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4월호

왜 쇼펜하우어인가?

우리는 왜 200년 전 철학자에 열광하는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사상을 담은 책 세 권을 소개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자신과 ‘썸’ 타지 말 것.

EDITOR 박이현

에디터의 인생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지오의 엄마는 말한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누구나 뒤통수를 맞으니 억울해 말라고. 다 별일 아니라고.” 드라마가 방영된 20대 중반만 하더라도 모든 게 다 별일이던 서러운 시기였다. 상대의 영혼 없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아프곤 했으니까. 물론 여전히 모든 일에 초연한 건 아니지만, 늘어난 인생의 나이테 크기만큼 애틋함에 도달하는 속도를 다소 조절할 수는 있게 된 듯하다. 드라마가 방영된 2000년대 후반,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도 오춘기를 겪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따스함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축 처진 어깨를 다독였던 게 사실. MBTI식으로 F형(감정적) 멘트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위안의 유형이 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적인 T형 공감이 인기다. 주인공은 바로 쇼펜하우어다. 작년 가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쇼펜하우어 책이 나온 뒤 반년 가까이 서점 베스트셀러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다. 그는 60세가 넘어서야 빛을 본 철학자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19세기에 ‘산다는 건 늘 괴로운 일’이란 염세주의를 내세워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반성하고 현실을 이해하면, 참된 이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헤겔의 낙관적 성향을 비판한 것도 한몫할 터. 추측건대 당시 가슴이 메마른 사람들에게 헤겔의 이야기는 텅 빈 충만으로 다가왔으리라.


유리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사물과 인물 표정을 통해 가상의 풍경을 만든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은 중요한 존재라고 말하지만, 이를 베는 행위에서 “지나치게 친절하고 예의를 차리는 바람에 상대가 너무 거만해져서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자주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상대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가만히 있질 못한다”라는 쇼펜하우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오늘날, 관념적 어루만짐은 으레 하는 인사와 마찬가지다. 예로, ‘다 잘될 거야’라는 막연한 주문은 얼마나 유효할까. 길어봐야 1시간일지도. 그러니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집착을 버려야 고통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문구에 열광할 수밖에. 다수가 자신이 불안하다는 시대, 현재를 냉정하게 살펴보라는 시크한 ‘팩폭’이 새로운 형태의 동감인 셈이다. 궁금하다. 그가 어떤 논리를 펼쳤기에 열풍이 식지 않는 것인지. 곱씹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쇼펜하우어 책을 소개한다. 먼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포레스트북스). 직설적인 제목이 단번에 마음을 홀린다. 본문은 간결한 글로 구성돼 빠르게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책은 쇼펜하우어의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큰 줄기로 삼는다. 편역자 김욱은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라는 그의 진리를 새긴 젊은이들은 이 험한 시대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표상’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포리즘은 첫 장부터 덮을 수 없는 매력으로 그득하다. 철학자의 에고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얄밉진 않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서워서다.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망령”, “존경받을 만한 행동을 할 자신이 없어 반대급부로 명예가 훼손됐다는 아집에 사로잡힌 것”, “불행의 시작은 사람들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등의 문장은 뜨끔할 정도로 날카롭다. 이는 행복해지고 싶어 불행해진 삶을 돌리려면 내가 오롯해야 한다고 전언하는 게 아닐는지. 마치 21세기를 미리 통찰한 모양새다. 덕분에 가시적인 것만 좇는 삶을 생의 의지로 믿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차현욱은 자신의 경험이 만들어낸 기억의 조각을 찾아 이어 붙이며 새로운 대상 또는 장면을 그린다. 쇼펜하우어는 “완벽하게 사려 깊은 생활을 하고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직접 경험하고, 행하고, 느꼈던 것을 자주 회상하며 검토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작가의 그림에선 명징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홀로 고독과 마주하며 오롯한 나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연상된다.



다음으로, 철학 교양서 최초로 전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유노북스). 쇼펜하우어는 마흔을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나이라고 정의한다. 나이와 경험치가 쌓인 인간은 예전의 나보다 조금은 발전한다는 게 그 이유. 서양이나 동양이나 불혹을 괜히 인생의 기점으로 일컫는 건 아닌가 보다. 책은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황금기이자 ‘인생은 고통’이라는 인식에 다다른 마흔에 전하는 지혜를 모았다. 저자 강용수는 고통을 ‘가짜 행복’을 좇는 고통과 ‘진짜 행복’을 좇는 고통으로 나눈다. 여기서 가짜 행복이란 부·명예·출세를, 진짜 행복이란 내면 깊은 곳에서의 성찰을 의미한다. 당연히 후자가 쇼펜하우어의 지향점. 그는 인간의 욕망이 채울 수 없는 갈증과 같다며 욕망의 크기를 줄이라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 나를 남과 비교하지 말고 온전히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결론 맺는다. 이처럼 그는 지리멸렬한 인간관계에서 올곧은 나를 세우는 방식을 알려줘 흥미롭다. 가끔은 내가 나를 대하는 처세술을 알려주는 교본 같기도. 천 번 흔들려도 천 번 휘둘리지 않는 뚝심을 바란다면,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 쇼펜하우어식 자기 계발서를 곁에 두기를.


마지막으로, 1851년 출간된 <소품과 부록> 중 소품 부분을 번역해 담아낸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쇼펜하우어 소품집>(페이지2북스)은 확장판 혹은 심화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편집한 앞선 두 권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딱딱한 인용구가 자주 등장하니, 지난한 사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만 권하는 바다.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그중 “쾌활함은 잘못된 때에 찾아오는 법이 없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이유부터 먼저 알아내려는 마음과 심각한 숙고, 상당한 우려 탓에 쾌활함을 받아들이길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만이 전부인 사람에게는 나는 모든 것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확실한 행복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행복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말을 계속 되뇌어야 한다”, “행복과 불행에 관한 것들을 그저 이성과 판단의 눈으로, 결과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반성으로, 단순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봐야 한다. 상상력은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상상력은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쓸데없이 종종 아주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영상을 보여준다”라는 구절이 개인적으로 와닿는다. 냉소적이긴 하지만, 동시대 사람들이 가진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하기 때문.



윤미류는 주변 인물을 그리지만, 관객은 둘의 관계를 알 길이 없어 다양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캔버스-인물이 느슨하게 연결된 틈을 유영하는 일이 즐겁다. 전시장에서 물에 젖은 인물을 보았을 때 가슴이 일렁였다. “우울의 망령에 정복당하고 나면, 사람의 영혼엔 오직 분노만이 남게 된다. 외로워서 화가 나고, 피곤해서 화가 나고, 남들이 행복해서 화가 나고, 마침내 화만 나는 내가 싫어서 미칠 듯이 화가 난다. (…) 우울의 끝에서 태어난 열광은 기존의 것들을 부정함으로써 불씨가 지속된다”라는 문장 때문에.



종합하면,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거시적 관점에서 ‘나와 제대로 맞닥뜨리는 일’로 귀결된다. 책임 없이 즐기기만 하는 ‘썸’, 즉 불가근불가원은 나를 마주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다는 뜻. 행복은 찾으려는 사람에게 온다고 하지 않던가. 자기애를 갖고, 능동적이며 진취적인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쟁취할 수 있을 테다. 그렇기에 위의 책들을 (소설가 황경신의 표현을 빌려) ‘살아있기에 온 힘을 다해 경계하는, 세속적인 즐거움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캄캄한 갈망을 마음속에 지닌 채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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