매너리즘과 한계를 깨며 다양한 방식으로 전방위적 확장을 꾀하고 있다. 색도, 소재도, 규모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하고 구현해보려 한다.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이자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고민과 사유도 더욱 깊고 단단히 엮어가려 한다. “최근 들어 유한한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지, 나의 작업과 활동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 새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어요. 저를 대변하는 물질이 될 이 작업을 좀 더 신중하게 해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작품이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점이 도예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제 작업물을 매개로 저와 감상자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또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이야기가 이어지니까요. 앞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통해 의미 있는 소통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NSPIRATION IN LIFE

‘함께하는 관계가 아름답다’고 믿는 박종진 작가는 열린 마음으로 일상의 다양한 관계에 주목한다.



반복되는 작업을 할 때는 주로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듣는다. 대중음악도 작업의 좋은 촉매제가 된다. 다양한 페르소나로 장르적 실험을 거듭한 데이비드 보위는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아티스트.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레이디 가가의 음악은 유학 시절 자주 들었는데, 인트로만 흘러나와도 순수한 열정으로 몰두하던 그 시절이 떠올라 요즘도 종종 틀어놓곤 한다.



영감은 도처에 널려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좀 더 자유롭게 색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상의 제품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편의점의 담뱃갑, 농구 경기의 유니폼, 백화점의 쇼핑백 등 다양한 곳에서 창의성을 수집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인들과 6 대 6 풋살 경기를 한다. 운동은 예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명확한 기준을 세워놓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하고 노력하는 행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감각은 몸과 머리에 새겨진다.



테이트 모던에서 토니 크래그 Tony Cragg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토니 크래그는 인공과 자연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통해 조각의 개념을 확장해 인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좋아하는 작가이자 롤 모델로 삼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오래된 물건들을 찾고 모으기를 좋아한다. 특히 ‘시간’은 작가가 꾸준히 천착해온 주제. ‘시간’을 담은 오래된 시계를 미국 빈티지 숍에서 구입했다.



곁에 두고 아끼는 물건 중 하나, 앵글포이즈의 오리지널 ‘1227’ 데스크 램프. 아이코닉한 디자인의 대명사로,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멋과 품질을 자랑한다. 오래도록 가치를 지키는 것들을 보며 나 또한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다진다.



작업의 주재료는 종이, 키친타월이다. 형상을 기록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재료지만 형태를 이루는 과정에서 불에 타 소멸된다. 그 과정의 역설에서 발생되는 매혹. 때로는 시적인 서정을 느끼기도 한다. 요즘은 ‘희생’되는 종이를 생각해서 가능한 한 재생 종이나 폐지를 사용하려고 한다.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개인전 등 전시회를 통해 현재의 위치를 돌아보고 작업적 확장을 꾀하기도 한다.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KCDF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적층된 그리드-Layered Grid>에서는 기존 작품을 일부 깎아내고 연마하는 방식으로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표현했다.



SF나 스릴러 드라마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도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는 무척 재미있게 봤다. 스스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블랙 미러>를 보며 다양한 상상을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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