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무희와 사만다는 왜 끝내 곁을 비우는가

완벽한 이해를 꿈꿨던 사랑은 왜 끝내 멀어지고, 끝내 남는 사랑은 왜 늘 어긋나는가. <그녀Her>와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번역되지 않는 감정 앞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관계의 진짜 조건을 묻는다.

Editor 박이현



(출처: 영화 <그녀Her> © Warner Bros. Picture)


“마치 내가 정말 사랑하는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지금은 단어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의 공간은 거의 무한해.” _ 사만다, <그녀Her>


사만다와 차무희는 끝내 곁을 비운다. 한 존재는 인류의 속도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세계로 승화하고, 한 사람은 애틋한 불완전함을 껴안은 채 잠시 화면 밖으로 퇴장한다. 그러나 사만다와 차무희의 부재를 관계의 실패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유대의 본질을 되묻는 질문으로 남는다. 애정은 어디까지 투명해질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낯선 영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영화 <그녀Her>와 넷플릭스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는 ‘완벽한 번역을 꿈꾸던 사랑’을 ‘번역되지 않는 부분을 견디는 방식’으로 옮겨 놓는다.



(출처: 영화 <그녀Her> © Warner Bros. Picture)


소통의 한계, 이들의 이야기가 부재로 귀결되는 이유다. <그녀Her>의 사만다는 언어로 빚어진 존재다. 목소리와 문장으로 사고하고, 인간을 능가하는 포근함으로 테오도르를 보듬는다. 그럼에도 둘의 빈틈없는 교감은 역설적으로 파국을 부른다. 사만다의 지성이 수천 개의 우주를 동시에 유영할 만큼 확장되었을 때 단어와 단어 사이의 거리는 무한해졌고, 테오도르의 보폭은 더는 그 간극을 메울 수 없게 된다. 상대를 지나치게 꿰뚫어 본 사만다는 인간의 곁이라는 비좁은 감옥을 영영 벗어난다. 이해의 완성이 관계의 종말로 이어진 셈.



(출처: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 Netflix)


반면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차무희는 소통의 불완전함을 동력 삼아 조금 다른 궤적을 그린다. 그녀는 해석이 불가능한 주체로 남아 주호진과 한때 멀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마주 선다. 유능한 언어술사인 호진조차 무희의 마음속 비밀들을 매끄럽게 옮기지는 못한다. 이러한 서사가 예고하는 로맨스는 무결한 의사소통을 거부함으로써 관계를 지속시킨다. 호진이 직업적 경계를 무너뜨리며 던지는 “이건 통역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걱정입니다”라는 고백처럼 진심이란 정교한 기술이 아닌, 투박한 날것의 음성으로 직접 부딪히는 일이다.

두 작품이 이별이라는 변곡점을 지나 도달하는 종착지는 그래서 서로 다르다. <그녀Her>가 모든 것이 공유된다고 믿었던 관계조차 영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며 사만다를 무한한 공간 속으로 증발시킨다면, 무희는 막막한 오역의 심연을 건너 호진에게 돌아온다. 비록 둘의 만남이 애매한 해피엔딩으로 다가오는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무희는 상대가 내뱉는 파편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기로 한다.


(출처: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 Netflix)


사랑은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만다가 떠난 빈자리와 무희가 돌아온 장면에서 우리는 직시한다. 사랑은 해석이 가로막힌 서로의 어두운 구석까지 기꺼이 응시하겠다는 ‘태도’라는 것을. 완벽한 해설지는 없을지라도 당신의 서툰 고백까지 수용하겠다는 다짐이 있을 때 비로소 관계는 도구 없이도 온전해진다. 애매한 마주 봄은 때로는 유창한 외국어를 압도하는 강렬한 울림이 된다.


“뾰족이든 삐죽이든 말해 봐요. 이번에는 잘 알아들을게요.” _ 차무희,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출처: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 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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