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호

오롯이 예술을 위한 예술가, 김구림

평생을 작품 활동에만 몰입했다. 국내 예술계에서는 지금껏 ‘이단아’로 여겨졌지만, 온갖 풍파에도 김구림은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갔다.

EDITOR 정송 PHOTOGRAPHER 김제원

구림  1936년생. 한국의 아방가르드를 이끈 선구자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회화, 비디오아트, 설치미술을 비롯해 메일 아트, 대지 미술, 실험 음악, 일렉트로닉 아트 등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된 장르의 미술은 김구림이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구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등 국내 미술관뿐만 아니라 일본 홋카이도 근대미술관, 프랑스 라이트콘, 영국 테이트 모던, 미국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전 세계 유수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김구림×제스 베이지 킴의 ‘실험음악. 시속의 울림. 마음속의 노래 작곡. 연주’. 1969년 작곡한 작품을 2019년 런던의 ‘카페 오토Cafe OTO’에서 연주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것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지속한다. 그 실험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이 어쩌면 이들의 업이 아닐까. 올해 88세인 김구림은 이러한 삶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학벌과 인맥 등에 연연하지 않고, 안정적인 작품이 아닌 누군가 하지 않은 행위, 만들지 않은 작품, 실현하기 어렵다고 한 아이디어를 기어코 구현해내는, 그야말로 예술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이가 바로 김구림이다. 그에게는 늘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실험 영화와 음악, 미술, 대지 미술, 메일 아트, 일렉트릭 아트 등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한 미술 장르다.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을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그의 작업을 일반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전위적인 작업은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작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와 비견될 만큼 미국과 유럽 예술계에서 훨씬 더 환영받았고, 현재까지도 한국 아방가르드 예술 정신을 확립한 시초로서 인정받고 있다. 한때 김구림은 “팔리는 작품을 만들면 죽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대중이 이해 불가한 전위적인 예술의 선봉에서 숨도 안 쉬고 내달렸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사람들도 ‘예술’이 무엇인지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 지금, 마냥 이단적이고 급진적이었던 그의 작업이 다시금 평가되고 있다.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8월 25일 오픈을 예고한 그의 개인전이 공개되면, 더욱 많은 이가 김구림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것이다. 기어이 불친절했던 이 고국 땅에서 빛을 발하는 김구림. 그를 만나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 다가올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Yin and Yang 94-S 3', 1994, Mixed Media on Canvas, 162.0×97.0cm, Courtesy of the Artist



그동안 기사에 촬영한 사진을 보니 물감 묻은 앞치마를 두르고 계시더군요. 그렇지만 저는 아무래도 ‘화백’이라는 호칭보다 ‘예술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워낙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셨으니까요.

나는 회화, 연극, 무용, 영화, 음악, 조각, 설치, 사진, 판화 모두를 아울렀어요. 다양한 방면에서 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을 많이 해왔죠. 다른 작가와 비교했을 때도 그렇고요. 그래서 내가 한 모든 행위와 선보인 작품에 ‘최초’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세상과 예술을 접하는 방식이 달랐던 데에 있었어요. 대학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나와서 <라이프>지와 <타임>지를 통해 당시 우리보다 훨씬 빠른 생각의 전개를 하고 있던 서양의 현대무용, 실험 음악, 공연 등을 접했습니다. 충격적이었죠. 그게 도대체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술은 형태가 아닌 자기만의 논리와 이론, 맥락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일찍이 깨우쳤어요. 그림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각과 설치, 사진 그리고 판화에 퍼포먼스까지 영역을 뻗어나갔죠. 누군가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작업한 내 작품들을 모은 전시를 보고 ‘여러 사람이 모인 그룹 전시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 출품한 작품 ‘묘비 6-63’, ‘태양의 죽음 II’, ‘현상에서 흔적으로–불과 잔디에 의한 이벤트’, ‘바디 페인팅’, ‘1/24초의 의미’ 등은 물론 가나아트센터에서 한 전시 <음과 양> 등을 봤다면 ‘생성과 소멸’, ‘죽음과 삶’ 같은 ‘시간성’에 대한 나의 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이로부터 출발해서 우리의 삶과 나아가 인간, 문명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모든 것이 전위적이더라도, 그 주제 하나만큼은 언제나 내가 품고 가는 겁니다.


‘전위적이다’라는 것이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너무 거칠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기발한 작업 때문에 겪은 일도 많았을 것 같고요.

맞아요. 남들과 다른 것을 생각해낸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에요. 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도 있으면서 탈매체적 다양성을 추구하고 반反미학에 대한 작업을 전개했어요. 그렇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진두지휘한 중요한 활동을 꼽자면, 1970년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모여서 만든 종합 예술 집단 ‘제4집단’이에요. 한국 문화의 독립, 인간 본연으로의 해방을 주장하며 연극, 음악, 영화 등 예술의 다양한 장르를 통합해 해프닝과 공동 퍼포먼스를 준비했죠. ‘총체 예술’을 추구했다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지속하진 못했어요. 겨우 두 달 했나. 우리가 기성세대와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나서니 정부에서 탄압이 심했습니다. 내가 그때 경찰에도 연행되고 그랬다니까.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전위예술, 아방가르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당시 내가 전개한 많은 퍼포먼스가 이해할 수 없고,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비판받았어요. 슬픈 일이지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며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너무 긴 시간이 걸린 듯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그 발자취를 되짚어보려 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그간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수많은 작품이 오는 8월 25일부터 열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일부 공개됩니다. 이번 전시에서 우리는 어떠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참 삶에 우여곡절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사회체제에 반하는 작업을 해온 이 ‘김구림’이라는 사람과 작업 세계는 해외에서 더 먼저 인정받았어요. 1960년대부터 오랜 시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세계 예술계에서는 박수받았던 작품들로 꾸릴 겁니다. 생각 같아서는 갖고 있는 모든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데, 공간에 한계가 있으니 주요 작품 위주로 선정하게 됐고요. 최근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신작을 소개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점이 참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이 좋은 점은 전시장뿐만 아니라 독립적이고 실험적인 영상 작품을 보여줄 영화관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개인전에 이를 이용해서 과거 공연 작품을 발표하고, 또 일전에 했던 작품을 재현하는 자리도 만들려 합니다. 어쩌면 이번 전시에서 핵심은 한국에서 선보인 적 없는 공연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전시를 보고 그동안 놓쳤던 김구림의 작업 세계에 대해 면밀히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시의 핵심이 되는 작품을 하나 꼽아주신다면요?

단연 실험 음악 공연 작품입니다. 1970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제1회 서울 국제현대음악제’가 열렸어요. 나도 한창 실험적인 음악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내 작품은 연주하지 못하고 백남준 선생의 ‘피아노 위의 정사’란 작품을 연출했죠. 그게 참 마음에 남았어요. 그러던 중 2019년에 영국 런던에서 내가 만들었던 작품을 들려줄 기회가 생겼습니다. 내 딸 제스 베이지 킴Jess Beige Kim도 작가인데, 그때 내가 직접 작곡한 ‘실험음악. 시속의 울림. 마음속의 노래 작곡. 연주’를 함께 연주했어요.


                               Yin and Yang 16-S. 39’, 2016, Digital Print, Acrylic on Canvas, 193.9x260.6cm, Courtesy of the Artist


예술가에게 ‘정신’만큼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노력을 해야 그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건가요?

예술가라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고 봐요. 시대에 맞춰서 예술가가 무엇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죠. 물론 하나의 매체에 천착해 몇십 년 동안 수행하듯 작업하는 작가들도 많아요. 그렇지만 나는 예술가라면 시류를 읽고, 새롭게 등장하는 것들에 촉각을 곤두세워서 이전에는 없던 것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딘가에 멈춰 있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끝이라고요. 예술은 원래 힘들고 고독한 길이에요.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서글픈 일이 많이 일어나기도 하죠. 돈이나 명예 등 수많은 유혹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본인이 중심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 역시 어려운 일을 겪었어도 그 중심을 잃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젊은 작가들에게도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앞으로 미술인에게, 또 대중에게 어떠한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김구림은 그저 작가고, 예술가라는 사실 하나만 남기고 싶어요.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네요. 예술가라면 응당 작품으로 보여줘야 하는 거잖아요. 그 작품을 내가 많이 남겼으니까 내 할 일을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Yin and Yang 91-L 11', 1991, Acrylic · Plastic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Yin and Yang 18-S.10', 2018, 36x28x9cm,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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