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 메주는 밀도가 너무 촘촘해서 못써요. 균주가 안까지 침투를 못하거든. 꼭 하나하나 손으로 다독다독해서 만들죠. 그래야 메주 안과 겉이 맛있게 뜬다니까. 그 집 장맛의 핵심은 결국 그 집 미생물 맛이거든요.”
한국에서 장을 담근다는 행위는 단순한 음식 제조를 넘어, 삶의 시간과 계절, 공동체의 질서를 함께 축적하는 문화적 실천이었다. 콩 재배부터 메주 만들기, 장 만들기, 장 가르기, 숙성·발효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일본·중국의 장 문화와 구별
되는 한국 장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장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콩을 삶아 발효한 음식과 장류로 해석 가능한 식재료 사용 기록이 등장하며, 이는 한반도에서 이미 콩 발효 식품이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농경 사회에서 단백질을 안정적으로 섭취하기 위한 지혜로서, 장은 곡물 위주의 식단을 보완하는 핵심 식재료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장 담그기는 명확한 계절성과 의례성을 띠게 된다. 음력 정월이나 이른 봄,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는 시점에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그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단순히 기후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한 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생활 의례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이었다. <규합총서>나 <산림경제> 같은 생활서에는 메주 만드는 법, 간장·된장·고추장 관리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장이 가정경제와 식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준다.

레스토랑 ‘본연’을 총괄하고 있는 배경준 셰프.
CIA를 졸업한 뒤 뉴욕 ‘그래머시 태번’과 ‘모수 서울’에서 경력을 쌓았다.

레스토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장독대의 모습.
시간을 담그는 문화
집 안에서도 햇볕과 바람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한 장독대는 자연과 발효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장소였다. 땅의 기운, 계절의 변화, 집 안의 공기가 장맛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고, 그만큼 장은 자연과 공존하며 만들어지는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집집마다 장맛이 다르다’는 말은 곧 각 가정의 삶의 리듬과 환경이 장에 고스란히 반영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근대이후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장 담그기 문화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대량생산한 장이 보급되며 가정에서 장을 담그는 풍경은 점차 사라졌고, 장독대 역시 생활공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통 발효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장 담그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슬로푸드와 지속 가능한 식문화, 지역성과 미생물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장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20여 년간 전남 강진에서 전통 장을 연구하고 만들어온 다산 명가 국령애 대표는 어머니의 장맛을 지키기 위해 레시피를 계량하고 표준화했다. 손끝의 감각에 의존하던 손맛이 종이 위에 쓰이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이제는 콩을 삶는 가마솥이 있던 자리에 증숙기가 자리하고, 이불을 덮어 메주를 띄우는 대신 온도·습도가 완벽하게 제어되는 위생적 환경에서 발효를 시킨다. 메주를 네모난 모양으로 성형해주는 기계까지 있지만, 성형 과정만큼은 꼭 수작업을 고수한다. “기계 메주는 밀도가 너무 촘촘해서 못써요. 균주가 안까지 침투를 못하거든. 꼭 하나하나 손으로 다독다독해서 만들죠. 그래야 메주 안과 겉이 맛있게 뜬다니까. 그 집 장맛의 핵심은 결국 그 집 미생물(균주) 맛이거든요.” 오늘날의 장은 전통을 계승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현대 미식의 언어로 확장되는 중이다. 장을 담그는 행위는 여전히 ‘기 다림’과 ‘시간의 축적’을 전제로 하며, 이는 빠른 소비와 즉각적 결과를 요구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조용한 대안처럼 읽힌다. 2024년 12월 3일,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개최된 제19차 유네스코 무형유산 보호 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됐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장 담그기 문화’는 한국 음식의 기본 양념인 장을 만들고 관리·이용하는 과정의 지식과 신념, 기술 등을 모두 포함한다. 한국의 장 담그기 역사란 결국 자연과 인간, 시간과 맛이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해온 기록이자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 문화적 서사가 아닐까.

자연광이 아름답게 드는 본연의 전경.
파인다이닝에서 다시 만난 장
전통 장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문화라면, 레스토랑 ‘본연Bornyon’을 총괄하는 배경준 셰프에게 장은 그 시간을 요리의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재료다. 그는 장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코스를 ‘장 중심’으로 구성하지도 않는다. 다만 깊은 맛을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장과 발효로 돌아오게 된다고 말한다. 장은 그의 요리에서 하나의 테마라기보다 전체를 지탱하는 구조에 가깝다. 배경준 셰프의 조리 철학은 여러 시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졌다.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조리의 기본을 배우고, 뉴욕의 ‘그래머시 태번’과 ‘모수 서울’에서 요리를 이어가며 그는 점차 짧은 자극보다 시간이 만드는 맛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발효 과정을 거치고 장작불을 활용해 풍미를 쌓아가는 방식 역시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경험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기술과
조리의 언어를 익힌 이후에도 그가 끝내 다시 돌아오게 된 지점은 ‘장’이었다. 한국 요리의 깊이를 이루는 그 근간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맛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이어지는 것일까? 그는 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배경준 셰프는 영암에 위치한 김명성 발효연구소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는 김명성 명인에게서 장의 맛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또 해마다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도 맛을 어떻게 지켜가는지를 가까이에서 배웠다. 기후와 습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장을 살피고 기다리는 과정은 장을 단순한 양념 이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 발효가 겹겹이 중첩되며 형성되는 이 다층적 구조는 배경준 셰프에게 요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출발점이었다. 그는 장이 가진 이러한 성격이 코스 안에서 과도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조율한다. 전통 장의 깊이와 결을 파인다이닝의 언어로 옮기는 일에 대해 그는 담담한 태도를 보인다. 중요한 것은 장이 가진 고유한 장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이 요리에 그것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실제 메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추장 에센스는 여러 채소와 과일을 함께 중탕해 추출해내 만드는데, 이는 텁텁함이나 무거움 없이 향긋한 고추장 향만을 요리에 남기기 위한 방식이다. 반대
로 디저트에 사용되는 고추장 캐러멜은 고추장의 은은한 매운맛과 짠맛, 감칠맛을 캐러멜의 깊은 단맛과 조합해 단맛의 결을 확장한다. “세계의 어떤 발효식품과 비교하더라도, 저는 ‘장’이 한 단계 다른 깊이를 가진 발효라고 생각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계절마다 온도와 습도가 크게 달라지는 한국의 기후에서 탄생한, 매우 독특한 발효 방식이죠.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서 종종 그 가치를 과소평가하지만, 장을 연구하고 새로운 활용법을 모색해보면 장이 가진 가능성은 끝이 없습니다. 장이라는 하나의 재료만으로도 전혀 다른 세계의 맛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배경준 셰프의 말이다. 이곳에서 장은 과거의 유산이나 전통의 재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과 계절, 발효의 리듬을 읽어내는 하나의 기준에 가깝다. 장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요리의 결을 정하고 흐름을 만든다. 그렇게 장은 본연의 주방 안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지금의 요리로 살아 있다.

제주 흑돼지 & 감귤 고추장 소스
된장에 염지해 풍미를 끌어올린 흑돼지를
숯불에서 천천히 구워낸 메뉴.
기름이 많은 부위에 화덕에서 구운 귤과 고추장을
중탕해 만든 소스를 발라가며
훈연해 차슈 스타일로 완성했다.
제주에서 즐겨 먹는 멜젓을
로메스코 소스와 조합해 곁들였다.

버섯흑보리비빔밥 고추장 대신 간장을 더한 산채비빔밥. 흑보리와 돌팥을 된장과 양파로 만든 수비즈 소스에 버무려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네 가지 버섯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리해 올렸다. 발효한 표고를 숯불에 굽고, 양송이를 간장과 함께 중탕해 만든 버섯 간장으로 전체를 조화롭게 마무리했다.
COOPERATION 명인명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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