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3월호

영감이 태어난 자리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탕, 괴테의 하이델베르크 산책로 등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의 창의성 뒤엔 늘 특정한 물리적 환경이 함께했다.

EDITOR 박이현 WRITER 이진규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어느 수준까지 대체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때마다 창의성을 그 최후의 보루로 간주하는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창의성이 고양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선 뇌 과학자 장동선 박사의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창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집중하는 뇌의 상태(Central Executive Network)’와 편안하게 ‘멍한 뇌의 상태(Default Mode Network)’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라고 언급한다. 특히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산책하거나 따뜻한 물로 목욕하며 몸을 이완시키는 행위 등이 뇌를 더욱 유연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이와는 별개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창의적 사고의 방법으로 제시한 ‘아이디어 연결하기(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의 관점에서 본다면 특정 사안에 골몰한 사람이 색다른 외부 자극에 노출될 때 역시 창의적 돌파구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만약 앞에서 장동선 박사가 설명한 ‘뇌의 상태’를 유도하는 물리적 환경이 건축을 통해 구현된다면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무사이Mousai(여신, 뮤즈Muse의 어원)의 신전을 열심히 방문했던 고대의 철학자, 예술가와는 달리 현대인은 보다 체계적으로 창의적인 연구와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볼 수 있다.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와 애플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인 조너선 아이브가 의기투합해 만든 ‘애플 파크’. 모든 구성 유닛이 동일한 컨디션을 지니며 산책 중에 걷는 방향에 대한 어떠한 방해 없이 자연스레 사람들이 조우하고 아이디어를 연결할 수 있는 형태다.


아이디어 연결하기의 집대성, 애플 파크

창의성을 고취하는 환경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집대성한 프로젝트가 있다. 기존의 아이디어들을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창의성의 근본이라 여겼던 스티브 잡스의 유작으로 미국 쿠퍼티노에 위치한 애플의 캠퍼스인 ‘애플 파크Apple Park’가 바로 그것이다. 잡스는 영국의 건축가인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 애플의 최고 디자인 책임자인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와 함께 21세기의 무사이 신전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했고, 그 건축적 해법은 애플답게 미니멀하고도 과감했다. 이 건물은 발표 당시부터 애플의 새로운 캠퍼스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파격적인 모습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직경 461m의 원형 링 형태를 띤 애플 파크는 일견 쿠퍼티노의 평원에 내려앉은 거대한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애플 파크 건물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는 우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개인 오피스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이 개인 오피스들 사이를 연결하는 곳으로 이 건물 디자인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팟pod 공간이 있다. 팟 공간에서는 팀 동료들과 내밀한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다. 하나의 팟 공간과 그것을 양옆으로 감싸는 2열의 개인 오피스 공간들이 합쳐져 1개의 유닛unit이 되고 이 수많은 유닛들은 거대한 원형 산책로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광활하게 펼쳐진 숲과 공원을 가로지르는 실내 산책로는 주변부가 통유리의 전창으로 감싸여 있어서 애플의 구성원들은 마치 자연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이 산책로를 걷다 보면 햇살이 쏟아지고 4개 층을 하나로 연결하는 총 9개의 아트리움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른 부서 사람들 간의 보다 적극적인 자극과 아이디어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무한 루프와 같은 과정이 잡스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업무 환경의 개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단순함에 대한 그의 고집이다. 노먼 포스터의 초기 디자인 스케치는 이 무한 루프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가 스터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잡스의 선택은 명료했다. 위상학적으로 링을 가장 단순하게 구현하는 형태, 모든 구성 유닛들이 동일한 컨디션을 지니고 산책 중에 걷는 방향에 대한 어떠한 방해 없이 자연스레 사람들이 조우하며 아이디어를 연결할 수 있는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함에 대한 애플의 철학을 온몸으로 상징할 수 있는 형태를 잡스는 추구했다. 그것은 바로 원이었다. 애플 파크는 영감을 얻기 위한 공간적 아이디어들을 명민하게 연결하고 그것을 애플답게 구현해 완성되었다. 이것은 창의성에 관해 잡스가 펼친 최고의 프레젠테이션이라 할 수 있다.



척추 역할을 하는 긴 복도와 이곳에서 뻗어나가는 4개의 손가락과 같은 형태의 건물로 구성된 MIT 캠퍼스의 ‘빌딩 20’.


소크 연구소의 모티프가 된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걸으면서 생각하기, MIT 무한의 복도와 빌딩 20

캠퍼스의 많은 건물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건물 이용자는 야외로 나오지 않아도 다양한 루트의 조합으로 산책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디자인에 골몰한 건축 대학의 학생이 머리를 식힐 겸 동쪽 캠퍼스에 위치한 헤이든Hayden 인문학 도서관으로 가려고 한다. 한쪽에 있는 카페의 에스프레소 머신 소리가 끊이지 않는 로비 7의 웅장한 돔이 그 길의 시작을 알린다. 이곳은 MIT 캠퍼스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명물 ‘무한의 복도Infinite Corridor’의 시작점이다. 그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교실들을 뒤로하고 맞이하는 것은 메모리얼 로비와 중앙 앞마당,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찰스강의 풍경이다. 그 후 여러 방향으로 뻗은 복도 중 하나를 선택해 걷다 보면 각종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실험실들을 지나 음악대학 건물의 햇살이 들어오는 긴 복도와 그곳의 교실 너머로 들리는 피아노 소리, 바깥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정원 등을 거치고 나서 헤이든 도서관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야외를 걷는 것과 달리 연결된 건물 안에서의 산책은 차량과의 충돌 우려가 없기에 어느 정도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편안하게 걷거나 특정 생각에 골몰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것. 이 같은 MIT 캠퍼스에서 그물망같이 엮여 있는 많은 건물 중 하나인 ‘빌딩 20’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급조된 연구 동이었으나 그 단일 건물 안에서만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개 층의 낙후된 이 건물은 척추 역할을 하는 긴 복도를 중심으로 이곳에서 4개의 손가락 같은 건물이 뻗어나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교수와 학생들은 자신의 연구실을 가기 위해 기나긴 통로를 거쳐야 했고, 자연스레 다른 연구실 사람들과 마주치고 교류하며 외부 자극에 노출되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사고의 창의적 국면에 다다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날씨와 상관없이 MIT 캠퍼스에서 끊임없이 걸어 다니는 학생들을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수십 년간 생명과학 분야에서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소크 연구소’는 건축가 루이스 칸이 설계했다.


자연의 스펙터클 속에서 만나는 창의적 순간, 소크 연구소

세계적 과학연구소의 건물이 추구한 가장 핵심적 가치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고양시키는 휴머니티라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이는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연구 공간, 최첨단 기기와 장비 등과 같이 직접적인 연구 인프라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 하지만 자연에서 얻은 영감과 휴머니티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 생명과학 분야에서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최고의 연구 실적을 낸 곳이 있다. 바로 미국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다. 일견 성스러운 종교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연구소 건물은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했다. 그리고 이 건물이 그토록 훌륭한 연구소 건축의 표본이 될 수 있도록 만든 또 한 사람은 설립자이자 소아마비 백신 개발자인 조너스 소크Jonas Salk 박사다. 그가 추구한 연구소의 방향성은 연구 자체에만 치우치기보단 과학자의 정신과 감정을 고양시키고 그들이 문화적 인사들과 만나 교류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그의 표현에 따르면 “피카소도 방문해 즐거움을 느끼는 건물”을 만드는 것이었다. 소크 박사는 이러한 방향성을 건축적으로 구현하는 데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San Francesco Monastery’을 단초로 이용하기를 루이스 칸에게 요청했다. 이는 소크 박사가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몰두하던 중 휴가로 방문한 아시시의 수도원에서 결정적인 창의적 순간을 맞이했던 경험에서 기인한다. 물론 수도원의 중세 건축양식이 아닌 그 안에 내제되어 있는 건축적 개념을 투영해달라는 요구였으므로 건축가 입장에서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연구 동의 중정을 면한 부분은 지상 2, 4층의 수석 연구자들의 방과 지상 1, 3층의 테라스로 구성되어 있다. 공간의 평면이 톱니 형태로 생긴 연유로 모든 방과 테라스에서 남태평양을 감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톱니 형태의 방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지상 1층으로 내려와 중정과 맞닿은 회랑cloister를 구성한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중세 양식 회랑은 이곳에서 루이스 칸의 건축 어휘를 통해 햇살과 그림자가 반복적으로 드리우는 현대적 회랑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리고 수백 년 전 아시시에서의 회랑이 그러했듯 소크 연구소의 회랑은 자신만의 뮤즈를 찾아 산책하는 연구자들에게 사색과 영감을 선사한다. 이 건물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남태평양과 하늘을 품은 중정이다. 얇고 긴 띠 형태의 배수로 수 공간은 크림색 트래버틴으로 마감되어 있는 중정의 중심을 가로질러 아래의 레벨에 위치한 분수와 휴게 공간으로 이어진다. 노을이 질 무렵 트래버틴 중정의 끝자락은 남태평양 속으로 녹아드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고, 역으로 붉게 물든 바다는 배수로 수 공간을 통해 중정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하게 보인다.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결정은 중정을 비워두는 것이었다. 루이스 칸은 원래 중정의 양옆에 열 맞춰 나무를 심으려고 했다. 그러나 루이스 칸에게 중정 디자인에 대한 조언을 요청받고 대상 부지를 방문한 멕시코의 건축 거장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은 나무와 잔디를 일절 심지 말라고 당부했다. 바라간은 이곳은 정원이 아닌 석재로 이뤄진 간결한 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것을 통해 중정은 하늘과 맞닿은 입면을 얻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루이스 칸과 소크 박사는 그의 조언을 듣는 즉시 매우 올바른 판단이라고 직감했고 그 비워냄의 결정을 통해 소크 연구소의 중정은 건축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자연을 영감의 촉매제로 치환한 사례로 평가받게 되었다. 고양된 정신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지성의 최첨단을 달리는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건축가와 과학자의 확신이 창의성을 위한 환경 조성에 밑거름이 되었다.




바우하우스는 다양한 미술 및 디자인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산업 시대에 걸맞은 디자인 인재를 양성한다는 기치 아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한 교육, 연구 기관이다.


융·복합 교육기관의 효시, 바우하우스 데사우 캠퍼스
근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창의적 집단으로 손꼽히는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는 다양한 미술 및 디자인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통해 산업 시대에 걸맞은 디자인 인재를 양성한다는 기치 아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설립한 교육, 연구 기관이다.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라슬로 모호이너지 등 많은 근대미술과 디자인의 선구자들이 그로피우스의 이념에 교육자로서 동참해 이곳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디자인의 미래를 새롭게 그려냈다.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나치 독일로 넘어가는 사회적 격변기 속에서 바우하우스는 여러 차례 캠퍼스를 옮겨야 했는데 그중에서 ‘데사우Dessau 캠퍼스’는 ‘아이디어 연결하기’ 방법을 이미 1926년에 건축적으로 구현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그로피우스는 데사우 캠퍼스를 설계할 때 환경을 통해 각 분야를 넘나드는 융합적 사고를 유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건물은 기본적으로 비대칭적인 3개의 날개를 지닌 바람개비 형태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작업실, 전시실, 강의실, 오디토리엄, 기숙사, 식당 등이 3개의 날개에 넓게 자리 잡고, 오피스 동 역할을 하는 브리지와 중앙 계단이 위의 다양한 공간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건축적 요소로는 작업실 동 입면에 3개 층에 걸쳐 구축된 유리 커튼 월Glass Curtain Wall을 들 수 있다. 본 건물이 지어진 1926년에 이 입면 디자인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기에 충분했다. 근대건축이 추구해온 이 투명성에 대한 도전은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의 핵심 공간인 경계 없는 작업실을 외부에 기념비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을 웅변하는 물리적 장치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바우하우스의 유산 중 하나가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의 ‘강관 의자Tubular Steel Chair’ 시리즈다. 브로이어는 초창기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고 졸업 후 잠시 파리에서 실무를 쌓다가 모교가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교육자로서 돌아왔다. 그가 발표한 의자 시리즈 중 모델 ‘B33’은 바우하우스가 추구해온 다양한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무는 창의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목공carpentry 부서를 총괄하던 브로이어는 데사우를 거닐기 위해 구입한 자전거의 프레임에서 영감을 받아 산업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철제 강관을 이용해 새로운 디자인에 착수했다. 철제 강관은 길이의 제한 없이 사출할 수 있고 원하는 형상으로 절곡할 수 있다. 브로이어는 데 스테일De Stijl 운동에 영향을 받아 X, Y, Z축의 직교 체계에 입각해 강관을 구부리고 배관공에게 배운 용접법을 사용해 이들을 접합했다. 이 의자의 특이한 점은 의자라면 응당 있어야 할 뒷다리가 없다는 것. 이로 인해 강관 프레임의 형태는 건축의 캔틸레버cantilever 구조(기둥이나 벽을 넘어 돌출되어 공중에 떠 있는 구조)를 연상케 한다. 이는 강관 특유의 탄력성과 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의 몸이 닫는 등받이와 착석부는 바우하우스 직조weaving 부서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패브릭으로 마무리했다. 브로이어의 의자 시리즈는 발표 당시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놀Knoll과 같은 가구업체를 통해 출시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처럼 바우하우스는 분야 간의 융합 의지를 건축 공간으로 구현했고, 그 공간은 강관 의자라는 경계 없는 창의성의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강관 의자 중 ‘B33’ 모델은 바우하우스가 추구해온 다양한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무는 창의성의 결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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