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M 2023년 12월호

낯설고 또 익숙한 오늘의 동양화

일방통행만 되는 좁은 골목길,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성북동 산동네에 동양화가 유근택 작가의 작업실이 자리한다. 다세대주택 한 채를 통째로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는 그는 작업실이 “작가의 신체와 같다”고 말한다.

GUEST EDITOR 정규영 PHOTOGRAPHER 이기태


성북동 작업실 1층에 선 유근택 작가. 지난 30여 년간 동양화의 전통적 개념과 방법론을 동시대 언어로 전환하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말 그대로 작가의 또 다른 몸이지요. 작가와 작업실은 밀접하게 관계 맺으며 변화하고, 갈등하고, 번뇌하는 가운데 환희를 느끼기도 합니다. 공간과의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묻어나올 수밖에 없죠.” 유근택 작가가 처음 성북동에 작업 공간을 마련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예전부터 살며 작업하고 싶은 동네였습니다. 수화 김환기 선생, 운보 김기창 화백 같은 앞 세대의 거장들이 거주하며 작업한 곳이니까요. 아침마다 창밖의 인왕산 보현봉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산세는 강하지만 드세지 않고 온화한 기운이 가득한, 조용한 동네입니다. 화가로서 작업하는 데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곳 작업실로 옮긴 것은 지난 2016년. 재개발 문제로 이전 작업실의 건너편에 자리한 다세대주택으로 옮겨와 벽과 천장을 트고 지하와 1층, 옥상을 모두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갤러리현대에서 12월 3일까지 열리는 유근택 작가의 개인전 <반영Reflection>에도 이곳에서 바라본 성북동 산동네의 풍경이 감초처럼 등장한다. 창밖의 풍경은 ‘거울’, ‘창문’ 연작 등의 작품 속에서 시간에 따라 빛과 온도를 달리하며 유근택 작가가 일찍부터 주목해온 ‘일상성’을 드러내는 주요 무대가 된다.

온통 벽과 바닥에 빼곡하게 그림이 걸리거나 쌓여 있고, 그나마 빈 공간은 작업에 필요한 온갖 화구로 가득하다. 외부인들은 혹여 몸이 닿을까 조심해서 움직여야 하지만, 유근택 작가에게 작업실은 더없이 편안한 공간이다. “별다른 것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머물며 시간만 보내도 좋아요. 작업은 내키는 대로 하지요.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 들어와서 한참 일하고 나면 밤 11시쯤 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지만 그의 작업엔 고통스러울 정도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두꺼운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해 그 위에 드로잉과 채색을 한 후, 물에 적신 표면을 날카로운 철솔로 수백 수천 번 문질러 벗겨내고 다시 채색하기를 반복한다. 동양화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지만, 유근택 작가의 작품에서 유화처럼 두꺼운 마티에르가 느껴지는 이유다. “이런 기법 역시 성북동에서 작업하며 발전시킨 것입니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한 작품 완성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려요. 여러 작업을 병행하기보다는 작품 하나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10월 25일부터 12월 3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 <반영Reflection> 전경. ‘분수’ 연작 15점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지하 전시장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유근택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면 바로 ‘물’이다. ‘반영’, ‘분수’ 연작 등에서 물은 솟구쳐 오르고, 떨어지고, 흐르고, 반사하며 익숙한 풍경을 완전히 새롭게 만든다. “일상적 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장치죠. 동양화에서 물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순응하고, 순리를 따라가는 물은 동양철학에서 존경의 대상이었죠. 하지만 내게 물은 자유로움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그리던 폭포보다는 위로 거슬러 오르는 분수를 반복해서 그리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 솟구치다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며 소멸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실존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요.” 그는 내려오는 폭포 대신 올라가는 분수를 그리고, 전통적인 관념적 시공간이 아닌 일상에 주목했다. 유근택 작가는 화가 경력 초기부터 전통 회화의 현대화에 앞장서는 작가로 여겨졌지만, 정작 그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글쎄요, 그건 앞뒤가 바뀐 이야기 같아요. 전통을 애써 현대화한다기보다는 작가로서 지금 나의 감수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온 거겠죠.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그림을 통해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유근택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온갖 감정이 떠오르는 이유일 것이다. 매일 살면서 느끼지만, 말이나 글로 뾰족이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그런 감정들. 그리기엔 어렵지만 감상하기는 쉽고, 낯선 한편으로 더없이 익숙한 유근택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작가의 성북동 작업실 벽과 바닥은 그림과 작업에 필요한 화구들로 가득하다.


COOPERATION   갤러리현대(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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