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3월호

LIVING in SEOUL

태어나고 자란 땅을 떠나 서울에 둥지를 튼 이들이 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다재다능한 이들이 삶의 터전으로 서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23명의 외국인이 이야기하는 서울의 매력과 이곳에서의 라이프스타일, 아끼는 풍경과 공간들.

EDITOR 이호준 PHOTOGRAPHER 이창화, 이우경, 이기태

포르쉐코리아 대표, 홀가 게어만



“다각도의 매력을 갖춘 서울은 만화경 같은 매력을 지녔다. 이 도시에 도사린 충만한 문화적 다양성은 매일 새로운 삶을 꿈꾸게 만든다.”


2019년 포르쉐코리아 대표로 부임한 홀가 게어만의 서울 사랑은 작년 서울시 명예시민 15인 중 한 사람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더욱 두터워졌다. 대표 취임 이후 기존 대비 2배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브랜드 가치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포르쉐 창립 75주년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도 그는 매일같이 도시 곳곳을 산책하며 서울의 매력을 다각도로 즐기는 새로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단 한 곳만을 골라야 하나?”라는 농담을 역으로 던질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카페 ‘한남작업실’은 서울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방문했던 곳 중 하나다. 한국에 대해 사전 지식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마치 선물 같은 공간이었다. 굉장히 현대적인 동네인 한남동에서 공예가 지닌 전통적인 매력과 장인 정신 또한 느껴지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직업 특성상 여러 국가에 머무는 만큼, 홀가 게어만 대표는 마치 언어를 습득하듯 주변 환경과 규칙에 적응하는 시간을 수차례 거쳐왔다. 도로의 이정표를 보는 등의 사소한 부분부터 자잘한 혼란이 거듭될 만큼 낯선 곳에서 새롭게 삶을 꾸리는 일은 많은 시행착오를 동반하지만, 그는 서울에서의 시작이 사뭇 달랐다고 느꼈다. 일례로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남산 산책을 가면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요”라는 칭찬의 말은 물론 반려견 동반 산책에 대한 팁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반려인들,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동네 주민이 전하는 가벼운 안부 인사는 이방인인 그가 서울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동시에 이 도시를 이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감정적인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가끔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변화무쌍한 역동성이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K-팝, 패션, 공예, 아트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이뤄내는 추진력과, 매일같이 생겨나는 뉴 스폿은 서울이 단지 머무는 도시가 아닌 활기찬 생명력을 지닌 도시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공장 지대였지만 젊은 세대들이 변화를 일궈내 핫 플레이스로 거듭난 성수동의 거리, 전통의 상징인 궁이나 한옥 등과도 조화를 이루는 여러 플래그십 스토어와 숍이 자리한 경복궁 일대를 보고 서울이 지닌 생명력이 어마어마함을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고. 여전히 서울을 탐험하는 마음으로 매일 집 밖을 나서는 그는 변화의 기운으로 가득 찬 도시에는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있음을 믿으며 서울의 매력을 한층 다각도로 파헤치는 데 여념이 없다.



현대자동차 글로벌 PR팀 상무, 앤드류 로버츠



“서울은 타협하지 않는다. 정체되지 않고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며, 사람들 또한 매일 온 감각을 곤두세운다. 미래를 내다보는 도시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21년, 앤드류 로버츠는 고국인 영국을 떠나 한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그야말로 탐험가와 같은 대담한 시도를 감행했다. 영국의 한 모터 매거진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동차 업계에서 꾸준히 공력을 쌓아온 앤드류 로버츠에게 현대자동차 글로벌 PR팀 상무직 제의가 들어왔고, 이를 수락하며 한국행을 선택하게 된 것. 당시만 해도 세계는 팬데믹의 음울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혼자가 아닌, 가족 모두가 한국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사뭇 과감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가족들에게 이는 두렵고 막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일에 가까웠다고 앤드루 로버츠는 말했다. “나와 아내, 두 아들 모두 한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과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국이 국제적으로 뛰어난 비즈니스 평판을 갖춘 국가라는 점과 세계적 인기를 구가하는 한국 문화를 체감할 수 있다는 점도 한국행 결정에 한몫했다. 거처를 옮긴다는 건 우리에겐 비교적 간단한 결정이었다.” 분명 메트로폴리탄이지만 산과의 접근성이 높은 덕에 사계절의 변화가 피부로 와닿는다는 점, 편리한 대중교통, 뛰어난 통신 상태, 잘 갖춘 도시 인프라 등 서래마을에서 시작한 앤드루의 한국 생활은 크고 작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몇 해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빨리빨리’ 문화,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음식 주문, 지하철과 버스 교통 환승 같은 일은 앤드류와 그의 가족에게 아직도 신기한 한국의 문화다. 올해로 3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서울 생활의 장점은 여전히 다양하다. 일례로 뛰어난 한국 요리는 물론, 현지에서 먹는 것과 비견될 정도로 수준급의 글로벌 음식을 선보이는 식당이 많다는 점이나 아이들에게 너무도 안전한 환경과 치안을 갖춘 도시라는 것 그리고 여러 문화 콘텐츠를 손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레스토랑 ‘방방’ 역시 서울에서 발견한 앤드류의 보물 같은 스폿이다. 용산 신흥로 부근 골목에 위치해 비교적 조용하지만, 이곳에서 선보이는 요리는 최고 수준이라고. 공간이 갖춘 아늑함 덕분에 가족이나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다고도 덧붙였다. 이 외에도 시간이 나면 서울에 있는 여러 절을 다녀보거나, 가보지 못한 다양한 스폿을 방문하는 탐험을 시도한다며 앤드류 로버츠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와 내 가족은 어떠한 가정이나 추측, 선입견 없이 서울에 도착했다.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울 생활에 임하고자 했기에 이곳에서의 추억과 애정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우리의 추억 쌓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남산술클럽’ 전통주 소믈리에, 더스틴 웨사



“서울은 마치 새로운 차원에 놓인 도시 같다. 공기의 흐름에서도 도시가 지닌 잠재력과 미래에 대한 열망을 강렬히 느낄 수 있다.”


서울살이 20년 차에 이르는 더스틴 웨사가 기억하는 서울의 첫인상은 2005년 크리스마스, 온 거리가 연말연시 분위기로 북적이던 모습이었다. 이곳 서울에 머물며 쌓은 많은 추억 덕분에 도시를 마주한 첫 순간에 대한 기억은 비록 흐려졌지만, 피부에 와닿던 도시의 잠재력과 역동성만큼은 아직도 선연하다고 그는 말한다. 경리단길 초입에 위치한 한국 술 전문 큐레이팅 바 ‘남산술클럽’의 운영자이자, 전통주 소믈리에라는 다소 이색적인 이력을 소유한 더스틴 웨사는 지난 10년 동안 막걸리나 청주, 증류식 소주 등 전통 방식을 기반으로 한 한국 술과 주류 문화를 홍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직접 누룩을 띄워 술을 빚기도 하며, 전통주 소믈리에라는 직업적 자부심을 품고 한국 곳곳에 숨은 양조 마스터와 양조장을 찾기 위한 여행도 부지런히 다녔다. “그 어떤 것도 한국의 술만큼 ‘수제’라는 말에 부합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룩의 야생 효소와 효모가 일으키는 발효 방식은 물론 쌀, 누룩, 물이라는 기본적인 재료로도 다양한 풍미의 술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어떤 술도 아닌 한국의 전통주만이 가진 특장점이다”라고 말할 만큼 더스틴 웨사가 한국 전통주에 바치는 사랑은 깊다. 전통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서울에 대한 그의 애정 또한 각별하다. 특히, 필요로 하는 무엇이든 빠르고 간편하게 얻을 수 있는 데다 각종 웰니스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뛰어난 서울은 빽빽한 인구밀도에도 계속해서 진취적인 발전을 거듭하는데, 이 모습이 마치 끝없이 내달리는 경주를 보는 듯하다고. 더스틴 웨사는 자신이 직접 체감한 서울의 다이내믹함이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매력이라 표현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도전 과제처럼 느껴질 때도 종종 있지만, 발길 닿는 대로 도시 곳곳을 유랑하는 여유를 즐기는 때도 분명 존재한다. “길을 잃어버리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다 우연히 마주하는 곳에서도 서울에 대한 매력을 느낀다. 40년이 넘은 노포나 북적이는 시장 골목 혹은 플라스틱 테이블이 놓인 포장마차같이 동네의 색채가 진하게 배인 곳에서 어르신들과 막걸리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것 또한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닌 매력이 다층적임을 말해준다. 한 골목에 50년 된 떡볶이 노점상과 세련된 인상의 칵테일 바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전통과 역사, 문화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중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서 도시의 계속적인 발전이 이뤄지리라는 희망을 발견한다. 여전히 그는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서울의 매력이 무궁무진할 것이라 말한다. 새로운 전통주를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처럼 자신의 서울살이는 여전히 기대로 가득한 나날이 될 것이라 확신하며.



요리연구가 나카가와 히데코



“서울은 내게 삶이자,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30년에 이르는 시간을 보낸 만큼 서울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오롯이 발현되는 두 번째 고향인 셈이다.”


요리 교실 ‘구르메 레브쿠헨’을 운영 중인 요리 연구가 나카가와 히데코에게 2024년은 그 어떤 해보다 특별할 것만 같다. 요리 교실을 운영한 지 15주년을 넘겼을 뿐 아니라, 그의 한국살이가 어느덧 3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연희동 자택 내 다용도실에는 그간 요리 교실을 운영하며 하나둘 모아온 집기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가끔 택시를 탈 때가 있는데, 목적지를 알려주며 해당 동네에 대해 설명할 때면, 택시 기사가 ‘어쩜 그리 한국에 대해 잘 아느냐’고 놀라며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라고 우스갯소리로 전한 일화에서도 그의 오랜 한국살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나카가와 히데코는 스페인과 독일 등에서 유학 생활을 거친 후 한국을 찾았다. 당시 한 명의 언어학도로서 서울살이를 시작했으나, 외국인 친구들과의 교류 그리고 동네 주민들과 삼삼오오 모여 친목을 다지는 순간에는 늘 요리가 있었다. 처음 요리 교실을 운영하게 된 것 역시 주변인들에게 자신만의 노하우가 담긴 요리 레시피를 나누고픈 마음이 한몫했을 정도. 요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결혼 후 현재 머무는 연희동 자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비큐를 좋아하던 그에게 마당이 있는 주택이라는 점과 집 근처에 자리한 ‘사러가 쇼핑센터’에서 당시에 구입하기 힘든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지금의 집을 선택하는 데 꽤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머물며 동네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회상하듯 말했다. 특히, 동네 뒤편에 자리한 궁동산에서 보이는 남산타워를 기점으로 펼쳐지는 스카이라인과 매번 변화를 거듭해가는 동네의 모습은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서울의 면면 중 하나다. 구르메 레브쿠헨은 히데코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요리 교실이 열리길 희망하는 수강생들이 줄을 잇는 것은 히데코만의 레시피가 지닌 매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요리는 사람과 사람의 대화와 소통을 만드는 매개체라는 그의 요리 철학이 수업에서도 십분 발현되기 때문일 터. “15년 넘게 가르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서먹했던 가족들이 요리 교실에서 배운 요리를 통해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처음 요리 교실을 열 때는 그저 주변인들과 함께 좋은 요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마음이 컸지만, 이젠 요리 연구가로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듯 하다고 밝히기도.<맛보다 이야기>, <음식과 문장> 등 열댓 권이 넘는 저서를 집필한 그는 지금 서울에서의 삶을 되짚어보고 요리 연구가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공고히 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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