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코흐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뒤 건축가로 활동했으며, 2021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영국 사치 갤러리가 주관하는 사치 스크린 프로젝트Saatchi Screen Project(2017)에 선정되었으며, 고려대학교 건축학부 객원 평론가(2022),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 덴마크관 어시스턴트 큐레이터(2014)로도 활약했다.
박종진 종이와 점토를 이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현대적 조형물을 빚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국민대학교 도자공예학과 졸업 후 영국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도예 전공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공예 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갤러리 지우헌에서
헬렌 코흐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In the way, on the way’ 시리즈의 시작이 궁금하다. 당신의 일상으로부터 비롯된, 의도하지 않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시리즈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마주친 우연한 상황이나 장소의 잠재성을 강조하는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흥적인 순간을 발견하며 영감을 얻지만, 이 순간 자체를 작업의 소재로 선택하는 순간 이는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주제를 발견하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는데, 나는 항상 (카메라가 있든 없든) 여러 장소를 반복적으로 돌아보며 그날의 빛을 이야기하고, 그 공간만의 리듬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방해가 되었던 순간이나 요소를 작품에 가져왔다. 우연히 얻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내 작업의 주제가 된다. 시간의 쓰임과 가치는 종종 공간적 가치를 담기 때문이다. 출입이 드문 내 방에 설치된 블라인드와 농구 코트 바닥에 반사된 것들, 이 두 가지 모두 ‘시간’의 쓰임과 관련 있다.
여유 있게 바라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풍경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뭘까?
내 어린 시절의 경험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자전거에 태우고 코펜하겐을 돌아다니며 생경한 곳에 데려가주시곤 했다. 항구 부근의 산업 현장, 코펜하겐의 가장 큰 돔 형태 건축물인 프레데리크 교회 옥상 등 도시의 비밀스러운 장소를 탐험하듯 자유롭게 쏘다닌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호기심을 갖는 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여러분도 낯선 장소에 다다르면, 언뜻 보기에 닫혀 있는 문 같더라도 그 문을 한번 조심스럽게 열어보길 바란다. 흔적과 이야기가 가득한 도시의 풍경이 함께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디테일’을 보는 버릇은 건축을 전공한 당신의 이력과도 관련이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건축에서는 디테일부터 전체 구조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내 작품 중 일부는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소소함이나 이미 지나간 찰나의 순간을 다시금 일깨우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장소(전체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디테일을 작품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전 세계의 낯선 도시를 거치며 살아가는 일종의 방랑자이자 관찰자로 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삶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2021년부터 서울에 거주하면서 익히 잘 아는 환경이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삶의 방식과 그 평범한 일상에 적응하는 방식을 체험할 수 있었다. 때때로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작가에게 필연적 요소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여행자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이 서 있는 기반을 흔들어주는 일이다. 기반을 흔든다는 건 여러 방법으로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헬렌 코흐, From the series ‘In the way, on the way’, ‘Basketball Court’
박종진
종이에 백자 슬립을 한겹 한겹 발라 쌓는 고된 작업 방식은 철저하게 ‘감상자’나 ‘소장자’를 배제하고 작가 스스로가 분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작업 초기에는 작업 완성도나 보편적인 미감을 구현하는 데 몰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작업 방식은 조금 다르다. 제작 기간 동안 다양한 생각과 변화를 겪으며 이를 작품에 반영하기도 하고, 직관에 의존하기도 한다. 일례로 패치 시리즈의 경우 각 부분을 구성할 때 주변과의 어울림에 대해 매우 고심하게 된다. 레이어의 두께나 색상, 배열 방식, 접는 방식 등. 그러나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의외로 그 고심이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늘 떠올리는 격언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정성스레 가꾸지 않는다면, 울창한 숲을 이루긴 어려울 것이다.
‘지우헌’이라는 전시 공간에 착안한 신작이 있다고 들었다.
이번 전시는 헬렌 작가와의 2인전이기에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헬렌은 공간이나 풍경 혹은 사물의 일부분을 새로운 시각으로 담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나 역시 지우헌을 둘러보다가 비슷한 관점에서 공간의 독특한 부분을 발견해냈다. 과거 나의 백자 작업에서 소재로 삼기도 했던 목조 건축의 결구 부분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석재 벽에 나무 기둥이 박혀 있는 장면으로, 이런 장면을 작업에 담아본다면 흥미로운 연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새 작업을 시도해보았다.
‘Artistic Stratum_Patch’ 작품의 경우, 각각의 레이어가 다른 컬러를 지니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낸다. ‘색’에 대한 취사선택은 어떻게 이뤄지나.
과거 백자를 만들 때는 ‘고화도高火度 유하채釉下彩’라는 조선 백자의 특성과 가치에 주목하고 극히 제한적인 색을 연구했다. 하지만 물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 드러난 내 작품 표면의 질감이 워낙 강했고, 이 작업을 처음 했던 곳이 영국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관념을 과감히 벗어날 수 있었다. 주로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색 조합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기록해두었다가 시도해보는 편이다.
당신의 작품이 누군가의 공간에서 어떻게 활용되기를 바라나?
작업을 통해 내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다가 결과적으로 쓰임보다는 심미나 사유의 기능을 좀 더 추구하게 되었다. ‘사유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도자기를 감상의 대상으로 좀 더 끌어올리겠다는 시도다. 물론 작품에 대한 감상자들의 태도나 반응을 작가가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고, 내 작품에 담긴 시간과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말로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내 작품의 속성을 보는 관점이 모두 다르듯, 작품이 놓일 각각의 공간 속에서 불안정한 느낌 없이 잘 녹아들었으면 한다.
(좌) 박종진 , ‘Artistic Stratum_B1/4’, 2023 (우) 박종진, ‘Collapased Form_CYCOCWCB’, 2023
PHOTOGRAPHER 이창화(인물) COOPERATION 갤러리 지우헌(765-7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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