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3월호

ASIAN ART ROAD

1월의 싱가포르는 적도의 농밀한 공기를 뚫고 예술의 열기가 뜨겁게 피어올랐다.
‘싱가포르 아트위크’(1월 22~31일)가 보여준 동남아시아 미술의 역동성과 실험적인 시도는 아시아 마켓을 향한 컬렉터들의 기대를 다시금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 영감의 바통이 3월의 홍콩으로 이어진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미술 시장의 정점으로 자리 잡은 ‘아트바젤 홍콩’(3월 27~29일)은 싱가포르가 점화한 에너지를 글로벌 마켓의 확신으로 치환하는 거대한 무대가 될 것이다.

EDITOR 박이현

Singapore Art Week 가능성을 점화하다

정교하게 큐레이션된 마켓과 깊이 있는 예술적 담론의 교차점, 싱가포르는 아시아 미술의 내실과 품격을 동시에 증명했다.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뮤지엄에서 열린 로런스 렉의 개인전 전경. © Lawrence Lek


올해 글로벌 아트 캘린더는 싱가포르 아트위크 2026의 공식적 개막을 앞두고, 남쪽 센토사섬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3층 높이의 길고 웅장한 문이 열리며 아이웨이웨이의 초대형 설치 작품 ‘Law of the Journey’(2016)가 깜짝 등장한 것. 아랫부분을 구성하는 보트의 크기만 20m에 달하는 이 작품은 싱가포르의 변호사이자 컬렉터 라이언 수Ryan Su가 설립하고 에이드리언 찬Adrian Chan이 디렉터로 활동하는 비영리 예술 기관 라이언 파운데이션이 주최한 게릴라 전시와 대담의 하이라이트였다.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은 검정 PVC 재질로 제작한 대형 보트와 그 위에 웅크린 인물들에 공기를 불어넣어 실제 스케일보다 웅장하게 구현한 결과물이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일념으로 위험천만한 뱃길을 고무보트에 의지해 건널 수밖에 없는 난민들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통해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수면에 올리고자 했다. 전시를 기획한 라이언 수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싱가포르 아트위크를 맞아 공개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며, “작가가 난민들의 일상과 대비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공간에서 이 작품이 전시되기를 바랐다”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가 개최된 카펠라와 마주 보고 있는 세인트존스섬은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검역하던 장소로 오늘날 싱가포르 국민 다수의 뿌리가 되는 역사적 공간이다. 이주민으로 이루어진 싱가포르에서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자신의 뿌리와 소속감, 그 여정을 돌아보게 했다.



사랑과 열망, 긴장과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무거운 유리판의 대치라는 고행, 지속되는 수행적 퍼포먼스를 통한 신체와 감정, 환경의 관계를 드러낸 멜라티 수료다르모의 퍼포먼스 ‘I Love You’, © Melati Suryodarmo


신화적 주제들을 여성성과 탈식민주의의 시각언어로 풀어낸 치트라 사스미타.


마켓의 확장: 아트 SG와 S. E. A. 포커스가 만든 교차점
싱가포르 아트위크의 핵심 커머셜 전시 플랫폼 ‘아트 SG’가 4회 차를 맞았다. 다른 국제 아트페어에 비해 역사가 짧지만 4회 차 만에 동남아시아와 글로벌 아트 시장을 잇는 통로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을 받았다. 30개 국가에서 100여 개의 갤러리가 참여한 2026년 에디션은 국제적인 갤러리들과 싱가포르, 동남아시아의 갤러리들이 강력한 세일즈 퍼포먼스를 달성했다. 한국에서는 조현화랑과 가나아트 등이 참여했다. 아트 SG는 갤러리 섹션과 동남아시아 출신 작가들을 조명하는 포커스 섹션, 신진 작가를 선보이는 퓨처스 섹션으로 구성된다. 페어장 내부에 마련된 특별 전시 공간인 플랫폼에는 초대형 장소 특정적 작품들이 설치되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다양한 퍼포먼스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신선한 재미 요소로 작용했다. 화려한 색감과 독특한 형태로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은 말레이시아 출신 작가 앤 사맛Anne Samat은 높이 5m가 넘는 대형 작품을 설치했다. 쿠알라룸푸르와 뉴욕 등을 오가며 활동을 하는 그는 말레이시아의 전통 섬유공예 테크닉에 빗자루, 플라스틱 집기 등 일상적인 오브제를 결합한 대형 토템을 만들었다. 사맛은 이 작품에 대해 “단순한 설치와 퍼포먼스를 넘어 자기표현과 연대, 사랑과 기억을 담는 상징적 매체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발리의 현대미술가 치트라 사스미타Citra Sasmita는 전시장에 신화적인 공간을 탄생시켰다. 동東 발리 지역의 전통 회화 테크닉을 독학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낸 그는 신화적 주제들에 상상력을 발휘, 여성성과 탈식민주의의 시각언어로 풀어냈다. 아트 컬렉티브 베드타임 스토리스Bedtime Stories는 천장에 대형 카마산 캔버스를 설치, 주변 벽체를 회화로 감싸 관객들이 작품 아래 편안하게 앉거나 누워 작품의 공간적, 정서적 메시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도살한 소의 가죽이나 의례적인 재료를 설치 작업에 포함해 신화적이고 의례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페어의 창립 파트너이자 메인 스폰서 UBS는 2026년 아트 SG에서 처음으로 퍼포먼스 아트를 컬렉션에 포함했다. 인도네시아의 퍼포먼스 아티스트 멜라티 수료다르모Melati Suryodarmo의 ‘I Love You’(2007)가 그것. 바닥과 벽이 붉게 칠해진 공간에서 작가는 하이힐을 신고 40kg이 넘는 유리판을 힘으로 지탱하면서 “I Love You”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장시간 지속되는 의례적인 성격의 이 퍼포먼스는 사랑과 열망, 긴장과 위험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무거운 유리판과의 대치라는 고행, 지속되는 수행적 퍼포먼스를 통한 신체와 감정, 환경의 관계를 드러냈다. UBS의 이번 행보는 단순히 퍼포먼스라는 한 장르를 더했다는 것을 넘어 ‘모두를 위한 예술’을 표방하는 UBS 컬렉션의 전략과 연결된다. 이와 함께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선보이는 큐레이티드 플랫폼 ‘S.E.A. 포커스’가 한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에디션은 아트 SG 주최 측이 운영을 맡아 기존 S.E.A. 포커스의 동남아 현대미술 중심성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넓고 다양한 관객과의 네트워크 접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16개 갤러리가 참여했고, ‘The Humane Agency’라는 주제로 독립 큐레이터 존 텅John Tung이 디렉션을 맡았다. 텅은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맥락과 현재 글로벌 이슈에 대해 예술가를 공감의 주체로 상정하고, 이를 통해 관계의 장을 구성하며, 사유가 가능하게 했다”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배의 ‘Brushstroke Series’(2025).


디지털 환경의 미디어, 경계, 정체성 등의 요소를 고찰한 슈앙 리의 작품.


담론의 확장: 슈앙 리와 힐미 조한디
중국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미디어 작가 슈앙 리Shuang Li의 첫 동남아시아 개인전 가 열렸다. 킴 어소시에이션Kim Association과 바젤 쿤스트 할레의 공동 커미션으로 진행된 이번 전시는 이후 바젤로 이동한다. 2024년 상하이의 프라다 롱자이에서의 전시로 잘 알려진 리는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디지털 환경의 미디어, 경계, 정체성 등의 요소를 고찰한다. 는 미국의 폭풍 추적 문화에서 영감받아 이를 현대의 이미지와 정보 소비 방식으로 연결했다. 이번 전시가 열린 킴 어소시에이션은 2025년 홍콩과 싱가포르 기반의 옌과 앨런 로 재단Yenn and Alan Lo Foundation이 설립한 동시대 아트 프로젝트 스페이스로 아시아계 작가들의 초국가적transnational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연구, 전시,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큐레이터 크리스티나 리Christina Li가 디렉터를 맡아 전시 기획과 프로그램 운영을 총괄하는 중. 자체 프로그램과 로컬 아티스트 플랫폼을 결합한 새로운 방식으로 운영될 이 공간의 등장은 싱가포르 아트 신에 반가운 소식이다. 한편, 2030년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싱가포르의 아트 디스트릭트인 길먼 배럭스Gillman Barracks에선 특별한 전시들이 열렸다. 그중 오타 파인 아트Ota Fine Arts에서 열린 싱가포르 출신의 젊은 예술가 힐미 조한디Hilmi Johandi의 개인전 가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수십 년에 걸쳐 엽서, 포스터, 아카이브 사진 등을 수집하는 방식으로 시각 아카이브를 축적했다. 이미지들은 레퍼런스가 되어 친숙한 장소와 시각적 모티프를 화면과 공간에 재구성하는 재료가 됐다. 오래된 싱가포르의 관광 엽서 속 이미지는 분절되는 동시에 회화적으로 표현되어 변화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과거의 기억과 감각이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노스탤지어와 새롭게 만들어진 기억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관람자로 하여금 시간을 여행하게 했다.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을 집중적으로 선보인 큐레이티드 플랫폼 S. E. A. 포커스. Courtesy of ART SG 2026


기술과 예술의 경계: 로런스 렉이 그린 미래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뮤지엄ArtScience Museum에서는 로런스 렉Lawrence Lek의 개인전 이 열렸다. 게임과 건축, 미디어, 음악, 픽션 등을 결합해 디지털 환경과 미래 세계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윤리적 관계 등을 탐구해 온 렉은 그의 대표작 ‘NOX’를 확장해 전시로 선보였다. 어두운 입구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게임 속 한 장면처럼 꾸민 무대를 마주하게 되는데, 몰입형 공간에 들어선 관람객은 게임기, 위치 기반 사운드, 비디오, 특수 무대장치를 통해 AI 시스템과 자율주행 기계들의 심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 비엔날레의 약진이 돋보인 싱가포르 아트위크 2026은 싱가포르 미술계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저력을 보여주었다. 페어의 성공과 실험적 시도들, 동남아시아 미술에 대한 확고한 지지와 후원이 눈에 띄었고,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 같은 글로벌 연사들이 참여한 SAW 포럼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몇백 석 규모의 오디토리움이 가득 차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글로벌 언론들의 호평과 함께 SAW의 내년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Art Basel Hong Kong 도시의 확신으로 완성하다

아트바젤 홍콩 2026이 개최되는 홍콩의 봄은 전시장과 도시를 잇는 새로운 프로그램 설계로 ‘보는 페어’에서 ‘읽는 페어’로 한 단계 진화한다.


에코스 섹션에 출품하는 대니얼 보이드Daniel Boyd의 ‘Untitled’(2020). Courtesy of the artist and STATION


올봄 홍콩 컨벤션 센터가 아시아 미술계의 거대한 중력장으로 변모한다. 3월 25~26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27일부터 29일까지 아트바젤 홍콩 2026이 열리기 때문. 올해 행사에는 41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여하며, 32개 신규 참가 갤러리가 라인업에 신선한 결을 보탠다. 눈에 띄는 점은 참가 갤러리 절반 이상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라는 사실. 더욱이 그중 29곳은 홍콩에 전시 공간을 운영 중인데, 이는 홍콩이라는 도시가 전시와 유통, 담론이 교차하는 접점임을 방증하는 지표로 읽힌다. 한국에서는 국제갤러리, 갤러리바톤, 아라리오갤러리, 제이슨함, 조현화랑, 학고재, PKM갤러리, 실린더, N/A, 지갤러리 등이 한국 미술의 현재형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1993-498’, 1993. Courtesy of the artist,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and Kukje Gallery, Seoul and Busan


새로운 관람의 문법

올해 아트바젤 홍콩의 변화를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축은 ‘에코스Echoes’와 ‘제로Zero 10’이다. 먼저 최근 5년 이내 제작된 신작에 초점을 맞춘 에코스에선 동시대 미술의 역동적인 흐름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다. 13개 갤러리가 협력해 구성한 부스는 신작 소개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예술이 어떤 서사와 감각으로 시대와 공명하는지 입체적으로 그릴 계획. 한국에서는 휘슬 갤러리에서 박민하, 샌정, 현남의 작품을 출품하며 에코스의 온도를 한층 선명하게 만든다. 지난해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에서 데뷔한 제로 10이 아시아 무대 위에 오른다. 1915년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주도한 전시 <0, 10>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섹션은 가상 세계의 창작물이 제도권 안에서 어떤 지속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실험하는 무대다. 블록체인부터 인공지능, 게임 애니메이션 등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난 14개의 프로젝트는 디지털 기반 예술 실천이 감상과 소장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유하게 한다.


대형 설치 작품으로 구현된 우주의 질서

대형 조각과 설치, 퍼포먼스가 어우러지는 섹션 ‘인카운터스Encounters’는 한층 밀도 높은 서사로 돌아온다. 도쿄 모리미술관 관장 가타오카 마미Kataoka Mami, 홍콩 M+ 큐레이터 이자벨라 탐Isabella Tam, 자카르타의 큐레이터이자 연구자 알리아 스와스티카Alia Swastika, 모리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도쿠야마 히로가즈Tokuyama Hirokazu로 이뤄진 큐레이터 팀은 우주의 근간인 ‘다섯 원소(공간, 물, 불, 바람, 땅)’를 테마로 12점의 작품을 선별했다. 전시장 곳곳을 수놓은 작품들은 자연의 근원적 에너지를 시각적 언어로 번역해 감각을 일깨울 예정. 특히 고故 강서경 작가가 ‘공간’을 주제로 제작한 멀티미디어 텍스타일 설치는 이번 테마를 가로지르는 중심축으로 주목받는다. 전통의 미감을 현대적 조형으로 끌어올린 그의 작품은 바다와의 연결성을 실로 표현한 파라그 탄델Parag Tandel의 작품, 유약 처리된 세라믹 형태로 불의 원소를 구현한 마사오미 야스나가Masaomi Yasunaga의 작품 등과 나란히 놓이며 하나의 우주적 질서를 완성한다. 여기에 전시장 외부인 퍼시픽 플레이스 파크 코트Pacific Place Park Court에서는 크리스틴 선 킴Christine Sun Kim의 장소 특정적 디지털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 ‘A String of Echo Traps’(2022~2026)이 상영되며 예술의 파동이 도심 깊숙이 번져간다.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는 홍콩의 야경.


제로 10 섹션에 출품하는 팀 이프Tim Yip의 ‘Lili’ . Courtesy of the artist and Asprey Studio


맥락의 복원과 도시적 공명

시각적 압도감 속에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카비네트Kabinett’ 섹션은 35개 프로젝트 중 23개를 아시아태평양 작가들에게 할애하며 지역의 시간을 되짚는다. 단기적인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예술의 역사적 맥락과 동시대적 가치를 촘촘히 엮어내기 위해서다. 이로 인해 아트바젤 홍콩 2026은 잊힌 기록을 불러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아카이브의 무대로도 작동하게 된다. 이번 카비네트 섹션에서는 국내 갤러리와 작가들의 존재감이 뚜렷하다. 국제갤러리는 인카운터스에 이어 강서경 작가의 작업을 카비네트 공간에 최적화된 서사로 풀어내며, 갤러리바톤은 히라코 유이치Yuichi Hirako의 독특한 회화 세계를 독립된 기획으로 펼쳐낸다. 더불어 갤러리 넥스트 생 슈테판 로제마리 슈바르츠벨더Galerie Nächst St. Stephan Rosemarie Schwarzwälder가 조명하는 이지연 작가의 작업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예술적 경험은 전시장 문턱을 넘어 홍콩 전역으로 뻗어 나간다.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 엘런 파우Ellen Pau가 큐레이팅한 필름 프로그램은 영상 언어가 지닌 서사적 힘을 스크린 위에 투영하며 관람의 지평을 확장한다. M+ 파사드에는 샤지아 시칸더Shahzia Sikander의 애니메이션 ‘3 to 12 Nautical Miles’가 밤마다 도심을 밝히고, ‘컨버세이션Conversations’ 프로그램에선 자카르트 MACAN 박물관장 비너스 라우Venus Lau가 작품을 둘러싼 열띤 대화 등은 도시 전체를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아트바젤 홍콩 2026은 전시장 안팎을 잇는 정교한 프로그램 설계로 관람객을 ‘수동적 감상’에서 ‘능동적 참여’로 옮겨 놓는다. 작품을 보고, 대화를 듣고, 다시 작품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홍콩의 봄은 읽어내는 즐거움이란 짙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 예술과 삶이 공명하는 찰나의 순간처럼, 올해 페어는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활짝 열어젖힐 것으로 기대된다.


MINI Interview

아트바젤 홍콩 2026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설계한 두명에게 기획의 언어를 물었다.


Encounters

M+ 큐레이터 이자벨라 탐이 말하는 ‘다섯 원소’


이자벨라 탐 M+ 큐레이터. 중국 미술과 일본 미술, 그리고 세계 현대사진 담론 간의 병행적 발전과 교류에 전문성을 두고 있다. (2022), (2024)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올해 인카운터스는 처음으로 아시아 기반 큐레이터 4인이 공동 기획을 맡았습니다. 개인적인 관심 분야가 인카운터스 섹션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다섯 원소’라는 개념 아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팀의 일원이 된 점을 뜻깊게 생각해요. 저는 특히 중화권의 디아스포라 작가들, 일본 미술의 이미지와 물질성, 그리고 사진·무빙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시선의 층위에 주목해왔는데, 이런 감각이 이번 논의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작용했습니다. 인카운터스는 아트페어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핵심 프레임워크인 동시에 지리적 경계나 매체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을 지녔습니다. 특히 스테프 황Steph Huang(페로탕)이나 콩키Kongkee(gdm 갤러리)처럼 중화권 디아스포라 작가들에 대한 저의 지속적인 관심이 이번 선정에 주요하게 반영됐어요. 이들의 작업은 고유의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으로 공명하는 보편적 가치를 날카롭게 포착해냅니다.


M+의 큐레이터로서 미술관에서 축적해온 질문이나 관점, 담론이 이번 섹션에 어떤 방식으로 옮겨왔나요? M+에선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핵심 현상들을 리서치해 전시와 소장품 수집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이를 통해 아시아의 관점에서 글로벌 미술 담론에 관여해왔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인카운터스 라인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지리적 범위와 프로젝트 유형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죠.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는 관객이 사유할 수 있는 집중된 공간(전시실)이 있기에 작품과 역사적 내러티브를 깊이 파고들 수 있습니다. 반면, 페어에선 수많은 활동이 한 번에 일어나기에 콘텐츠의 수준을 균형 있게 조절해야 하죠. 인카운터스가 두 개 층에서 펼쳐지는 만큼, ‘다섯 원소’라는 직관적인 개념을 닻으로 삼아 관객이 작품들 사이의 대화로 곧장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습니다.


강서경, ‘Mountain - autumn #23-02’, 2023, Courtesy of the artist and Tina Kim Gallery


인카운터스는 흔히 서양 작가들의 대형 설치물이 주도하는 섹션으로 인식됩니다. 올해 선정작들이 재료성이나 제작 방식에서 드러낼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올해는 대형 무빙 이미지, 회화, 조각, 설치 등 매체를 폭넓게 아울렀어요. 작품 속에 담긴 예술적 개념, 재료 선택 등의 요소는 우리 문화에 내재한 아시아적 감수성을 ‘별자리’처럼 엮어냅니다. 전통적인 소재와 문양을 동시대적인 표현 기법으로 치환해낸 이 프로젝트들은 아시아적 미학이 현대미술의 거대한 스케일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지 명확히 확인시켜줄 것으로 기대를 모읍니다.


‘지그Sigg 컬렉션’ 등 역사가 축적된 컬렉션을 다뤄오셨습니다. 반면 인카운터스는 일시적이고 현장성이 강한데, 끝난 뒤에도 남아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 보시나요? 명확한 큐레이토리얼 개념을 바탕으로 접근한 만큼 관객은 개별 프로젝트 너머의 거대한 대화를 식별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장의 물리적 경험이 끝난 뒤에도 예술적 화두가 일상의 담론으로 이어가게 하는 불씨가 되길 소망합니다.


홍콩 컨벤션 센터는 수만 명의 인파가 오가는 장소입니다. 작품이 단순한 ‘배경’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관객을 멈춰 세울 결정적 요소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지점이 ‘다섯 원소’라는 프레임워크를 도입한 이유예요. 복잡하고 역동적인 환경 속에서 인카운터스의 중심을 잡아줄 새로운 사인 시스템을 준비했습니다. 이는 개별 작품이 시각적 배경에 머물지 않고, 프로젝트 간의 유기적 관계를 드러내며 관객과 실질적 관계 맺기를 유도할 것입니다.



Film

미디어 아티스트 엘런 파우, 언어의 최전선을 묻다


엘런 파우 홍콩 미디어 아트의 선구자이자 큐레이터. 홍콩 비디오·뉴미디어 아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86년 아시아 최초의 비영리 미디어 아트 플랫폼인 ‘비디오티지’를 공동 설립했고, 1997년 마이크로웨이브 국제 뉴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을 설립했다.


2026년 필름 프로그램 최초의 ‘아티스트 큐레이터’가 되셨습니다. 저는 ‘비디오티지Videotage’ 등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신진 인재와 혁신적 스토리텔링을 포착하는 ‘작가의 렌즈’를 견지하며 큐레이션에 접근했습니다. 올해는 인터랙티브 AR 비디오나 멀티채널 등이 포함됐는데, 이는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재정의하려는 작가들의 확장된 시도를 대변합니다. 이번 에디션의 핵심은 엄격한 프레임워크를 탈피한 유동성과 실험성에 있습니다. ‘마법과 현실 사이In Between Magic and Reality’라는 타이틀 아래 실재와 환영, 개인과 집단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기술이 우리의 현실 인식을 어떻게 매개하는지 관객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1986년 비디오티지 설립부터 2022년 M+ 파사드 작품인 ‘광명의 형상The Shape of Light’에 이르기까지 홍콩 미디어 아트의 역사를 함께해오셨습니다. 올해 프로그램에선 홍콩의 로컬 미디어 서사를 전 세계와 어떻게 연결할 계획인가요? 아트바젤 홍콩이 운영하는 무료 필름 프로그램은 대중의 미디어 아트 감수성을 키우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관객층을 형성하는 데 기여해왔습니다. 10년 넘게 극장에서 소비되는 영화와 아트 스페이스 등에서 전개되는 실험적 영상 사이의 간극을 가로지르며, 무빙 이미지 작업을 일상의 시야 안으로 끌어들였죠. 미디어 아트가 한때 ‘마이너’로 여겨졌던 도시에서 이러한 축적은 새로운 형식에 대한 수용을 현실로 바꾸는 기반이 됐습니다. 올해는 홍콩의 아티스트 컬렉티브와 국제적 에이전시를 엮어 지역적 서사와 세계의 시선이 마주치는 장면을 구축할 예정입니다. 도시 정체성과 기술적 유동성에 뿌리를 둔 홍콩의 미디어 유산을 세계 각지의 작업과 병치함으로써 서로를 비추는 공명의 지점을 마련했죠. 이는 로컬의 이야기를 국제 무대에서 증폭시키는 동시에 글로벌 관객이 홍콩의 진화하는 미디어 아트 생태계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일입니다.


김아영, ‘Al-Mather Plot 1991(film still)’,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Hyundai


작가님은 ‘Recycling Cinema’ 같은 작품에서 기술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 감각과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AI와 고도화된 영상 기술이 지배하는 지금, 필름 프로그램이 제공할 기술 그 이상의 경험은 무엇일까요? 저의 실천은 언제나 기술이 인간의 지각과 기억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피는 의식의 탐구에 집중됐습니다. 이번 프로그램 역시 카메라 렌즈를 빌려 기술이 정체성과 권력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깊이 파고듭니다. 혁신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보다, 기술로 포화된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의미를 구성하는지에 관한 ‘인간 중심’의 내러티브를 전면에 세웠죠. 관객이 스크린에 압도당하기보다 그 안에서 ‘경이’를 되찾기를 요청하며, 무빙 이미지를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바라보게끔 유도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미디어 아트가 다뤄야 할 주제는 무엇일까요?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기계와 인간이 진실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언어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파악하는 일이에요. 최근 AI 보안장치가 운문verse으로 우회된다는 연구 결과는 언어 자체가 권력이 작동하는 매체임을 드러냅니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의 통찰처럼 언어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창조하며 의식을 흔드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AI와 딥페이크, 블록체인이 신뢰와 인증을 대체하는 시대에 진짜 최전선은 언어에 놓여 있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가 해야 할 일은 기술 혁신에 환호하는 대신, 권력과 기만이 언어를 매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보호를 위해 설계한 도구조차 시poetry에 의해 해킹되는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안전장치를 넘어서는 사유의 정직함과 윤리, 그리고 감각의 정확성입니다. 예술은 그 기준을 다시 묻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WRITER 박이현, 홍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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