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질랜드 퀸스타운에서 열린 페라리 시승 행사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를 함께 달린 ‘12칠린드리’.
서늘한 긴장감 속으로
뉴질랜드 남알프스의 겨울은 차갑고도 투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울과는 확실히 다른 청량한 공기 덕분에 코끝과 폐가 맑게 연결되는 듯했고, 빙판 위에서 드러난 운전 실력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지난 8월, 뉴질랜드 퀸스타운에서 열린 페라리 시승 행사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 Esperienza Ferrari on Ice’, 즉 ‘페라리 아이스 드라이빙 체험’ 여정은 베이스캠프인 애로타운밀브룩 리조트에서 시작됐다. 애로타운은 19세기 골드 러시(1860년대 금광 발견으로 세계 각지에서 광부들이 몰려든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로, 길을 걷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강가의 채굴터와 오래된 목조건물을 쉬이 발견 할 수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이곳에 밀브룩 리조트가 있다. 260헥타르(약 80만 평)에 달하는 부지에 자리 잡은 리조트는 남알프스 능선에 둘러싸여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여름에는 푸른 골프 필드와 산책로가 여행자를 맞이하고, 겨울에는 온화한 스파와 레스토랑 불빛이 따뜻한 피난처가 된다. 고즈넉한 역사와 세련된 감각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뉴질랜드의 하루를 특별하게 열어준다.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친 뒤
헬기를 타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12칠린드리의 스티어링이 민첩하게 응답해준 덕분에
얼음 위에 유려한 곡선을 남길 수 있었다.
얼음에 숨겨진 비밀의 장소
집합 시간은 칠흑 같은 어둠이 여전히 내려앉은 새벽 6시 30분. 밀브룩 리조트의 아침은 고요했고, 저 멀리 달빛과 만나 자태를 드러낸 눈 덮인 산맥은 오늘의 무대가 곧 펼쳐질 것임을 예고라도 하는듯 은은한 기운을 전해왔다. 아이스 드라이빙 스폿은 당연히 리조트가 아니었다. 차를 타고 40분 정도 와인딩 로드를 달려야 페라리가 마련한 겨울 왕국에 닿을 수 있었다. 군데군데 블랙 아이스가 숨어 있는 도로를 통과하자 더디어 인공눈이 흩날리는 설원에 도착했다. 이름은 SHPG(Southern Hemisphere Proving Ground).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친 뒤 헬기를 타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12칠린드리의 스티어링이 민첩하게 응답해준 덕분에 얼음 위에 유려한 곡선을 남길 수 있었다. 북반구가 여름일 때 전 세계 자동차 제조사들이 혹한 테스트를 진행하는 비밀스러운 장소다. 본격적인 프로그램에 돌입하기 전 로지에서 안전 교육을 받았다. 시트 포지션, 언더스티어 understeer(앞이 미끄러져 바깥으로 밀려나는 현상)와 오버스티어oversteer(뒤가 미끄러져 차체가 과하게 돌아가는 현상)가 일어났을 때 대응법, 기본적인 자동차 세팅 등을 안내했다. 가장 놀라웠던 순간은 마네티노Manettino 다이얼 조작법을 안내할 때다. 인스트럭터가 다이얼의 ESC(Electronic Stability Control: 전자식 차체 제어장치)를 아예 OFF로 맞추라고 지시했기 때문. 처음 도전하는 아이스 드라이빙을 전적으로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약간의 설렘과 과한 긴장을 안고 문밖을 나서려 했더니 스마트폰을 제출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SHPG는 출시를 목전에 둔 자동차들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공간이기에 보안이 필수란다. 음악조차 곁에 없게 되니 “고독하구먼”이란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때 양옆으로 도열한 ‘12칠린드리Cilindri’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년 5월 인천 인스파이어 리조트에서 개최된 아시아 프리미어 행사에서 “12칠린드리는 스포츠카 드라이버와 레이싱 드라이버 모두를 만족시킬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이래, 줄곧 선망의 대상이었던 차량. V12 6.5리터 자연 흡기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830마력의 힘, 9500rpm까지 치솟는 엔진 회전수, 단 2.9초 만에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폭발적인 성능이 막얼음 위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스티어링 휠의 개입을 최소로 한 채 스로틀로 뒷바퀴를
넓게 움직여야 아름다운 눈보라를 휘몰아칠 수 있다.
이번 아이스 드라이빙은
마네티노 다이얼을 ESC OFF에 맞추고 진행했다.
830마력, 9500rpm까지 치솟는 회전수를
자랑하는 12칠린드리의 V12 6.5리터 자연 흡기 엔진.
미끄러짐으로 배우는 균형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에선 ‘오버스티어’와 ‘카운터스티어counter steer(뒷바퀴가 미끄러지는 방향과 반대로 스티어링 휠을 돌려 차체를 제어하는 기술)’를 얼마만큼 구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이때 밑바탕에 있어야 하는 건 단연 오버스티어다. 핵심은 스티어링 휠의 개입을 최소로 한 채 스로틀로 뒷바퀴를 넓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 초반에는 의도적으로 오버스티어를 일으켜야 하는 조작이 익숙하지 않아 스로틀을 활용할 때마다 피겨스케이팅 스핀 버금가는 540도 회전을 반복했지만, 이내 우아한 꿀벌의 비행을 선보이며 아름다운 눈보라를 휘몰아칠 수 있었다. 아마 ESC를 작동했다면, 차량의 동작이 제한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스트럭터가 왜 ESC OFF를 이야기했는지 이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워밍업으로 12칠린드리와 얼음의 긴장을 풀어낸 뒤 마주한 과제는 ‘슬랄럼Slalom’이었다. 구간
을 표시하는 파일론pylon(삼각 콘)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해야 했는데, 얼음 위에서는 작은 입력
하나에도 차체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무한대(∞) 기호를 그리게 하는 ‘피겨Figure 8’에는 꽤
나 까다로운 변수가 숨어 있었다. 좌우 전환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스티어링과 스로틀의 호흡이 조금만 어긋나도 차체가 제멋대로 미끄러진 것. 처음에는 한쪽 원에서 각도를 만들고 반대편으
로 옮겨갈 때마다 꼬리가 지나치게 풀려 8자 궤적보다는 삐걱거리는 지그재그에 가까웠다. 인스트럭터가 “굿 잡Good Job”이라고 외쳤지만, 애써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점차 리듬을 찾자 스티어링은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충분했고, 차체는 무게중심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좌우의 흐름을 이어갔다. 마지막 관문은 ‘링킹 슬라이드Linking Slide’였다. 좌우로 차체를 흘리며 미끄러짐을 끊지 않아야 하는 코스로 지금까지 배운 조작을 모두 증명하는 무대였다. 한쪽으로 슬라이드를 마치자마자 반대편으로 각도를 조율하는 것이 관건으로, 12칠린드리의 스티어링이 민첩하게 응답해줘 얼음 위에 유려한 곡선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링킹 슬라이드 막판에 피겨 8이 다시 등장한 것. 이를 마쳐야 링킹슬라이드의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과감
히 시도했음에도 과욕 탓인지 오버스티어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해 아쉬운 흔적을 남겼다. 피날레를 치른 뒤 헬기를 타고 남알프스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조종사는 창밖을 가리키며 농담처럼 말했다. “This is my Ferrari.” 거대한 자연을 마치 자기 차처럼 가볍게 다루는 농담이 묘하게 진지하게 들렸다. 리조트로 돌아온 뒤에는 근육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얼음 위에서 온몸으로 버텨낸 긴장과 집중이 남긴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고단함은 불편함이 아닌, 이날 배운 모든 감각이 몸에 새겨진 증거 같았다. 에스페리엔차 페라리 온 아이스는 힘과 속도를 과시하는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12칠린드리의 울림은 거친 돌진을 거두고 얼음 위에 섬세한 선율을 남기게 했다. 미끄러짐은 불안 대신 균형을 가르쳤고, 절제 속에서 비로소 자유가 태어났다. 돌아보니 SHPG에서의 경험은 차를 길들이는 일을 넘어 나를 다듬는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COOPERATION FMK 페라리(537-0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