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호

ROLLS-ROYCE SPECTRE IN NAPA VALLEY

롤스로이스가 럭셔리 전기 슈퍼 쿠페 ‘스펙터’를 출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직접 경험한 스펙터의 매력과 브랜드가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

EDITOR 김수진

끝없이 이어지는 높고 낮은 구릉과 초록 포도밭, 그 위로 펼쳐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과 쨍하게 내리쬐는 조도 높은 햇살. 미국에서도 우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유명한 지역, 나파밸리에서 롤스로이스의 첫 순수 전기차 스펙터의 글로벌 론칭 이벤트가 열렸다. 전동화 시대를 여는 모델을 세계 무대에 제대로 선보이는 첫 자리인 만큼,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 지향하는 미래 등을 두루 엿볼 수 있었다. 모터와 엔진을 잘 만드는 게 경쟁력이었던 내연기관 자동차의 시대가 가고, 가속과 동시에 최대토크를 발휘하는 전기모터를 모두가 품게 되는 전동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많은 자동차 브랜드가 고유한 철학과 정체성을 계승하면서 새 시대에 걸맞은 차량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와 영예를 상징해온 럭셔리 카의 대명사 롤스로이스가 지향하는 전기차는 과연 무엇일까? 롤스로이스모터카 CEO 토르슈텐 뮐러 외트푀스Torsten Müller-Ötvös의 스펙터에 대한 소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순수 전기차의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확고하게 지켜온 대전제가 있다. 바로 ‘롤스로이스 먼저, 전기차는 그다음Rolls-Royce first, electric car second’이라는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수월effortless하고, 조용quiet하며, 강력powerful해야 한다. 스펙터는 이런 롤스로이스의 전설을 유지시켜온 모든 가치를 하나에 담아낸 자동차다.”



요트를 닮은 울트라 럭셔리 전기 쿠페

롤스로이스는 스펙터를 개발하며 ‘울트라 럭셔리 전기 쿠페’라는 새로운 클래스를 개척했다. 현존하는 럭셔리 카 중 비슷한 세그먼트가 없는 만큼, 새 시대에 어울리는 완전히 새로운 자동차를 선보이는 것이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이를 위해 롤스로이스의 전설적인 모델 ‘팬텀 쿠페’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합산 584마력, 900Nm의 토크를 발휘하는 2개의 전기모터를 품은 순수 전기차를 완성했다. “스펙터의 디자인은 명료하면서도 우아하다. 오트 쿠튀르 패션이나 모던한 조각 작품, 현대적인 요트의 디자인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롤스로이스 역사상 가장 넓은 폭을 자랑하는 판테온 그릴, 총 830시간의 디자인 작업과 테스트를 거쳐 더 낮은 자세와 날렵한 형태로 재탄생한 환희의 여신상 등이 특징이다. 특히 지붕부터 후면까지 유려하게 떨어지는 루프 라인과 측면의 숄더 라인, 요트 선체에서 영감을 얻은 와프트waft 라인을 통해 우아하면서도 날렵한 이미지를 완성했다.” 디자인 디렉터 앤더스 워밍Anders Warming이 설명했다. 비스포크에 특화된 브랜드의 강점은 더 진일보했다. 실내외 색상 및 앞좌석 시트 일부분은 물론, 디지털 계기판에도 총 10가지 컬러 중 원하는 색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 4796개의 빛나는 별을 통합한 ‘스타라이트 도어Starlight Door’와, 조수석 대시보드에 별무리로 둘러싸인 듯한 네임플레이트를 적용해 어둠 속에서 은하수처럼 빛나는 환상적인 실내를 경험할 수 있다. 시승을 위해 준비된 총 14대의 스펙터를 통해 이와 같은 디자인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롤스로이스는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을 무대 삼아 패션쇼를 선보이듯 다채로운 컬러 조합을 준비했다. 트와일라잇 퍼플 외장과 화이트 & 퍼플 실내를 조합한 ‘얼루어’, 연초록빛 샤르트뢰즈 컬러의 외관에 블랙 코치 라인을 더한 ‘모더니스트’, 오묘한 장밋빛 모거나이트 컬러를 외장에 입힌 ‘심포니’ 등 각양각색의 스펙터들이 시선을 끌었다. 앤더슨 워밍은 “스펙터에 적용한 컬러는 향후 몇 년 뒤 인기를 끌 만한 색을 염두에 둔 결과”라며 “패션쇼의 새 컬렉션이 다가올 시즌의 유행을 미리 보여주듯, 스펙터를 통해 미래의 전기차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물 위를 가르는 유려한 요트를 연상시키는 스펙터의 측면 디자인.


롤스로이스 먼저, 전기차는 그다음

본격적인 시승에 앞서 롤스로이스모터카 엔지니어링 디렉터 미하르 아요비Mihiar Ayoubi가 스펙터의 개발 과정에 대해 소개했다. “스펙터는 120년의 롤스로이스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개발 과정을 거쳤다. 2021년 9월 시작한 주행 테스트 프로그램을 통해 총 250만km를 달리며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축적했다. 영하 40°C에서 영상 50°C에 이르는 극한 지대는 물론 빙설 지대와 사막, 고산지대, 대도시 등 다양한 환경에서 테스트했다.” 이어서 그는 다른 전기차와 차별되는 스펙터만의 특징을 언급했다. “우리는 토크나 제로백 같은 성능을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전기모터는 즉각적으로 최대토크를 발휘할 수 있어 단순히 빠른 주행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농구화를 신어도 마이클 조던과 나의 퍼포먼스가 다르듯, 똑같은 전기모터를 적용하더라도 차체를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주행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럭셔리 아키텍처Luxury Architecture’라 부른다.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을 견고하게 쌓아 올려 웅장하면서도 유연하고, 안정감 있는 차체를 완성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기차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롤스로이스’를 만드는 일이었다.” 시승 일정은 나파밸리의 와인딩 코스와 직선 도로를 두루 포함한 총 4시간가량의 루트로 짜여 있었다. 미드나이트 사파이어 컬러가 매력적인 차량에 탑승해 서서히 출발. 가속페달을 밟는 순간 탄탄하면서도 안정적인 주행감에 ‘전기차 맞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전기모터를 적용하면서도 롤스로이스 특유의 감성과 승차감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은 이들은 기본 주행 모드에서 회생 제동을 최소화했다. 덕분에 전기차 특유의 꿀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거의 없다. 웅장한 차체로 다소 좁은 와인딩 코스를 지나며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 페달을 반복해 밟을 때도 차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거나 몸이 앞뒤로 쏠리지 않아 편안한 주행이 가능했다. 자율주행 2단계가 적용돼 있어 차선 이탈 등에 부담이 덜했고, 선명한 헤드업 디스플레이 덕분에 시선을 분산하지 않고 주행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직선 코스에서 가속할 때는 스펙터의 진가가 더 도드라졌다. 롤스로이스가 ‘매직 카펫 라이드’라 표현하는 유려한 승차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노면 상태가 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끄럽게 안정적으로 뻗어 나가는 차체가 인상 깊었다. 적극적인 회생 제동 모드인 ‘B’ 모드의 경우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했다. 제동 및 가속 시 차체의 즉각적인 반응으로 인해 이질감이 들었지만, 적응한 후에는 한결 편안하고 효율적인 드라이빙을 즐길 수 있었다.


포시즌스 리조트 앤드 레지던스 나파밸리와 어우러진 스펙터의 모습.


럭셔리’와 ‘디테일’ 중심의 철학

롤스로이스의 세심함은 장소 선택에서도 빛났다. 행사를 진행하고, 스펙터가 머문 모든 장소는 단순히 ‘좋은 곳’을 넘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결과였다. 대표적인 곳이 이벤트의 메인 베뉴로 활용된 ‘포시즌스 리조트 앤드 레지던스 나파밸리Four Seasons Resort and Residences Napa Valley’. 2021년 엘루사Elusa 와이너리에 오픈한 곳으로, 로지lodge 형태의 나지막한 건물 여러 개가 포도밭을 끼고 마을을 이루듯 오밀조밀 모여 있다. 고요한 와이너리 한복판에서 섬세한 서비스와 럭셔리한 시설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기에 제격이다. 시승 후 디너 행사가 진행된 프로몬토리Promontory 와이너리도 빼놓을 수 없다. 나파밸리 컬트 와인의 대명사이자 최고의 와인 메이커로 손꼽히는 할란Harlan 가문에서 운영 중인 와이너리로, 이곳에서 생산하는 와인은 귀하기로 유명해 “지금 주문하면 스펙터보다 대기 시간이 더 길다”라는 농담이 오갔을 정도. 와이너리 입구 부분에는 웰컴 리셉션 역할을 하는 작은 중정이 마련되어 있는데, 나파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경이 압권이다. “기둥을 이룬 철, 바닥의 돌 등, 자연의 재료를 장소 곳곳에 섬세하게 반영한 프로몬토리 와이너리는 롤스로이스의 철학과 잘 맞아떨어지는 공간이다. 롤스로이스 역시 소재를 중요시하고, 스토리와 디테일에 집중한다. 이곳이라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에마 베글리Emma Begley가 설명했다. 특히 이날은 프로몬토리 와이너리의 상품 디렉터로 활약 중인 할란 패밀리의 2세 윌 할란Will Harlan이 직접 와이너리를 소개하고 숙성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 빈티지 시음을 포함한 투어를 진행해 특별함을 더했다. 디너에서는 프로몬토리의 주요 와인을 4코스 요리와 함께 페어링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위) 나파밸리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포로몬토리 와이너리의 중정. (아래) 프로몬토리 와이너리에 마련된 디너 현장.


미래로 향하는 자세

이번 글로벌 론칭을 통해 롤스로이스는 전동화 시대의 서막을 성공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스펙터는 시작에 불과하다. 2030년까지 롤스로이스는 모든 차종을 전기차로 전환할 예정이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 출시할 차량은 모두 세상에 없던 신차라는 이야기다. 이에 맞춰 롤스로이스는 자동차뿐 아니라 브랜딩과 서비스 전반에 걸쳐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고 있다. 고객만을 위한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위스퍼스Whispers’를 더 활성화해 차를 열고 닫거나 냉난방을 조절하는 등 원격 제어까지 가능하도록 업그레이드했고, 연말에는 서울에 비스포크 서비스 공간도 오픈할 예정이다. 고객의 요구를 더 효율적으로 차량 개발에 반영하기 위해 세일즈와 엔지니어링 등 각 분야를 더 적극적으로 연계하는 내부적인 시도도 이어가고 있다. 브랜드의 정체성과 헤리티지를 굳건히 지키면서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는 일. 스펙터를 통해 엿본 롤스로이스의 미래는, 더 젊고 강력한 롤스로이스 그 자체였다. 스펙터의 도어와 천장 가득 반짝이는 스타라이트Starlight에 둘러싸인 채 어둠이 내린 도로 위를 달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차에서 내리자 나파밸리의 새까만 밤하늘을 가득 채운 수많은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다.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롤스로이스의 디테일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짧지만 강렬했던 스펙터와의 2박 3일을 마무리했다.


프로몬토리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와인을 저장하는 숙성고에 전시된 스펙터.



COOPERATION  롤스로이스모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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