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4년 1월호

그림으로 써내려가는 이야기, 크리스찬 히다카

현대미술에서, 특히 현대 회화 장르에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 관람객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최대한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화면에 이야기를 가득 담아내는 작가 크리스찬 히다카의 작업이 반갑다.

EDITOR 정송 PHOTOGRAPHER 이기태

크리스찬 히다카  런던을 베이스로 작업한다. 대담한 색채 사용과 오일 템페라의 질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도상과 상징을 화면 가득히 채워 읽을거리가 풍성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받는 작가는 루마니아, 캐나다, 오스트리아,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스위스 등 세계 각국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은 물론 비엔날레 등에 참여한 바 있으며, 유수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4년에는 파리 에르메스에서 아티스트 윈도디자인 프로젝트도 진행할 예정이다.



갤러리바톤에서 지난해 말 선보인 영국 출신의 회화 작가 크리스찬 히다카의 개인전 <황금기Scène Dorée>에서 그는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여실히 보여줬다. 단순히 작품을 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벽면 전체를 템페라 페인트로 칠하며 작품과 벽, 다시 말해 예술과 갤러리 공간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로써 작가는 전시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히다카는 분명 영국 출신의 작가지만, 그의 작업을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일본인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는 동서양의 무드와 화법, 기법, 도상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작품에 드러난 여러 상징물과 양식에 담긴 의미를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수십 편의 단편소설집을 읽은 것 같은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설지도 모른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이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한국어로 ‘황금기’라는 뜻을 지녔던데, 이번 전시가 작가로서 당신의 황금기를 은유하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황금 무대’를 의미한다. 이는 나의 작업에 드러나는 연극적 ‘무대 회화’를 은유하면서 이탈리아 베로나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베로네제 골드 오크’라는 피그먼트를 향한 나의 애정을 드러낸다. 금은 영원한 색이다. 그림에 형태를 부여하면서 또 빛과 그림자를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직접 도료를 만들어 사용하는 작업 방식과 그림의 형식 등 전체를 아우르는 전시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매 전시가 의미 있기 때문에, 인생의 황금기라는 해석 역시 마음에 든다.


전시 전반에서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동서양의 문화권이 혼재한 가정에서 자란 당신의 백그라운드와 연관이 깊을 것 같다. 이를 도상을 활용해 상징하는 등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작가가 많지 않은데,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는 다른 영국 친구들처럼 하나의 문화권에 속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이방인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정체성을 구축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고 싶었다. 결국 캔버스 안에 어떤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비언어적 방식으로 나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상징’은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처음 부여했던 것보다 그 의미가 더 강력해지기도 한다. 마그리트가 ‘이미지의 배반The Treachery of Images’이란 작품을 통해 지적했듯이 인간은 꿈을 꾸고 환상을 믿기 때문에 상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치 ‘용’이 고대 중국 송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현대 컴퓨터게임 속에서 갖는 의미가 다른 것처럼 상징은 인간의 의식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그래서 상징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전체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기억과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혼란스럽다. 또한 이러한 기억의 연상 논리를 따라가기 때문에 안정적이거나 영구적이지 않다. 작업할 때, 마치 이런 것들을 실험해보며 놀이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즐겁다.





미술사에서 레퍼런스를 많이 차용해 작업하고 있다. 이렇게 레퍼런스로 삼는 작업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전시명과 같은 작품인 ‘Scène Dorée’는 피카소의 초기 대표작인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s’에서 등장인물을 비롯해 화풍, 구도 등을 차용했다. 예술은 그가 시작한 사조인 ‘큐비즘’의 출현 전후로 나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내게도 큐비즘은 ‘현대 회화의 제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피카소 회화에 드러나는 도상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큐비즘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림에 담긴 요소 하나하나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차용 방식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과정일 뿐이다. 한 장의 그림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며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도 있겠다. 보통 한 이미지에 호기심이 생기면 아이디어들이 팍팍 떠오른다. 이를 작은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하면서 작업이 전개되는 것. 작은 작업에서부터 지금과 같이 큰 캔버스 그림으로까지 생각을 전개하며 그려낸다. 작품들이 마치 나를 여행하도록 만드는 것 같다. 내 의지로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를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내가 그림에서 찾는 ‘내적 논리’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작품을 살펴보면서 왠지 당신이 굉장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작품을 시작하고 끝맺기까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엄청난 찬사를 받은 것 같다. 나는 이미지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토대로 나아가며 나만의 시각적인 내러티브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투영한다. 즉 과거의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듣고, 현재에서 그 이야기의 유용성을 평가하고, 그것의 ‘후생’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작업을 통해 전개하는 것이다. 관람객에게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싶다. 그래서 열린 상태를 지향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스스로 화가로서 예술적 ‘여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작품을 보며 화가가 지나온 여정의 진실성을 민감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곧 작가가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람객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는 방법이 아닐까.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산수화도 인상적이다.

항상 중국 산수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특히 송나라 시대 그림에 깊이 감동해왔다. 다른 작품처럼 분석할 수 없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 마주할 때마다 숨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는 그림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풍경뿐만 아니라 공간 전체적으로 넓고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데서도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송나라는 지금으로부터 천 년도 전에 있었던 고대국가다. 나는 시공간의 틀을 해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욕망이 산수화에 담겼다고 봤다. 이는 큐비즘의 목표와도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송나라의 산수화는 유럽 풍경화에서 찾을 수 있는 사진적인 공간과는 달리 ‘인간적’인 곳이다. ‘움직이는 초점’, 즉 관람객의 심리적 여정에 따라 변화하는 다중 초점을 지닌 화면이 특징이다. 서양의 풍경화는 관람객을 한 위치에 고정시킨 채 그 속에서 얼어붙도록 만든다. 이렇게 대조했을 때 중국의 산수화가 정말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일 템페라’를 사용해 작업한다. 또 캔버스 작업 외에도 벽화 작업까지 아우른다. 역사에서 각종 레퍼런스를 차용해 작업하는 당신이 과거로부터 기법까지도 가져왔다는 점이 새삼 놀랍다.

공장에서 일괄적으로 만든 도료를 사용하는 것이 나와 맞지 않았고, 심지어 불편하게 느껴지곤 했다. 나만의 도료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좋은 점이 많아졌다. 먼저 매우 좋은 안료를 사용해 평평하면서도 육감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여러 표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 순수한 자연의 색에도 근접할 수 있다. 합성색소는 밝지만 빠르게 그 빛을 잃는다. 하지만 내가 사용하는 천연색소는 주변 색 혼합에 따라 빛의 발현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여러모로 기술적·개념적으로 나의 작업과 딱 맞아떨어지는 작업이다.


앞으로 어떠한 작가로 남고 싶은지 궁금하다. 미술사에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되길 바라는가?

정말 좋은 질문이다. 그동안 내가 품어온 가장 큰 꿈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환상 혹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힘이 약해질 것 같았다. 사실 미술사에 내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언급하는 게 벌써 무덤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만의 스타일을 개발했다고 느끼진 않지만, 합리적으로 다양한 화면 양식을 탐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그림은 지식과 발견, 마법, 시각 문화의 경계를 탐험하고 넘나드는 방법이다. 나의 작품이 미래 누군가와 여전히 소통하고 있는 것. 내가 가장 원하는 건 그뿐이다. 작품은 다른 시대를 들여다보는 상상의 창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과거 미술사에 기록된 작품들이 창구로서 그 시대를 들여다보고 재밌는 것들을 발견하게 돕는 것처럼 나의 작품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주면 좋겠다.



COOPERATION  갤러리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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