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2월호

시대를 읽는 지적 도전

컬렉터 에블린 하림에게 예술이란 향유를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확장하는 지적 도전이다.
그녀는 “안목은 타고난 재능이 아닌 학습과 경험을 통한 문화적 축적”이라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통찰을 삶의 철학으로 삼는다. 예술 생태계의 조력자이자 동시대의 이슈를 기록하는 증언자로서 그녀는 컬렉터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한다.

EDITOR 박이현 WRITER 박수전 PHOTOGRAPHER Vicky Tanzil

성능경, ‘끽연Smoking’, 1976


컬렉팅이란 “마치 예술과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묘사됩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 작품 소장을 결정하나요? 저에게 컬렉팅은 ‘달콤한 인생La douceur de vivre’, 즉 삶을 음미하는 긍정적인 태도의 실천이에요.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경험을 선사해주죠. 예술 작품은 항상 우리에게 지적 도전을 제시하고, 시야를 넓혀주며, 관점을 전환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확장시킵니다. 그래서 시각적 감상을 넘어서 지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 제 마음을 사로잡는 내용이 담긴 작품을 찾아서 소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새로운 층위가 열리고,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거든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자면, 작품이 기존 컬렉션과 조화를 이루는지도 고려해서 작품 소장을 결정합니다.


컬렉팅 여정의 초기와 현재를 비교했을 때 작품 수집에 대한 철학이나 취향에 변화가 있었나요? 많은 컬렉터가 초기에 구입한 작품들을 두고 수업료를 냈다고 농담하곤 합니다. 수집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시점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취향이 극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찾아오거든요. 컬렉팅 초반에는 인생에서 제가 겪었던 감정과 맞닿아 있는 작품을 구매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이란 개인보다 훨씬 더 큰 맥락으로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차츰 깨달았죠. 5년 전 좀펫 쿠스위다난토Jompet Kuswidananto의 작품을 소장하면서 제 컬렉션은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그 작품은 제가 실물을 직접 보지 않고 구매한 첫 작품이었어요. 배송받은 뒤 공간에 설치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들였는데, 그 과정에서 소장품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눈에 띄거나 아름답다는 외적인 이유만으로 작품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은 이해를 원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은 마치 데이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상대방의 외모만 보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그 사람을 깊게 알고 싶어하는 것과 같죠.


디지털 데이터를 빛과 소리의 추상적인 언어로 시청각화함으로써 정보의 끊임없는 흐름 속 인간 존재를 탐구한 료지 이케다Ryoji Ikeda의 ‘data.flux [n°1]’(2020) 옆에 선 에블린 하림. Photo: Stellarissa


EVELYN HALIM

에블린 하림 자카르타에 기반을 둔 현대 미술 컬렉터. 글로벌 이 슈를 다루는 작품에 관심을 두고 디지털화, 세계화, 정치, 환경 문 제 등의 주제를 탐구하는 사운드, VR, AI,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매 체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다. 2022년 반둥 현대미술상Bandung Contemporary Art Awards의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퐁피두 센 터 아시아태평양 후원회 멤버로 활동 중이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작품 기증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예술 발전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멘토링과 폭넓은 독서가 당신의 안목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스승은 문을 열어주지만, 실천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저의 컬렉팅 멘토는 어떤 작품을 수집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대신 제가 수집하는 작품을 이해하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현대미술 컬렉터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미술 이론 서적들로 저를 이끌어준 멘토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 생각해요. 그중 저를 크게 변화시킨 통찰 하나가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이론은 제가 예술에 접근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어요. 작품을 보는 안목은 예술 세계 안에서의 지속적인 학습과 깊은 참여를 통해 얻은 경험으로부터 키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죠.


2022년 발리 북부 불렐렝Buleleng 해저에 설치한 예술 프로젝트 ‘장어의 집Domus Anguillae’을 후원하신 것은 실험적인 예술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다각적인 의미로 중요한 시사점을 갖습니다. 먼저 환경적 측면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점점 고갈되고 있는 양질의 산호초 보존의 필요성을 다루고 있어요. 해양 생물이 지구 산소의 약 70%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나무가 생산하는 양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이를 고려하면 해양 생태계 보존은 시급한 이슈임이 분명해요. 그래서 작가 테구 오스텐릭Teguh Ostenrik이 설립한 재단 ‘야야산 테룸부 루파Yayasan Terumbu Rupa’를 통해 지역 학교에 산호초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적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장어의 집’ 작업이 예술의 상업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설치미술의 본질을 충실하게 구현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장어의 집’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는데 경험하려면 모두가 바닷속으로 잠수해야 합니다. 전시 장소 역시 누구에게나 동일한 조건을 요구하는 공정한 무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에블린 하림의 소장품이 전시된 공간 전경.


다수의 컬렉터가 공간 제약 때문에 설치 작품 소장을 주저하는 것과 달리, 당신의 컬렉션에는 대형 설치 작품들이 많습니다. 저에게 아트 컬렉팅은 운명과도 같기에 작품을 소장할 때 규모로 우열을 두지 않습니다. 운명이라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면 크기는 중요하지 않아요. 유지 관리가 어렵지 않느냐고요? 물론입니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거대하고 복잡한 설치 작품을 어떻게 제 공간에 전시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서는 세심한 공간 연구와 신중한 설치 그리고 헌신이 요구됩니다. 제가 대형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행운아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처음에는 사무실 한편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나중에는 그 공간이 작품으로 가득 차서 무엇 하나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죠. 단순히 공간이나 관리 문제 때문에 설치 작품의 소장을 포기하지는 마세요. 의지가 있다면 항상 방법은 있습니다. 아트 컬렉팅의 진정한 즐거움은 작품을 ‘선정’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작품을 ‘전시’하는 과정에도 있거든요.


컬렉션 전시 공간을 공유함으로써 얻는 기쁨과 가치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작품이 작가와 컬렉터, 단 두 명의 시선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 작품이 완전히 활성화된activate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술관을 운영할 여유는 없어요. 대신 컬렉션 전시 공간을 만들어 제 소장품을 다른 이들과 공유합니다. 주기적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저녁 식사와 함께 소장품들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제가 작품을 활성화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아트 자카르타 기간에는 해외에서 많은 예술 관계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기 때문에 저를 포함한 많은 현지 컬렉터가 자신의 공간을 개방합니다. 우리는 이 기간을 ‘근로 시간’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컬렉터로서 매우 큰 기쁨입니다. 보다 넓은 폭의 글로벌 관객에게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아스모아지Asmoadji의 ‘Di Balik Kampung Itu’(2023)는 도시 개발 속에서 마을 공동체가 겪는 정서적, 사회적 서사를 표현한 작품이다.


FX 하소노Harsono의 ‘The Irony Sticks Out’(2023)은 역사 속에서 소수민족이 겪은 정체성 혼란과 차별의 역설을 다룬 작품이다.


예술가의 성장 과정에 동참하는 것, 즉 작품을 소유하는 것보다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더 보람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도네시아의 컬렉터들은 예술 생태계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이 인도네시아의 예술계를 이토록 강력하게 만든 이유일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뛰어난 예술가들이 많은데, 현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재능이 간과된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죠. 저 역시 컬렉팅을 단순한 작품 소유를 넘어 예술가의 성장을 오랜 시간 지원하고 지지하는 행위로 인식합니다. 해외 아트 플랫폼에서 작업을 선보일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국경을 넘어 작가들의 목소리가 전달되도록 하죠.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과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현대미술 컬렉터로서 비디오 아트 창시자의 작품 한 점은 반드시 소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중 아트바젤 온라인 뷰잉 룸에서 백남준의 작품을 보고 가고시안 갤러리에 이메일로 문의했는데, 운 좋게도 제가 구매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아방가르드 운동 중 하나로 꼽히는 ‘ST 조형예술학회’ 성능경 작가의 작업에도 매료되었습니다. ST 회원들의 작업은 ‘매체 비특정성’이라는 현대미술 정신을 구현하는데, 한국에서 이러한 예술적 접근법을 도입한 선구적인 그룹 중 하나였기에 관심을 갖고 소장했습니다.


올해 참석할 계획이거나 특히 기대되는 글로벌 아트 행사가 있다면 추천해주세요. 가장 먼저 LAS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열리는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전시를 보러 가는 게 최우선입니다. 최근 제가 그의 ‘카마타Camata’ 작품 중 하나를 구입했는데, 전시를 직접 보고 제 소장품을 어떤 방식으로 전시하는 게 적절할지 구체적인 해법을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겨울 태국에 개관한 현대미술관 ‘딥 방콕Dib Bangkok’에 가볼 예정이고, ‘베니스 비엔날레’와 ‘아트바젤’, 디지털 아트 수집가에게 놀라운 자원이 될 오스트리아 린츠의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 방문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고향에서 열리는 아트 자카르타Art Jakarta는 필수고요!


‘에블린 하림 컬렉션’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중요한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로 구성된 제 컬렉션은 시대정신을 반영합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이주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 수집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미술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려는 야망은 없습니다. 단지 제 능력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제가 수집한 예술품을 통해 우리 시대를 증언하고, 그 비전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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