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6년 2월호

DAWN BENNET, 바다를 건너 관계를 설계하다.

2023년 주한 뉴질랜드 대사로 부임한 던 베넷Dawn Bennet. 통상과 외교, 다자 협상과 문화 교류의 현장을 오가며 그녀가 반복해온 일은 합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가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가깝다.
신뢰는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이해와 조율, 그리고 시간 속에서 축적된다는 것이 그녀의 기본 전제다.

EDITOR 김민지 PHOTOGRAPHER 이우경

던 베넷 주한 뉴질랜드 대사. 외교정책과 통상, 양자·다자 외 교를 넘나드는 실무 경험을 바 탕으로 지속 가능한 한국·뉴질 랜드 양국 관계 협력을 이끌고 있다. 외교를 ‘합의의 기술’이 아니라 ‘관계가 작동할 조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한다.


AI가 협상의 속도와 형식을 바꾸는 시대에도, 던 베넷은 외교의 핵심은 여전히 인간의 판단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외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인류의 실천적 기술이며, 그 중심에는 정직성, 적응력, 공감이라는 매우 오래된 원칙이 놓여 있다. 상대의 입장을 정확히 읽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언어와 전략을 조정하며, 갈등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능력은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던 베넷의 이러한 시선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다. 외교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 뉴욕부터 남태평양 쿡 제도에 위치한 라로통가 Rarotonga, 싱가포르, 독일 본Bonn,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프레토리아Pretoria 등 여러 도시에서 성장하며, 세계는 하나의 규칙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같은 문제라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뤄진다는 경험은, 훗날 외교 현장에서 단일한 해법을 고집하지 않게 한 배경이 되었다. 1998년 뉴질랜드 외교부에 들어가 남미 5개국을 담당하는 데스크 오피서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녀 는, 이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분쟁 해결을 담당하는 변호사로 일하며 규범 기반의 질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체득했다. APEC 정상회의 연락관의 경험은 국제회의가 정치적 수사 이전에 운영과 신뢰, 세밀한 조율 위에서 성립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켰다. 2023년 5월부터 던 베넷은 주한 뉴질랜드 대사로서 서울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동안의 모든 경험은 던 베넷이 반복해 말하는 외교의 정의로 수렴된다. 전북 세계서예비엔날레에서 직접 한글 서예 작품을 선보일 때 선택한 마오리 속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 사람, 사람이다(He aha te mea nui o te ao? He tangata, he tangata, he tangata)”는 그녀가 ‘사람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에 대해 깊이 공명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해에서 출발한 신뢰는 협력의 범위를 넓히고, 그렇게 축적된 관계는 다시 다음 선택의 조건이 된다. 파도를 건너온 그녀의 외교는 지금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관계의 구조를 다시 그리고 있다.


뉴질랜드 작가 마히리키 탕아로아Mahiriki Tangaroa의 ‘Blessed Again by the Go’. 성장과 재생의 계절인 봄을 기리며, 영적 보호에 대한 약속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주한 뉴질랜드 대사로 부임하신 이후, 문화·교육·학술 분야에서 다양한 교류를 지원해오셨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국립중앙박물관과 협력해 웰링턴의 마오리 카파 하카 공연단 ‘더 히와 크루The Hiwa Crew’의 공연을 선보였던 때입니다. 이 공연은 <마나 모아나 – 위대한 대양의 예술, 오세아니아> 전시를 기념해 마련되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모였습니다. 뉴질랜드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리듬과 정신이 언어를 넘어 한국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장면을 보며, 문화 교류가 갖는 힘을 실감했습니다.


한국과 뉴질랜드의 관계에서 현재 가장 주목하고 계신 협력 분야는 무엇인가요? 양국 관계는 현재 중요한 전환점에 있습니다.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과 뉴질랜드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협력국을 넘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전략적 파트너로 나아간다는 분명한 선언이지요. 이 새로운 틀 아래에서 핵심 광물 및 첨단 기술 협력, 양자 과학을 포함한 첨단 연구 분야의 공동 연구, 남극 연구와 재난 대응 협력 등에서 협력을 심화해나갈 계획입니다.


뉴질랜드의 농식품 산업에서 한국 시장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한국은 뉴질랜드의 다섯 번째 교역국입니다. 품질과 안전성,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소비자 성향은 뉴질랜드의 강점과 잘 맞닿아 있죠. 유제품과 육류, 농산물은 이미 높은 신뢰를 얻고 있고, 자연환경과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담은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관심도 꾸준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에서 매년 뉴질랜드 와인 페스티벌을 주최하는 만큼, 와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비뇽 블랑은 뉴질랜드 와인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품종입니다. 생동감 있는 아로마와 선명한 산도, 패션프루트와 라임, 허브를 연상시키는 풍미는 뉴질랜드 특유의 기후와 토양에서 비롯됩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화이트 와인이기도 하지요. 화이트 와인을 선호하신다면 말버러Marlborough 지역의 소비뇽 블랑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레드 와인을 좋아하신다면 센트럴 오타고Central Otago의 피노누아가 인상적이고요. 섬세한 구조와 부드러운 타닌, 베리류와 향신료, 흙 내음이 어우러진 풍미는 불고기나 삼겹살과도 잘 어울립니다.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저에서 만난 던 베넷. 관저 곳곳에는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예술 작품들을 배치해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예술적 취향을 느낄 수 있었다.


대사님의 외교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원칙은 무엇인가요? AI 기술이 많은 직업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외교는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교는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온 인류의 오래된 실천이며, 그 중심에는 사람 사이의 신뢰가 있습니다. 저는 외교의 핵심 원칙으로 정직성, 적응력, 공감을 꼽습니다. 정직성은 신뢰의 출발점이며, 적응력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게 합니다. 여기에 명확한 소통과 문화적 감수성이 더해질 때, 외교는 지속 가능한 관계로 이어집니다.


리더십이 가장 크게 시험대에 오른 경험은 무엇인가요? APEC 워킹 그룹 의장을 맡았던 경험이 대표적입니다. 제 역할은 협상을 넘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참여자들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만큼 외교의 본질을 체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죠. 외교관은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와 동맹, 그리고 조직 자체의 목표를 조율하는 동시에, 각 회원국이 추구하는 장기적 방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의제의 기술적 세부 사항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국의 우선순위를 지켜내는 역할도 중요하고요. 마지막으로 각 대표가 지닌 개인적 소통 방식 역시 영향을 미치는데, 외교관 역시 무엇보다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저는 이러한 과정 자체를 진심으로 즐깁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개인적인 루틴은 무엇인가요? 관저가 이태원에 있어 한강과 가까운 점을 저는 큰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매일 아침 출근 전, 1시간가량 한강을 따라 걷는 것이 제 일상이 되었습니다. 날씨와 계절에 상관없이 이어가는 이 산책은 제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시간이에요. 동네의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며, 같은 길을 매일 함께 걷고 사계절의 변화를 나누는 경험은 제가 이곳에 속해 있다는 감각과 깊은 안정감을 안겨줍니다.


대사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뛰어난 품질입니다. 뉴질랜드가 프리미엄 국가로 인식되는 이유 역시 자연과 제품, 그리고 삶 전반에 걸쳐 품질에 대한 높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해왔기 때문이지요. 이 기준은 음식과 텍스타일, 장인 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늘 ‘가장 쉬운 선택’이 아니라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기능하고,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물건들. 형태와 기능 모두에서 유행을 초월한 존재야말로 제가 정의하는 진정한 럭셔리입니다.



FROM NEW ZEALAND TO SEOUL

주한 뉴질랜드 대사 관저에서 찾은 던 베넷의 컬렉션.


(위부터) 문신한 마오리 얼굴을 형상화한 본bone 조각 펜던트. 뉴질랜드 조각가 스티브 미르헤가 제작한 것으로, 파푸아뉴기니에서 받은 영감을 담았다. 유리로 표현한 후이아huia 새의 깃털. 마오리 문화에서 후이아 깃털은 의례적으로 중요한 자리에서 착용되었으며, 부족 간에 존중의 표식으로 선물하거나 교환되는 귀중한 상징이었다.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Māori의 깃털 망토, 카카후kakahu. 이 망토는 높은 지위와 영적 권위, 위엄을 상징한다. 주한 뉴질랜드 대사 전용으로 뉴질랜드의 역사와 존엄, 그 정신을 외교 활동 속에 함께 지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위부터) 마오리 전통 얼굴 문신인 모코moko를 형상화한 목제 가면. 전복 껍데기 상감 장식이 돋보인다. 유약 처리한 알루미늄을 겹겹이 겹쳐 ‘깃털’을 표현한 키위kiwi 오브제. 키위는 날지 못하는 야행성의 뉴질랜드 고유 조류이자 국조로, 머리카락처럼 부드러운 깃털로 잘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의 가재 코우라koura를 그린 대형 유약 도자 접시. 코우라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살로 잘 알려진 별미다.


(왼쪽부터)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식물인 은고사리Silver Fern가 새순을 틔우며 말려 올라가는 모습에서 착안한 나선형 코루koru 유리 문진. 새로운 생명과 성장, 재생을 상징한다. 마오리의 전통 목조각 상자 파파호우papahou. 마오리 사회에서 부적과 귀고리, 빗, 깃털 등 개인이 소중히 여긴 장신구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끈으로 집의 서까래에 매달아두는 게 전통이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아랫면이 가장 잘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존 퓰레John Pule의 ‘Malilolilo(소용돌이가 되다, 변화의 대상이 되다)’는 폴리네시아의 섬나라 니우에Niue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던 전통 직물인 ‘히아포hiapo’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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