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 화백의 ‘묘법’이 루이 비통 ‘카퓌신’ 백으로 재탄생했다. 자연의 색을 표현한 붉은 컬러와 한지 특유의 질감을 그대로 재현한 백은 마치 ‘묘법’ 캔버스를 접어 만든 듯, 작품 그 자체다. 루이 비통이 2019년부터 매년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6인과 협업을 진행하는 ‘아티카퓌신’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올해 박서보 화백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 피터 마리노Peter Marino, 케네디 얀코Kennedy Yanko, 아멜리 베르트랑Amélie Bertrand과 함께 한국 작가 최초로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됐다. “작품이 벽에만 걸려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이왕이면 더 많은 사람이 감상하고 즐길 수 있으면 좋잖아. 루이 비통 덕분에 내 작품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할 수 있어 재미있었어요. 이젠 ‘묘법’을 손에 들고 다닐 수도 있게 된 셈이지 않나. 허허.” 묘법을 입은 아티카퓌신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는 작품의 디테일이 녹아들었다. 작품 특유의 독특한 촉감과 질감을 재현하기 위해 카프 스킨 가죽에 붓질 효과를 낸 후 3D 작업을 더했고, 내부에는 원작 뒷면을 재현해 천연 리넨 캔버스를 덧댄 후 작가의 서명을 프린팅했다. LV 로고에는 상감 장식을 더했으며, 가방 하단에는 화백이 오랜 시간 작품에 사용해온 나사에서 영감받아 4개의 스터드를 부착했다. 시대의 거장을 대변하는 작품과 루이 비통 장인 정신의 만남은 새로운 차원의 일상 속 예술을 이끌어냈다. 미술치료사로 활동 중인 딸 박승숙이 아버지에 대해 쓴 책 제목처럼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온 박서보 화백은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탐닉 중이다. 패션, 라이프스타일 분야의 ‘러브 콜’에 화답하고 젊은 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알레시Alessi와 함께 만든 ‘묘법’ 와인 오프너,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의 제품 위에 묘법 색을 입힌 조명, 베르나르도Bernardaud의 기술력을 접목해 새롭게 선보일 세라믹 판화 시리즈 등이 그 예. 일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작업에 매진해 독창적이고 견고한 작업 세계를 쌓아 올린 노장이 선보이는 ‘열린 자세’와 ‘협업의 결과물’은 많은 이에게 새로운 영감을 전하고 있다. 연희동 기지재단에서 박서보 화백을 만났다. 맞춤 제작한 연분홍색 누빔 재킷을 갖춰 입고 보랏빛 행커치프와 커다란 자수정을 품은 반지, 목걸이로 포인트를 준 모습에서 그의 남다른 감각이 엿보인다. 단풍이 곱게 물든 정원을 내다보며 일상의 미학과 예술로 충만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티카퓌신 프로젝트의 모티프가 된 박서보 화백의 2016년작 ‘묘법’. 일본 반다이산을 단풍으로 물들인 강렬한 붉은색이 특징이다.

루이 비통과 박서보 화백의 협업으로 완성된 아티카퓌신. ‘묘법’의 색과 물성을 ‘카퓌신’ 백에 구현한 디테일이 압권이다.
한국 아티스트 최초로 루이 비통 아티카퓌신 프로젝트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작품의 질감과 디테일을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 결과물이 놀랍습니다. 루이 비통과의 협업 과정은 어땠나요?
루이 비통이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내심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인정했다는 것이니까요. 또 이런 제안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작업을 진행하면서 루이 비통을 새삼 다시 봤습니다. 물론 우수한 브랜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인 정신이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일 줄은 몰랐지요. 내 작업의 특징을 구현해내는 디테일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요청 사항이 반영된 샘플을 보내올 때마다 모두가 감탄했어요. 덕분에 아주 즐거운 작업이 됐습니다.
특히 ‘묘법’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인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가 잘 표현된 듯합니다.
맞아요. 한지의 물성을 가죽으로 잘 표현해낸 셈이지. 내 작품 속 골짜기는 그림에 ‘손맛’을 입힌 겁니다. 같은 재료를 써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음식을 두고 손맛의 차이라고들 하지요. ‘그림에도 곱씹을수록 맛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손맛을 더하면 어떨까?’ 싶었고,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회색을 바른다고 하면, 거무튀튀한 색에 희끄무레한 색을 옅게 여러 번 발라 나중에 시각적으로 회색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러면 손맛의 층이 생기고,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생기지요. 이런 의도를 루이 비통이 잘 포착했다고 봐요.
이번 프로젝트의 모티프가 된, 붉은빛이 아름다운 ‘묘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지 위에 자연의 색을 입힌 색채 묘법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한번은 일본에 있는 화산 중 하나인 반다이산에 올라 주변 풍광을 바라보는데, 태양이 작열하는 골짜기의 단풍들이 마치 형광색을 발라놓은 것 같았어요. 색이 너무 강렬해 불길이 나를 쫓아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지요. 바람이 불어 태양빛이 다른 곳에 닿으면 그곳은 붉어지고, 다른 곳은 거무튀튀한 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기막힌 색 앞에서, 이런 걸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붉은 색채의 ‘묘법’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아티카퓌신에 관한 루이 비통과의 인터뷰 및 작업 설명에서 손자의 도움을 언급했는데요. 근래 들어 피크닉 전시, 세르주 무이와의 협업 등 원오브제로(1OF0)로 활동 중인 박지환 아트 디렉터와 함께하는 작업들이 눈에 띕니다. 서로 어떤 영감과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손자는 런던 패션 대학London College of Fashion을 나와 디자이너로 활동 중입니다. 아이디어와 감각이 아주 좋아서 여러 부분에서 도움을 받고 있어요. 이번 루이 비통 아티카퓌신 프로젝트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여럿 제안했지요. 처음에 루이 비통과의 협업 소식을 듣고 각기 다른 색의 3가지 가방을 구상해 왔는데, 모두 좋았지만 마지막에 보여준 빨간색 가방이 특히 훌륭해 최종 결과물의 기반이 됐어요. 내 작품의 아래와 위에는 밀린 한지의 무게로 인해 캔버스가 팽팽해지는 걸 막기 위해 나사를 박는데, 거기서 착안해 가방 아래에 받침을 더한 것도 그 녀석 아이디어입니다. 얼마 전 세르주 무이와 협업할 때는, 흑과 백 대신 내 작업에 담긴 자연의 색을 제품에 접목해 장식도 되면서 인간의 정서를 부드럽게 순화시키는 조명을 구상하기도 했지요. 덕분에 나 역시 새로운 자극을 받기도 하고, 요즘 시대에 걸맞은 작업을 이어갈 수 있어 고맙지요.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 ‘단색화의 아이콘’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단색화란 무엇인가요?
‘단색화’라는 명칭은 색에서 비롯됐지만, 실상은 사상이 핵심입니다. 서양미술은 인간중심주의이기 때문에 캔버스에 자기 자신을 최대한 토해내고 극대화해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우리 미술은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깁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그 속에서 합을 이루길 원하지요. 그러니 캔버스는 나를 비워내는 마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색화의 기본 정신입니다. 단색화를 이루는 요소라면, 먼저 ‘무목적성’을 들 수 있습니다. 행위가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무한 반복성’입니다. 스님이 종일 목탁을 두드리며 자신을 정갈하게 만들 듯, 무한히 반복하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은 ‘물성’입니다. 나의 경우 유화물감이 밀리고 찢기는 물성을 정신화하는 작업을 이어왔지요. 이 3가지가 없는 단색화는 가짜입니다.
많은 이가 작품에 깃든 자연의 색감에 감탄합니다. 아름답고 오묘한 색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요?
자연의 색을 그림 속에 유인해 스트레스로 가득한 대중의 정서를 치유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단풍잎 하면 보통 새빨간 색을 떠올려요. 하지만 빨간색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해를 받은 정면은 형광 빨강을 칠한 것처럼 붉은데, 바람이 일어 잎이 펄럭이면 뒷면은 어두컴컴한 빛을 띠지요. 이런 오묘한 조화를 보며 ‘바로 이거구나, 이런 걸 그려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경험한 감동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여 보는 이에게 치유를 전하는 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자연의 색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알리는 것이지요.
예술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전시를 보는 것이 가장 트렌디한 문화 생활로 여겨지고,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아티스트와 협업을 꿈꾸기도 합니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21세기는 디지털 시대입니다. 변화의 속도가 엄청 빨라서, 따라가지 못하는 많은 이가 추락합니다. 지구가 스트레스 병동이 될 판국입니다. 이런 시대에 예술은 대중을 치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르지 않은 잉크를 빨아들이는 흡인지처럼 사람들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것이지요. 고뇌하는 사람들이 그림 앞에 서면 편안해지고 행복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예술이 존재할 이유입니다.
우리 미술의 ‘격’에 대해 종종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럭셔리’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는 듯한데요. ‘격’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림을 논할 때 서양에서는 ‘질’을 따지지만, 동양은 ‘격’을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격조의 세계에 도달했는지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옛날 화가들을 보면 전부 학자였어요. 세상의 번뇌를 잊기 위해 지필묵 놓고 그림 그리며 붓글씨 쓰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자기를 수신하고 맑게 걷어냈던 겁니다. 복잡한 세상일수록 스스로를 비우고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격’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HOTOGRAPHER 안지섭 COOPERATION 루이 비통, 기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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