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2월호

흑백요리사, 그리고 설날의 추억

연말과 연초, 숨 돌릴 틈 없이 불 앞에 서 있던 셰프들에게 설날은 비로소 문을 닫고 자신만을 위하는 시간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흑백요리사 2>에 출연한 6명의 셰프가 각자의 방식으로 맞이한 각양각색 설날의 풍경을 전한다.

EDITOR 김나림 PHOTOGRAPHER 이우경, 이창화

부모님의 사랑을 가득 싣고

샘 킴


이탤리언 요리를 기반으로 자연주의 미식을 선보이는 셰프. ‘오스테리아샘킴’과 ‘뜨라또리아샘킴’을 운영하며, <흑백요리사 2>와 <냉장고를 부탁해> 등 다양한 방송을 통해 친근한 매력과 확고한 철학을 전한다.


나에게 설날은 부모님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부모님 집까지는 차로 1시간 30분 거리로 가까운 편이지만, 일이 바쁜 탓에 1년에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없어요. 설날 하루는 매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어머니가 음식을 정성껏 챙겨주시는데, 나물부터 시작해 산적꼬치, 만두, 새우전, 동그랑땡, 동태전, 깍두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죠. 그리고 아이가 중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명절을 같이 보내다 보니 이제는 하나둘씩 요리를 거드는 등 일손을 돕고 있어요. 어머니와 아이가 오손도손 모여 동그랑땡을 부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세월이 참 빨리 흘러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최고의 설날 음식은 많은 분이 ‘명절 음식’ 하면 한식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루의 끝에서는 양식을 찾게 돼요. 두 끼까지는 설날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지만, 배가 부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이 먼저 반응하곤 하죠. 그래서 세 번째 끼니부터는 치킨과 피자, 파스타 같은 양식이나 회같이 가벼운 음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어떤 자리가 어울리는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시계로 예를 들자면, 마냥 비싼 것이 아닌 스스로에게 맞는 시계를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과하게 드러내지 않되, 자신만의 멋을 확실히 아는 것이 럭셔리가 아닐까요?


설날에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갖가지 명절 음식.



유학 시절, 오세치의 추억

신현도(칼마카세)


청담 ‘모노로그’와 ‘멘쇼쿠’, 그리고 ‘히카리모노’까지 3개 업장을 운영하는 오너 셰프. 전국 상위 1% 산지에서 자라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정성 어린 요리를 만든다.


나에게 설날은 경매가 없는 날입니다. 일식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선인데, 설날에는 시장도 경매를 쉬어서 일식집도 문을 닫아요. 요리사는 휴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야 하죠. 보통 설날에는 쉬는 틈을 이용해 가족들과 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올해는 이미 1월 1일에 따뜻한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흑백요리사 2> 방영 이후로 이런저런 제안이 많이 들어와 일정을 잡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설날에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고 오붓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에요.


최고의 설날 음식은 일본 유학 시절 만들었던 ‘오세치’가 떠오릅니다. 일본은 양력설과 음력설을 나누지 않고 1월 1일부터 일주일간 쭉 쉬는데, 그 시기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곤 하죠. 오세치는 3~4일 정도 상온에 둬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에요. 네모난 찬합에 나흘 치 음식을 한가득 담아두고 먹는 새해 음식이죠. 콩과 멸치, 계란말이 등 오세치에 들어가는 갖가지 음식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란말이는 켜켜이 쌓인 책처럼 생겨서 공부를 더 잘하게 된다거나, 구멍이 뚫린 연근은 마치 망원경처럼 미래를 잘 보게 된다는 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재밌습니다. 일본 쓰지 조리사 전문학교에서 유학할 때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오세치를 만들었는데, 그걸 만드느라 잠도 못 잤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화려한 것보다 절제하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럭셔리’한 사람들만이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리기 때문이죠. 절제 안에 숨은 의미, 또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럭셔리하다고 느낍니다.


2월 제철 메뉴로 선보이는 조개 코스.



한 해의 계획은 설날부터

박가람(천생연분)


‘르버나딘’, ‘일레븐 매디슨 파크’ 등 뉴욕의 유수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을 거쳐 지금은 청담동 ‘드레스덴 그린’의 총괄 셰프로 일하고 있다.


나에게 설날은 새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날. 설날 전까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여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월 1일보다는 오히려 설날이 진정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출발점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한 해의 계획을 세울 때도 설날 전후로 다짐을 새로이 하거나, 목표한 것들을 이루어보자는 마음을 되새기곤 해요. 직업 특성상 가족을 자주 만나지 못합니다. 가족은 주말이 쉬는 날이지만, 저는 주말이 가장 바쁘기 때문이죠. 평소에는 식탁을 차리는 입장이지만 명절에는 가족들과 식탁 앞에 앉아 최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때는 리더로서 굉장히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많고, 지시하는 사람으로서 예민할 때도 많은데, 설날에는 “엄마 나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면서 실컷 어리광도 부리는 아이가 되는 편이에요. 원래는 설날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올해는 셰프 커플 다섯 쌍과 함께 강원도로 1박 2일 짧게 여행을 다녀오려고 합니다.


최고의 설날 음식은 고향에 가면 어머니가 뜨끈한 떡국과 삼색나물, 그리고 여러 재료로 부친 노릇노릇한 전을 해주십니다. 어머니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명절 음식이 떡국이에요. 그중에서도 쇠고기떡국을 즐겨 먹습니다.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예전에는 이 말을 들으면 성숙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데, 요즘에는 한 살을 더 먹게 될까 봐 살짝 두려워지는 면이 있습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풍기는 고급스러움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정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그런 상태가 바로 럭셔리 아닐까요?


2월에 맛볼 수 있는 메뉴 ‘옥돔 청각 줄기콩’.



고등어쌈을 먹던 어린 시절

타미 리(프렌치파파)


서울 청담동에서 17년째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 ‘비스트로 드 욘트빌’을 운영하며 국내 프렌치 음식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나에게 설날은 그리움.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왔지만, 부모님은 아직 80년 넘게 부산에 살고 계십니다. 상경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다는 그리움과 쓸쓸함이 있어요. 지금은 아내, 아들과 함께 방콕에 사느라 더 멀어졌죠. 하지만 요즘은 부모님을 뵈러 종종 부산에 갑니다. 부산행 기차를 타고 내려가다 보면 부산역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편안해져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이라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또 바쁘다는 이유로 약 20년을 부모님과 설날에 같이 지내지 못했어요. 그러다 작년 설날에 부모님을 오랜만에 뵀습니다. 그동안 설날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간만에 부모님과 아무 걱정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정말 좋더군요. 올해도 부모님을 뵈러 갈 예정입니다. 벌써 그리워지네요.


최고의 설날 음식은 고등어를 푸짐하게 얹어 먹는 고등어쌈. 고기를 사 먹기 힘들던 어린 시절, 설날에 고기가 먹고 싶을 때면 고등어를 잔뜩 사서 쌈 채소에 싸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당시에 수산 관련 일을 하셨거든요. 고등어와 무를 양념에 푹 조려서 쌈장과 마늘, 쌈 채소를 곁들이면 정말 맛이 좋습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겸손한 태도입니다. 요즘 ‘조용한 럭셔리’가 트렌드인 것처럼, 드러내지 않음에도 드러나는 게 진정한 럭셔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재스님이 떠오르네요. <흑백요리사 2>에서 당근 요리를 할 때 소금을 안 쓰셨는데, 조미료를 빼고 본연의 맛에 집중한 요리를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게 겸손하며, 비우는 태도가 결국 럭셔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을 들여 만드는 시그너처 메뉴, 어니언 수프.



낯설지만 설레던 첫 설날

고효일(안녕 봉주르)


프랑스와 한국, 두 나라를 잇는 ‘셰누 프라이빗 키친’의 프렌치 셰프. 20여 년간 프랑스에서 생활한 그는 현지에서 배운 프렌치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국의 재료와 정서를 더한 요리를 만든다.


나에게 설날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서 더 뜻깊은 날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프랑스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 문화가 더 익숙해요. 한국말도 서툴고요. 한국에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2016년 아내와 결혼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제대로 된 설날을 처음 경험했어요. 모든 식구가 함께 모여서 명절 음식을 만드는 모습은 프랑스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생소했지만, 동시에 재미있는 추억이었습니다. 특히 설날 연휴에 외국인 손님이 더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셰누 프라이빗 키친을 한가득 채운 외국인 손님들을 보고 있자면, 한국인 손님은 설날에 집 밖으로 나오는 대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최고의 설날 음식은 온 가족이 모여 만드는 차례상. 제가 살던 프랑스에는 설날 같은 문화가 없었습니다. 1월 1일 새해가 되면 가족끼리 스테이크나 연어 요리를 준비해 단란하게 저녁을 먹을 뿐, 설날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는 없죠. 아내와 결혼한 후에야 제대로 된 명절을 처음 경험해봤어요. 차례상 등 온갖 상차림을 준비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같이 전을 부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모습이 생소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저도 자연스럽게 명절 음식 준비를 돕고 있습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장인 정신입니다. 프랑스어로 ‘아르티장(Artisan)’이라는 말이 있는데, 럭셔리를 가장 잘 말해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르티장은 디테일과 흠잡을 데 없는 품질, 그리고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경험을 뜻하죠. 단순히 보이는 것이 아닌, 타인이 보고 느끼는 그 자체가 바로 럭셔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셰프의 노력이 담긴 기록들.



<최고의 요리비결>로 다져진 손맛

김상훈(4평 외톨이)


서촌의 작은 골목에서 한국 술집, ‘독도16도’를 운영한다. 40여 종의 전통주와 함께 공예 그릇에 담긴 주안상을 내는데, 음식과 식기 하나하나에 시간과 정성이 깃들어 있다.


나에게 설날은 설날이 되면 문을 닫고 고향 대구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못 보던 가족들과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데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최고의 설날 음식은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니가 만든 전과 비빔밥을 먹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전부터 EBS 요리 프로그램 <최고의 요리비결>을 보면서 노트에 빼곡히 메모를 해오셨습니다. 그렇게 적은 게 몇십 권 되는데, 이 노트가 바로 어머니 손맛의 비결이지 않을까요? 어머니의 음식 중에서도 좋은 생선으로 만든 전, 특히 금태나 큰 병어로 만든 전은 정말 부드럽고 맛있지만 자주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더 소중히 먹게 됩니다. 그 밖에도 나물 넣고 참기름 둘러서, 간장 조금 넣어 먹는 비빔밥을 좋아해요. 슴슴한 밥에 짭조름한 조기를 먹으면 간이 딱 맞아서 아주 좋아합니다. 전라북도 순창에 자리한 지란지교 양조장에서 판매하는 탁주와 약주는 항상 찾는 전통주입니다. 무화과잎을 감싼 누룩으로 만드는 술인데, 은은한 무화과 향과 달콤하고 산미 있는 맛이 기분을 좋게 하죠. 한국 술의 특징인 감미로움이 잘 살아 있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찾게 되는 술입니다.


나에게 럭셔리란 변함없이 좋은 것을 고집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 좋은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재료와 퀄리티를 고집하는 태도가 저에게는 럭셔리입니다.


설 음식에 곁들이기 좋은 지란지교 양조장의 탁주와 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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