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고소하겠습니다

드라마 <프로보노>에서 “신을 고소하겠다”라는 말이 과격한 선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설명이 오갔던 자리에서 그 말은 되레 주어를 되묻는 방식에 가깝다.

EDITOR 박이현

tvN



“신을 고소해주세요.”

드라마 <프로보노> 3회에서 사건의 중심에 선 김강훈이 아이 특유의 순수함과 거리낌 없는 태도로 변호사 강다윗에게 건넨 말이다. 로펌 오앤파트너스의 공익팀은 적잖은 시간을 들여 이를 검토한 끝에 고소 절차에 들어선다. (스포일러일 수도 있어 드라마 내용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고소는 본디 분명한 수신인을 전제로 하는 제도다. 그런데 신에게 보내는 고소장에는 주소가 부재하다. 결국 서류 위에 남는 것은 ‘신’이라는 단어 하나뿐. 이름을 특정하는 게 불가능할 때 사람들은 범위를 키운다. 신은 그렇게 호출된다. 출석을 기대하긴 어려우나 그래도 불러본다. 애석한 점은 신이 대체로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 신은 늘 바쁘다.




드라마 속 ‘신god’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신臣’이 겹쳤다. 신이 침묵하는 동안 신의 이름을 빌린 말들은 앞서 움직인다. 입을 굳게 다문 신, 그리고 분주한 신. 이때 등장하는 클리셰가 있다. “그래야만 했다”, “대의가 먼저다” 등. 정중하고 흠잡을 데 없는 문장이지만, 주체가 사라졌다.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만 남고, 결정자는 모습을 감춘다. 말만 남고 책임이 빠진 셈. 이쯤 되면 신을 대신하는 존재의 성실함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말들이 상황을 무마하는 데 효과적인 이유는 사안을 더는 다루지 않아도 될 상태로 정리해주기 때문.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Eva Illouz는 “감정과 경험은 사적인 영역을 넘어 자본주의 문화 같은 담론을 통해 형성되고 조직된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공감의 진정성이 아니라 기능이다. 말은 감정을 건너뛰고 상황을 관리 가능한 국면으로 옮긴다. 이렇게 다듬어진 레토릭은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질문의 타이밍을 뒤로 미룬다.




우리는 부드럽게 정리된 말들 사이에서 책임을 조금씩 옆으로 밀어둔다. 우리네 일상은 이런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 “규정상 그렇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듣는 순간 반박하기 어렵고, 묻지 말아야 할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문장들은 법의 경계 안에 머무르지만, 책임에서는 슬쩍 벗어난다. 그래서 “신을 고소하겠다”라는 말이 과격한 선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신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설명이 오갔던 자리에서 그 말은 되레 주어를 되묻는 방식에 가깝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큰 단어를 고른다. 그 단어는 책임을 가리는 가면이기도, 책임을 다시 불러들이는 마지막 장치이기도 하다.


당연히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현실 속 판결은 한숨만 나온다. 신은 원래 출석하지 않고, 신하는 “정해진 일”을 앞세운다. 그럼에도 다음번에 동일한 문장이 나타난다면, 그 문장이 누구를 대신해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대신 지워주고 있는지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다만 정녕 우리가 신을 고소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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