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10월호

NEW ERA OF STATION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지만 도시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거나, 낡고 오래된 건물을 
숲의 일부처럼 만들거나, 혹은 민주 사회 광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거나. 
최근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지하철역과 기차역은 역이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GUEST EDITOR 박민

빛이 관통하는 곳_영국 패딩턴 역



© WW+P Architects, photo: Morley Von


런던 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패딩턴Paddington 역은 2022년, 10년이 넘는 공사 끝에 런던 엘리자베스 선의 새로운 건축적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WW+P 건축사무소가 역사 설계를 하며 가장 중요시했던 부분은 승객 중심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사람들이 역의 중앙 홀을 통해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입구를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했다. 기존의 동선을 개선해 패딩턴 역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도 쉽게 입구를 찾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타는 곳이라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려 깊은 설계로 실현했다. 인테리어 부분에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요소를 이어가는 것은 물론 새로운 시대를 위한 독창성 또한 놓치지 않으며 규모와 빛을 활용했다. 플랫폼까지 자연광이 들어오고 자연 환기가 될 수 있도록 설계했고, 플랫폼의 승객은 외부 거리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 위해 복잡한 엔지니어링 과정이 필요했지만 WW+P 건축사무소는 웅장한 규모의 패딩턴 역 건물과 그 안의 사람들의 쾌적함을 위해 끝까지 빛을 위한 설계를 완수해나갔다. 역의 입구에서는 스펜서 핀치Spencer Finch가 완성한 2300㎡ 규모의 작품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가 승객을 맞는다. wwparchitects.com




광장이 펼쳐지는 기차역_중국 자싱 역



매드MAD 건축사무소는 올해 중국 자싱嘉興 역을 완공하며 자신들의 첫 번째 교통 인프라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1995년에 건설된 원래의 자싱 역은 노후화되며 중국의 가파른 도시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건축물로서 자싱 역의 역사는 꽤 길다. 1907년에 지어졌지만 수십 년 후 철거되었고, 1995년에 다시 건축된 것. 이에 매드 건축사무소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건물의 헤리티지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현지에서 조달한 21만여 개의 붉은색과 녹색 벽돌을 활용했다. 벽돌을 통해 과거의 이미지를 재현하되 전체적인 디자인은 인간 중심적이고 효율적이게 완성했다. 우선 기차의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합실과 천장, 터널 벽에 특수 처리를 했고, 역 뒤편에는 유리 파사드를 설계해 옛 역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현대적인 구성을 더했다. 또 역의 주요 기능을 대부분 지하에 배치한 덕분에 지상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보다 확장할 수 있었다. 광장에는 다양한 문화·상업 공간이 들어서 도시에 활력을 더하고, 중앙엔 넓은 잔디 광장을 두어 작은 콘서트나 축제 같은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부지 전체에 15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어 주변 숲 경관과 어우러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도시의 인프라 시설은 기능성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수평적인 위치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도시 재생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i-mad.com




기차역의 새로운 쓸모_미국 미시간 센트럴 역



Photo: Justin Maconochie / Jason Keen


1913년에 지어진 미국 미시간 센트럴Michigan Central 역은 한때 하루 4000여 명의 승객들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1988년 폐역이 되었다. 2009년에는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포드Ford사가 미시간 지역의 도시 재생을 목표로 건물 레노베이션에 나섰다. 그렇게 한때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차역이자 도시의 랜드마크였던 건물은 퀸 에번스Quinn Evans 건축사무소를 만나 새로운 쓰임새를 찾게 되었다. 더 이상 기차가 오가는 기능을 하지는 않지만 20세기 초 가장 유명한 기차역이자 오랜 시간 도시의 랜드마크였던 건물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기차역을 레노베이션하면서 퀸 에번스 건축사무소가 가장 중요시한 점은 미시간 센트럴 역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과 상징성에 대한 이해였다.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건물은 섬세한 복원 작업이 이뤄졌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곳은 그랜드 홀의 아치형 테라코타 타일 천장과 주철 창문을 복원한 것. 가능한 한 대부분의 디테일은 수작업으로 완성하며 헤리티지를 이어갔고 지속 가능성을 위한 시스템 설비도 놓치지 않았다. 이제 미시간 센트럴 역에는 다양한 문화, 전시 공간과 레스토랑을 비롯한 상업 시설, 오피스 등이 들어섰고 건물 앞 넓은 정원은 시민을 위한 공원이 되었다. 올해 레노베이션을 마친 미시간 센트럴 역은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이어가며 디트로이트시의 새로운 플랫폼으로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quinnevans.com




민주적인 공간의 의미_이란 자하드 역


© KA Architecture Studio / Mohammad Khavarian Architecture Studio




1979년 이란혁명 이후 많은 도시 개발 전문가가 테헤란을 떠났고 비전문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로 인해 도시 개발은 다른 산업 대비 후순위가 되며 공공시설의 개발도 늦춰졌다. 하지만 이제는 이란에도 새로운 도시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테헤란에 위치한 자하드Jahad 역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파빌리언을 통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란에 기반을 둔 KA 건축사무소는 자하드 역의 광장이 ‘민주적이고 열린 공간’이 되기를 바라며 설계했다. 우선 파빌리언의 주재료로 선택한 것은 벽돌이다. 도시의 기후에 가장 적합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구성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테헤란의 많은 건축물이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기존 건축물과의 조화를 고려했다. 또 교차로에 위치한 만큼 도시의 연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를 고민한 끝에 둥그런 통 모양의 아치 형태 지붕을 만들었다. 이런 설계는 기존 입구를 크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비용을 절약할 수 있고 지붕 아래 공간이 광장처럼 형성되어 처음 의도대로 시민을 위한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지붕 아래 광장은 이벤트가 열리기도 하며, 때로는 민주적 시위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테헤란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고 안전하게,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광장에 모일 수 있는 것이다. 역은 편리한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로서 포용적이고 참여적인 도시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개념을 실현했다. khavarianarchitects.com




날씨에 구애받지 않는 환승 허브_덴마크 코펜하겐 사우스 역


Photo: Rasmus Hjortshøj / Arkitema / Gottlieb Paludan Architects Artwork: Christian Schmidt-Rasmussen.




도심과는 거리가 있는 편인 코펜하겐 남서쪽에 큰 규모의 환승 플랫폼이 들어섰다. 코펜하겐 사우스Copenhagen South 역은 국내외 철도는 물론 지하철과 버스, 경전철 등이 모두 지나는 환승 허브인 만큼 수많은 사람이 모인다. 아르키테마Arkitema 건축사무소는 환승 구간을 광장처럼 설계하며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고, 보다 밝고 개방된 공간에서 환승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번잡한 역이 지니는 기존의 이미지로부터 탈피해 역을 찾는 모든 사람이 개방된 공간을 지나며 쾌적하게 환승할 수 있게 하는 데 주목했다. 설계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비가 오더라도 ‘신발과 옷이 젖지 않고’ 환승 구간을 이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는 것. 학교에 가는 어린이, 유모차를 끌고 외출을 나선 부모, 낯선 곳으로 첫발을 내딘 여행객,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모두 비가 와도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야외 환승 구간을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르키테마 건축사무소는 코펜하겐 사우스 역 환승 구간과 함께 M4선의 쉬드하운Sydhavn 역까지 연장하며 5개의 지하철역 설계에 참여했다. 이 중 모차르트 플라즈Mozart Plads는 플랫폼 안으로 자연광이 들어올 수 있도록 채광 시설을 만들었다. 또한 덴마크 예술 재단과 협업을 통해 덴마크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설치해 지하철역을 찾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틈틈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했다. arkitema.com




등대로서의 파빌리언_캐나다 코테데네주 역



Photo: David Boyer


캐나다 몬트리올주의 코테데네주Côte-des-Neiges 역에는 지역의 등대 역할을 하는 지하철역 파빌리언이 있다. 이곳은 몬트리올의 지하철역 가운데 가장 붐비는 역 중 하나인 만큼 편리한 교통 시설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주요 거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드 리Sid Lee 건축사무소는 파빌리언을 설계하며 대중교통 시설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것은 물론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자연보호 지역으로 지정된 숲을 해치지 않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 견고히 있어온 생태계를 존중하며 지금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부분은 지역사회에 있는 주요 건축물에서도 영감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건축사무소는 지역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했고, 근처에 있는 성 요셉 대성당, 기존의 역 건물, 주거용 건물 등을 면밀히 살펴보며 주변과 어울리되 충분히 현대적인 파빌리언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과장된 크기의 유리 파빌리언은 낮에는 역 주변의 숲을 그대로 관통해서 보여주고 밤이면 밝은 등대 역할을 한다. 공공건물은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렇게 실현한 셈이다.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지하철역이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소를 세심하게 들여다본 끝에 사려 깊은 건축물이 되었다.

sidleearchitec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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