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호

캔버스 위의 연금술사, 박민준

소설, 회화, 설치를 넘나들며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히 구축해온 박민준 작가가 열 번째 개인전 로 돌아왔다.

EDITOR 김수진 PHOTOGRAPHER 안지섭

박민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도쿄예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재료기법학을 공부했다. 2003년 갤러리썬앤문에서 첫 개인전 <작아짐의 평안함>을 개최한 이래 2022년 12월 갤러리현대 전시 에 이르기까지 총 10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두 편의 단편소설 <라포르 서커스>(2018)와 <두 개의 깃발>(2020)을 발표했다.


박민준, ‘이면공을 든 광대’, 2022, © Artist & Gallery Hyundai


판타지 소설에 등장할 법한 초현실적 이미지, 고전 회화를 연상시키는 우아하고 정교한 화풍. 박민준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흥미로운 동화책을 읽듯 요소 하나하나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사람과 대화하는 파란색 원숭이 제프와 복화술하는 꺽다리 단장 같은 캐릭터가 나란히 선 초상화, 지혜의 대리물인 부엉이와 곰의 탈을 쓴 인물, 비행하는 새 등 상징적 요소로 가득한 대형 캔버스 작품 등이 시선을 붙든다. 인간의 삶과 죽음, 꿈과 이상, 예술의 창조적 위대함과 가치 등에 몰입해온 작가는 직접 이야기를 쓰고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회화 혹은 조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천재 곡예사인 형 라포와 평범한 동생 라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라포르 서커스 단원들의 별난 사연이 펼쳐지는 ‘라포르 서커스’(2018)가 대표적. 2020년 발표한 ‘두 개의 깃발’ 연작에서는 미술사학자 알리자린이 600여 년 전 활동한 화가 사피에르가 남긴 최후의 작품을 추적하는 과정을 다뤘다. 추상회화가 주를 이루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인물과 캐릭터, 풍경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내는 박민준 작가의 작업은 단연 눈에 띈다. 게다가 이토록 세심한 묘사의 대상이 작가의 철학적 고찰과 상상력으로 빚어낸 판타지 속 요소라는 점은 그 누구와도 다른, 작가만의 견고한 작업 세계를 완성하는 동력이 된다. 박민준의 마법 같은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전시 가 한창이다. 갤러리현대에서 2월 5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에서는 작가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한 회화 및 조각, 드로잉 4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라포르 서커스’, ‘두 개의 깃발’ 등 기존 연작의 연장선에 놓인 미공개작과 신작은 물론 정물화와 풍경화의 형식과 조형성을 변주한 새 연작 시리즈 ‘X’, 16~18세기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즉흥극 속 캐릭터를 초상화로 재해석해 가상의 연극 무대를 꾸민 신작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등을 선보인다. 전시 개막 당일, 갤러리에서 박민준 작가를 만나 그동안 이룬 것과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변해가는 것과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전시 제목이 입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2015년부터 3가지 테마를 구상했는데 첫 번째가 ‘라포르 서커스’, 두 번째가 ‘두 개의 깃발’이었고 세 번째가 이번에 처음 선보인 ‘콤메디아 델라르테’입니다. ‘X’는 이 3가지를 가장 잘 아우를 수 있는 알파벳이에요. 복합적이고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데다 로마자로 ‘10’을 뜻하기도 해서 열 번째 개인전의 타이틀로 제격이라고 생각했지요. 재미있는 건 전시명을 정하고 보니 세상이 온통 ‘X’ 천지더라고요. ‘X’가 이토록 많이 쓰이는 줄 미처 몰랐어요.(웃음)


전시 소개글에서 “ ‘X’시리즈는 그동안 선보여온 ‘라포르 서커스’와 ‘두 개의 깃발’ 시리즈를 포용하는 동시에 표현 기법과 조형성을 실험한 작업”이라는 설명을 봤어요. 좀 더 자세한 소개를 듣고 싶어요.

기존 작업이 치밀한 스토리와 계획을 통해 완성한 결과물이라면, 이번 시리즈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요. 예를 들어 어떤 풍경을 보고 ‘그리고 싶다’ 하면 바로 그릴 수 있게 된 거예요. 구체적인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대신 뉴욕 센트럴파크나 스코틀랜드 바닷가, 이탈리아 정원 같은 풍경에 캐릭터나 패턴, 오브제 같은 나만의 코드를 더해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풍경화를 만든 것이지요. 덕분에 원래 하던 작업에서 일탈하는 듯한 묘한 짜릿함이 있어요


전시에서는 ‘X’ 시리즈 외에도 ‘라포르 서커스’, ‘두 개의 깃발’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들도 만날 수 있어요. 기존 작업의 스토리가 점차 확장되는 건가요?

기존 세계를 다시 한번 조명한다고 볼 수 있을 듯해요. 여러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지만, 스토리 라인의 핵심은 거의 일치하거든요. 내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 꿈꾸는 희망 같은 것들이죠. ‘라포르 서커스’에는 인간의 삶이 유한한 만큼 사는 동안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고, ‘두 개의 깃발’은 꿈꾸는 작가상, 이상향에 관한 이야기예요.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경우 캐릭터의 대사에 평소 생각을 담았는데, 수많은 ‘가짜’에 가려져 ‘진짜’를 찾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가치 있는 것은 언젠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신작 시리즈의 모티프가 된 ‘콤메디아 델라르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오래전 ‘균형’ 혹은 ‘중용’의 상징으로 줄타기하는 사람을 그린 적이 있어요. 이후로 애크러배틱이나 서커스에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죠. 꾸준히 ‘광대’에 대해 알아가며 원류를 찾다 보니 이탈리아에 그 원형이 있더라고요.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동물 탈을 쓴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즉흥극이에요. 할리퀸이나 피에로 같은 우리가 잘 아는 광대도 거기에서 파생했죠. 무대예술에서는 교본 같은 존재인 만큼 스토리와 자료가 워낙 방대해서, 전시에 필요한 정도만 공부하고 캐릭터를 9명으로 축소했어요.


이번에 각 캐릭터별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본집도 썼는데요. 짤막한 글에 굉장히 다채로운 삶의 군상이 담겨 있어 흥미롭게 읽었어요. 이런 사유의 동력은 무엇인가요?

공상과 상상을 많이 해요. 매일 12시간씩 작업실에 앉아 혼자 그림을 그리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르죠.(웃음)



박민준, ‘X-두 개의 깃발’, 2022, © Artist & Gallery Hyundai






연극 무대처럼 연출한 신작 시리즈 ‘콤메디아 델라르테’와 박민준 작가.


‘콤메디아 델라르테’에는 여러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중 본인과 가장 닮았거나 특히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나요?

사실 9가지 캐릭터가 다 제 모습이에요. 욕심을 내기도 하고, 겁이 많은데 용기 있는 척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론 거짓말도 하고요. 이번 작업에선 특정 캐릭터에 힘을 싣기보다 인간의 다양한 군상을 여러 캐릭터에 잘 분배하는 게 무척 중요했어요. 작업을 보면 ‘르네상스 맨’이라는 수식어가 절로 떠올라요.


그림, 조각, 설치, 공간 연출, 글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렵진 않나요?

조각이나 회화, 공간 연출은 르네상스 시기에 작가들이 다 하던 것들이에요. 이런 면에 일종의 ‘로망’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작가라면 이 3가지 정도는 잘해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반면 글을 쓰는 건 전에도, 지금도 참 어렵고요. 사실 작가가 스스로 만족하는 작업을 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저 계속 조금씩 더 잘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아직까진 끊임없이 노력 중인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잘 즐길 수 있는 팁을 전한다면요?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대본을 꼭 읽고 감상하길 권해요. 다른 작품은 소설을 안 읽고 봐도 되지만, 이 시리즈는 글을 읽어야 작품이 완성되거든요. 대사와 함께 보면 캐릭터에 대한 애정도 생기고, 전시 보는 즐거움이 달라질 겁니다.


동시대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앞으로 ‘동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더 넓어질 거라고 봐요. 사실 르네상스 시대도 현재와 수백 년밖에 차이가 안 나요. 1000년, 2000년 후에는 지금 20년, 100년 단위로 나뉘어 있는 미술 사조가 다 의미 없어지고 ‘2차원 평면에 사람이 손으로 그림을 직접 그린 시대’ 전체를 동시대로 여기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작업을 할 때면 항상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와 경쟁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치곤 합니다.(웃음) 아트 신의 트렌드나 특정 사조에 주목하기보단, 삶에 대한 나만의 고유한 생각을 진솔하게 화면 위에 담아낼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COOPERATION  갤러리현대(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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