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위크 출장이 확정되었을 때 주변의 걱정이 많았다. 특히 작년 파리 패션위크 때 대포카메라를 든 팬들에게 수없이 시달렸던 편집장님은 나에게 신신당부의 말을 남겼다.
“나림아.. 그 곳은 전쟁터야. 피도 눈물도 없는...”
편집장님의 말을 조금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아니, 회사 앞 장충단공원을 5km라도 더 뛰었어야 했다. 나름 비장한 각오로 밀란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결국 패션위크 기간 내내 고난과 역경을 겪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취재를 다니게 되었다.

밀란에서의 첫 패션쇼, 디젤에서 만난 에이티즈 윤호와 쇼장의 위트 넘치는 풍경.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고? 단순히 5일동안 콘텐츠 40여 개를 만들어서가 아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원래 이렇게 징징대는 스타일도 아니다. 단지 첫 해외 출장을 마친 디지털 에디터의 하소연으로 가볍게 들어주길 바란다.)
#내_키가_180이었다면
디지털 에디터의 필수 덕목은 무엇인가. 좋은 장비와 기획력도 필요하겠지만, 그 전에 어떠한 인파에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피지컬이 갖춰져야 한다. 쇼장에 셀럽이 하나둘씩 등장하면 옆사람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팬도 지킬 앤 하이드처럼 순식간에 돌변해버리기 때문.

셀럽을 기다리는 팬들로 가득한 프라다와 펜디 쇼장.
문득 평소에는 가드를 무섭게 쳐다보다가도 NCT 재민이 “아이고!” 애교를 부리면 아수라 백작 수준으로 눈에 하트를 달고 전광판을 쳐다본다는 팬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셀럽이 벤에서 내릴 때마다 기대감에 찬 환호성, 그리고 원했던 셀럽이 아니라는 아쉬움의 탄성이 수없이 교차했다. 나도 주변 사람들처럼 카메라 줌을 8배로 고정해 놓고, 벤이 열리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팔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기다렸다.
그 순간 카리나가 도착했다. 주위가 큰 물결로 일렁이는 것을 보니 다들 같은 사람을 기다렸나 보다. 비록 내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아이폰 17 프로는 카리나를 담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녹화 버튼을 누르고 팔을 더 길게 쭉 뻗었다. 그렇게 건진 것은... 약 5분의 영상 중 딱 3초였다. 키가 더 컸더라면 10초는 건질 수 있었을 거다.
#드라이버_아저씨_제발요
밀란 곳곳에서 쇼가 열리는 만큼, 제 시간에 정확한 장소로 이동하는 드라이버는 중요한 존재다. 우리의 드라이버는 말이 많았다. 얼마나 많았냐면, 나중에는 차에 탑승한 6명 모두가 대답하다 지쳐서 아저씨의 말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바쁜 일정 사이, 차창 너머로 잠깐 마주한 밀란의 풍경.
아저씨는 호기심도 많았다. 길에 세워져 있는 저 차가 무엇인지 궁금해 빨간불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검색해보는가 하면(도요타였다), 우리가 몇 살인지, 어디에 사는지, 그리고 이탈리아의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를 쉴 새 없이 물어봤다.

드라이버의 추억이 담긴 노래
자연스럽게 아저씨의 최애곡도 알게 되었다. 1978년에 발매한 New Trolls의 〈Aldebaran〉이라는 곡인데, 우리의 반응에 기분이 좋으셨는지 볼륨을 최대로 틀고 달렸다. 본인이 어렸을 때 자주 듣던 곡이라고. 이제는 밀란을 떠올리면 저절로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비록 중간에 길도 잃고 자주 한 눈을 파셨지만, 마지막 날이 되니 괜히 아쉬워졌다. 그사이 정이 들었나 보다. 호텔 앞에 있는 옷 가게에서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한참을 들여다보는 드라이버 아저씨를 종종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래도_밀란까지_왔는데

나의 이탈리아 먹킷리스트. 젤라또는 밀란을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간신히 먹었다.
하루에 10개 넘는 쇼와 PT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호텔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기왕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으니 정통 이태리 음식을 먹어야 한다며 선배와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마다 밖으로 나왔다. 굳이 맛집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는데도 들어간 곳마다 너무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왼쪽은 10년 전 태권도를 배웠다던 셰프가 만든 봉골레 파스타. 여기에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면 극락이다.

페니 바와 메탈 T자형 오벌 홀스빗이 돋보이는 고급 카프스킨 소재의 로퍼. TOD'S.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위한 선물 하나 정도는 사야지. 괜찮은 로퍼를 찾던 와중 토즈의 홀스빗 로퍼가 눈에 띄었다. 비록 환율이 1700원대로 올라 한국과 큰 가격 차이가 없었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기분을 내겠냐는 마음으로 쿨하게 결제했다. 지금도 잘 신는 중.
#출장_끝_마감_시작
밀라노 말펜사 공항 출국장의 전경.
입국할 때는 엠포리오 아르마니가 우리를 반기더니, 돌아갈 때는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마중을 나왔다.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지난 5일간 고생했던 것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나와 선배의 피땀눈물이 담긴 영상들은 럭셔리 인스타그램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셀럽의 영상 그 이면에, 베스트 컷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열심히 틈을 헤집는 에디터들의 노고가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곧 <럭셔리> 4월호에서 만나게 될 밀란&파리 패션 위크 기사들도 많은 기대를 바라며, 차오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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