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3월호

LIVING in SEOUL

태어나고 자란 땅을 떠나 서울에 둥지를 튼 이들이 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다재다능한 이들이 삶의 터전으로 서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23명의 외국인이 이야기하는 서울의 매력과 이곳에서의 라이프스타일, 아끼는 풍경과 공간들.

EDITOR 이민정 PHOTOGRAPHER 이우경, 이경옥

주한 프랑스 대사, 필립 베르투



“서울은 한마디로 매혹적이다. 도시 특유의 에너지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작년 7월, 주한 프랑스 대사로 서울에 첫발을 디딘 필립 베르투 대사. 그에게 서울의 첫인상은 거대한 도시 규모와 엄청난 인파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또 대도시임에도 산과 강이 접해 있어 자연과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프랑스 산악 지역 출신이라 등산을 좋아하는데, 서울 도심 곳곳에 산봉우리가 인접해 있다는 게 나에게는 매우 행운이다.” 직무를 수행하기에 24시간이 부족한 터라 서울의 모든 면을 다 느껴보진 못했지만 주말에는 성수, 망원, 서초, 홍대, 이태원 등 각기 다른 분위기의 동네를 탐방하기도 하고 카페 투어를 다니는 등 서울살이에 찬찬히 스며드는 중이다. “서울은 한마디로 매혹적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하노이, 뉴욕, 모스크바, 몬트리올에서도 거주한 적 있지만, 이전 도시와 다르게 서울만의 특유한 에너지와 독특한 매력이 있다.” 베르투 대사는 거대한 규모, 다양성, 자연과 어울림, 교통의 편리성, 시민들의 환대 등도 물론 이 도시의 장점이지만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하는 숨은 스폿들을 매력 포인트로 꼽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외벽이나 샛길들은 외국인에게 몽환적으로 다가와 사색하거나 명상하기 좋은 장소라고 귀띔했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는 그는 동네 사찰, 박물관, 정원, 레스토랑 등 나날이 리스트를 늘리는 중이다. 그중에서도 올봄 꼭 가고 싶은 곳으로 꼽은 장소는 바로 창덕궁 후원. 특히 일몰 시각이나 야간에 가면 경이로운 그곳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고 추천받은 터라 날이 좀 더 포근해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주한 프랑스 대사로서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단계씩 발전하는 양국 간의 경제 교류를 지원하고, 젊은 한국인과 프랑스인들을 함께 만날 때다” 라고 답하며, 다가오는 2024 파리 올림픽과 패럴림픽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올여름, 전 세계인이 조명하는 축제를 위해 파리는 현재 센강 위에서 열리는 개막식 준비에 한창이다.” 근대 올림픽이 프랑스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한 베르투 대사는 100년 만에 다시 프랑스에서 열리는 이번 올림픽에 대해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국과 프랑스 모두 많은 메달을 얻기 바란다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주한 헝가리 대사, 새르더해이 이슈트반



“서울이 대도시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살아보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역동적이다. 서울의 시간은 전 세계 어떤 곳보다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아 놀랍다”


“활기차고 역동적이면서도 전통을 간직한 도시.” 서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해달라는 요청에 돌아온 새르더해이 이슈트반 대사의 답변이다. 그는 2022년 9월에 주한 헝가리 대사로 임명받아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이전에 주일본 헝가리 대사는 두 번이나 역임한 터라, 일본과 가까운 서울에 대해서도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대도시인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그러나 직접 와서 살아보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역동적인 도시임을 깨달았다. 1989년 본격적으로 수교를 시작한 헝가리는 올해로 수교 35년째로, 지리적 거리로만 8000km 넘게 떨어진 머나먼 국가다. 서울과 부다페스트를 모두 경험한 그가 생각하는 두 나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두 나라 모두 자국 문화에 자긍심이 높다. 그러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양국의 수도를 비교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부다페스트는 19세기의 역사적인 건물들이 도시경관의 근간을 이루는 반면, 서울은 왕릉이나 궁궐 같은 유적지보다 현대적인 건축물이 더 지배적이다. 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문래창작촌인 것은 19세기 건물을 보고 자랐던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공장 지대였던 문래동은 폐건물을 개조해 복합 문화 공간이나 카페, 바,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하고, 이런 공간들이 이어져 하나의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헌것에 새로운 기능을 더하고 이런 것들이 모여 특정 거리를 형성하게 만드는 한국식 접근 방식이 흥미롭다.” 그곳에 가면 잠시나마 대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오아시스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낀다는 그에게 문래동은 어찌 보면 ‘서울 아지트’이기도 한 셈이다. 대사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틈이 날 때는 서울에서 진정한 한식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막걸리와 페어링할 수 있는 곳이라면 최적의 장소. 얼마 전 한국을 찾은 아들 역시 ‘K-바비큐’와 삼겹살의 참맛을 알게 됐다고 한다. 먼 훗날 주한 헝가리 대사의 한식 기행 콘텐츠가 나오는 걸 상상해본다. 주한 헝가리 대사로서 앞으로의 포부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양국이 비슷하게 겪어온 격동의 역사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것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앞으로의 관계 발전에도 기여할 거라 믿는다. 또 이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관광 등 모든 분야에서 양국의 관계를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올봄부터는 서울과 부다페스트를 잇는 직항 노선이 하나 더 추가되어 총 8개의 노선을 갖추게 됐다. 양국 간의 교류에 청신호가 켜질 전망이다.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공관차석 겸 경제참사관, 안드레아 첼렌타노



“서울은 매우 현대적이고 효율적이며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다.”


안드레아 첼렌타노는 코로나 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늦가을에 서울 땅을 밟았다. 현재 주한 이탈리아 공관차석 겸 경제참사관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과 이탈리아 두 나라 간의 경제와 무역 관계를 강화하고 비즈니스 기회를 넓히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수교한 지 140주년이 되는 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 첫 인사를 나눈 후, 올해 이탈리아의 비즈니스, 문화, 관광과 관련된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니 대사관 인스타그램 계정을 참고해달라며 외교관다운 이야기를 건넸다. “서울에 거주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울 라이프에 매우 만족한다.”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 싶다는 첼렌타노. 그는 서울의 현대적이고 효율적인 면을 높이 사며, 활기차고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장점으로 꼽았다. 또 문화유산, 현대건축, 디자인이 잘 조화된 면에 감탄을 전했다. “이런 부분은 로마, 밀라노, 피렌체 같은 이탈리아 예술 도시와도 유사합니다.” 덧붙여 한국과 이탈리아는 인구와 경제 규모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며, 음식에 진심이고 가족 친화적인 모습도 닮은 점이라고 언급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 그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은 가족들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가족들이 한국 음식에 크게 감명받았고, 한우와 제주산 흑돼지를 먹은 이야기와 크리스마스이브 디너를 요리하기 위해 재료를 구입하러 노량진수산시장에 갔던 에피소드를 풀었다. 고향이 그리운 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의 답은 이랬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지만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피아차piazza’다.” 이탈리아어로 사각형을 뜻하는 피아차는 주로 도심 속 광장을 일컫는다. 이탈리아 사람에게 피아차는 단순히 광장이란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인 개념이다. 약속하지 않고도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에스프레소나 이탈리아 와인을 앞에 두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곳. 바로 ‘소셜’이 형성되는 곳이다. 피아차와는 다르지만 서울에서 그에게 이탈리아의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하이 스트리트 이탈리아High Street Italia’. 가로수길에 위치한 이곳은 이탈리아 무역공사에서 운영하는 홍보관으로 패션, 뷰티, 식재료, 가구 등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제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구매도 가능하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라는 이곳의 캐치프레이즈가 와닿는 대목이다. 커피에 진심인 이탈리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정통 에스프레소와 젤라토를 맛볼 수 있으니 그에게는 작은 이탈리아인 동시에 향수병 치료제 같은 공간인 셈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악장, 웨인 린



“서울은 빠름과 느림,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도시라고 생각한다.”


프로 미식축구팀인 그린베이 패커스를 보유한 그린베이는 미국 위스콘신의 작은 도시다. 인구 10만명이 웃도는 이곳은 농지와 공터가 넘치고 NFL의 경기가 있는 날을 제외하곤 교통 체증조차 없다. 문화와 음악보다 스포츠의 도시로 알려진 이곳이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올리니스트 웨인 린이 나고 자란 곳이다.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 바이올린을 잘 켜던 소년이 먼 훗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오케스트라의 부악장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테다. “줄리아드와 예일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인들과 잘 어울려 한국에 대한 친숙함은 있었지만, 서울에 대해 딱히 특별한 이미지를 갖고 있진 않았다.” 이랬던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음악가로서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던 정명훈과 함께 일하며 배울 수 있는 기회에 끌려서였다. 음악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1만km 넘게 떨어진 머나먼 타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다. 올해로 17년째 서울에 거주 중인 그는 한국인 아내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며 서울에 뿌리를 내렸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광화문 주변이다. 서울에 대한 첫인상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일터이기도 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이다.” 그래서 웨인이 가장 좋아하는 곳도 광화문 일대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근방 서촌 일대에서 새로운 레스토랑이나 카페, 바를 탐색하는 것도 이 동네를 유희하는 방법 중 하나. 긴 하루를 보낸 뒤에는 한옥을 개조한 바에서 위스키나 칵테일을 즐기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월드컵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등 ‘프레스토presto(빠르고 성급하게)’로 돌아가는 도시 생활에서 ‘아다지오adagio(느리고 침착하게)’로 속도 조절을 할 수 있을 만큼 이 도시에 스며들었다. “제 일과 삶을 영위하며 서울에서 사는 것은 너무 행복하다. 다른 곳에서의 삶이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아이들이 좀 더 마음껏 뛰놀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서울에서 가보고 싶은 명소나 하고 싶은 체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 다 가봤다”라는 관록이 느껴지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에도 작년에 처음 방문한 노량진수산시장과 야구장은 꽤 인상적이어서 다시 방문하고 싶다며 서울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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