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3월호

무질서와 질서의 틈

치밀한 설계와 처절한 연습으로 쌓아 올린 질서는 무대 위에서 본능적인 혼돈으로 폭발한다.
무용가 기무간이 증명하는 ‘막’의 에너지는 가장 견고한 궤적 위에서만 허락되는 자유로운 파동이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박재영

10 CREATORS: THE ART OF MAK

디자인하우스가 걸어온 반세기의 철학 위에서 창간 25주년을 맞은 <럭셔리>는 한국 문화에 내재한 ‘막MAK’의 정신을 하나의 미학이자 태도의 언어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에 유연한 막 정신을 삶과 작업 속에 체화하고 있는 창작자 10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미술가·음악가·배우 백현진부터 드라마와 연극, 영화를 아우르는 공민정, 무대와 런웨이를 오가는 기무간, 다양한 표정을 지닌 배우 옹성우, 음악의 진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그레이코드와 지인,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된 윤산하, 캔버스에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캐스퍼 보스만스, 다채로운 능력과 독보적 존재감의 대명사 수리, 가구와 공간을 잇는 문승지, 장르를 넘나들며 브랜드 컨설팅을 하는 김아린까지. 이들의 기록은 우리 시대의 독보적인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기 무 간


기무간 동아무용콩쿠르 수상, 서울무용제 우수작 선정 등으로 독보적인 안무 역량을 증명하며, 많은 안무가가 함께 작업하고 싶어하는 무용수로 손꼽힌다. 2024년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치며 대중적 인지도를 넓힌 그는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감각적인 스타일로 자신만의 춤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기무간’이라는 이름이 가명인 줄 알았어요. 춤과 관련된 파동처럼 다가왔거든요. 무성할 무, 줄기 간을 쓰는 본명이에요. 이름이 ‘춤추는 사람’이란 숙명을 뜻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춤을 추고 있습니다.(웃음) 어릴 때 이름 후보가 몇 개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중 ‘기묘간’이라는 이름이 제일 끌렸어요. 부모님께서 기무간으로 결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제 이름에 만족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안덕기 교수님께서 “힘을 줘야 할 때 안 주고, 힘을 빼야 할 때 안 뺀다. 그것이 기무간의 스타일”이라고 말씀하셨더라고요. ‘기무간의 춤’이란 무엇일까요? 본인이 직접 자신의 춤을 정의하는 사람은 드물거라 봅니다. 아니,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의 춤은 이러한 것입니다”라고 근사하게 이야기하는 건 대부분 허구에 가깝다고 보기에 저는 영원히 정의 내리지 않으려 합니다. 여전히 탐색 중이고, 더 나은 본질을 거듭 찾는 여정에 있으니까요. 사람은 완벽할 수는 없어도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틀을 세우는 일은 영원히 유보하려 해요. 누군가 제 춤을 평가한다면 마음이 아플 수는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은 제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니…. 앞으로도 기무간의 춤이 어떤지 애정 있게 지켜봐주세요.


우리가 만난 주간에 링크서울과 꼬레오가 함께 선보이는 공연이 열립니다. 봉산탈춤을 재해석한다고요? 이번 작품의 1부가 전통의 오리지낼러티를 보여준다면, 2부는 재해석에 무게를 둡니다. 제가 참여하는 2부는 노장, 마부, 먹중, 소무, 취발이 등 봉산탈춤 속 인물의 서사와 콘셉트를 새로운 캐릭터로 풀어내는 접근법을 택했어요. 신발을 활용해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저희만의 언어로 옮겼죠. 전통 공연을 본 뒤 바로 재해석 공연이 이어지는지라 과거의 인물이 어떻게 현재로 연결되고 확장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막’은 무엇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책임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신발 사이를 걷는 노장의 모습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이 보이더군요. 캐릭터를 재해석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요? 제가 맡은 노장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인물이에요. 몸의 중심이 골반과 다리 쪽으로 가라앉아 상체를 활짝 펴거나 위로 솟는 동작이 제한되죠. 움직임과 공간에 제약이 많은 까닭에 그 안에서 무엇을 발현할 수 있을지 찾아야만 했습니다. 중요한 건 노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 노인 상태로 몰입하는 것이었기에, 쇼잉showing이 아닌 두잉doing이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갈 길을 가겠다”는 말을 하셨는데, 이는 완벽한 동작을 위해서인가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위해서인가요? 연습량이 모든 걸 좌우해요. 무용수는 한 번 무대에 오르면 되돌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실수가 있었다고 해서 “다시 할게요”를 외칠 수는 없어요. 찰나의 순간에 최상의 기량을 보여주려면, 기복이 있을 것을 대비해 최악의 상황일 때 나오는 가장 낮은 수준의 기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요구합니다. 저는 뭐 하나를 처음 했을 때 곧바로 능숙하게 해내는 타입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고요. 가끔은 이런 답변이 거창한 기대를 자아내는 것 같아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무언가에 숙달하려면 물리적인 시간이 드는 게 당연한 이치니까요. 물론 무대에 설 때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어떤 확신을 하기에 앞서 그저 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뿐입니다.


그렇게 치밀하게 다듬는데도, 무대에서는 날것의 생동감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안무가 태동하는 초기 단계에는 특유의 날것 같은 맛이 있어요. 하지만 연습을 거치며 동작이 정교해질수록 거친 표현은 정돈되고, 본능적인 에너지는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연유로 첫 느낌이 좋았다면, 동작이 지나치게 매끄러워지지 않도록 의도적인 여백을 남겨두곤 하죠. 사실 초기의 여운은 완벽하게 붙잡을 수 없을뿐더러 숙련되는 흐름 속에서 불가피하게 사라지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무대에서 ‘막’ 할 수 있으려면, 연습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만큼 쌓여야 해요.



2026 S/S 서울패션위크 아조바이아조 런웨이 모델로 참여한 기무간.


서울시무용단의 <미메시스>. 여덟 가지 전통 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재구성해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때마침 <럭셔리> 3월호 특집의 키워드가 ‘막’이에요. ‘막’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막’이라는 단어는 쉽게 소비될 수 있어서 저는 늘 그 결을 다시 세우려 노력했습니다. 제게 ‘막’은 무엇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책임감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단순히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행위를 넘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해 응축된 에너지를 단숨에 쏟아내는 과정과 닮았죠. 저는 무작정 하는 것보다 정교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를 지향합니다. 철저한 구조 위에서 발현되는 ‘짜임새 있는 즉흥’이 탄탄한 기본기를 만날 때 비로소 그 에너지가 보는 이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고 생각해요.


‘짜임새 있는 즉흥’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유로운 에너지도 인상적입니다.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역설적으로 무대는 약속된 동선과 정교한 설계가 숨 쉬는 곳이라, 무용수가 완벽한 자아를 분출하기란 쉽지 않거든요.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건 홀로 연습실에서 아무 음악이나 틀어놓고 유영할 때뿐이죠. 무대라는 제약 안에서 자유롭고자 애쓰는 간절한 기운이 보시는 분들께는 카타르시스로 닿는 듯합니다.


무대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는 말 같아서 의외인데요. 오히려 모든 것이 정갈하게 틀 안에 들어맞았을 때 해방감이 찾아오나요? 정리와 정돈에 대한 감각이 꽤 예민합니다. 집에서도 물건들이 일정한 질서로 놓여 있어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이런 모습을 보면 안정감이 생겨요. 그러면서도 제게 자유는 조금 흐트러진 틈에서 선명해집니다. 내면에 늘 강박적인 질서가 작동하고 있으니, 반대로 미세한 틈이 크게 와닿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기에 제게 자유는 질서와 틈이 서로를 비추는 방식으로 가까워지는 감각입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하차 결정을 내린 데도 질서와 틈이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무대 밖에서의 시간이 갑자기 커지면 무대 위에서 지켜야 하는 집중의 결도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당시에는 제 호흡을 정리할 시기라고 여겼습니다. 제 기준이 흐려지지 않게,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을지부터 정리해야 했죠. 제가 오래갈 수 있는 방식으로 속도를 조절하는 선택이었어요. 덕분에 예전보다 단단하게 춤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유튜브, 패션모델 등 무대 밖의 공간에서 경험한 몸의 문법은 무엇이 달랐나요? 춤은 시간이 쌓이며 서사를 만들지만, 런웨이는 아주 짧은 호흡 안에 몸을 선명한 이미지로 응결시키는 것이 핵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어떤 현장이든 ‘보이는 몸’은 태도와 호흡에 달려 있다는 의미예요.


런웨이에서 찰나의 에너지를 꺼내는 방식도 무대와 맞닿아 있을까요?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준비된 걸 단 한 번의 타이밍에 터뜨려야 한다는 점이죠. 막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구조가 충분히 받쳐준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열리는 에너지니까요. 저는 ‘막’이라는 단어를 ‘대충’이 아니라, ‘한 번에 터지는 폭발력’ 쪽에 가까운 언어로 해석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용 인생 20년, 길을 찾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너무 빨리 스스로를 정의 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춤도, 몸도, 삶의 리듬도 계속 변하니까요. 그리고 하나 더, 무대 위에서 ‘막’ 에너지를 발산하기 위해 무대 밖에서 쌓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마세요. 서두르지 않고 자기만의 리듬을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무대 위에서 거침없는 나를 만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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