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12월호

연말의 마지막 장면

길고도 짧았던 한 해가 저물어간다. 유난히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 한쪽을 채워주는 것은 어쩌면 한 편의 클래식 영화일지도 모른다.
비록 ‘구태의연’할지라도 고전은 고전, 명작은 명작.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를 소개한다.

EDITOR 김나림 WRITER 김도훈


연말은 슬프다. 나도 안다. 연말은 즐거워야 마땅하다. 이 잡지를 보는 독자 누구도 ‘연말은 슬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읽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나는 혼자 25년을 살았다. 그중 18년은 고양이와 함께였다. 이놈의 고양이는 한 달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 내 새끼는 평생 함께 살다가 같은 날 눈을 감을 것 같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여러분의 지난 한 해도 그랬을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정치적 격동, 그리고 그로 인한 경제적 수난을 겪으며 우리의 가슴은 조금씩 비었다. 지갑도 조금씩 비었다.


왜 이렇게 우울한 소리를 하느냐고? 일단 조금만 더 들어보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을지 말지 판단해달라. 세상에는 연말에 볼 만한 영화가 참 많다. 이를테면 나는 전통적인 몇몇 영화를 추천할 수 있다. 연인과 로맨틱한 연말을 보낼 작정이라면 구태의연한 로맨틱 코미디가 몇 편 있다. 나는 ‘구태의연하다’는 표현을 부정적인 의미로 쓴 게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구태의연하면 구태의연할수록 재미있다. 누구도 에지 있고 힙한 로맨틱 코미디를 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올해도 모든 잡지가 언제나처럼 추천할 <러브 액츄얼리>나 <홀리데이> 같은 제목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 그 영화들을 제발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그래도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는 꼭 등장해야 한다. 연말 파티에서 “사랑한다”고 말하며 끝나는, 그래서 지구 위 모든 연인의 연말용 로맨틱 코미디로 이미 오랫동안 자리 잡은 이 영화를 또 권하고야 마는 이유가 있다. 나는 올해로 지천명이 됐다. 오십이라는 소리다. 나이를 이렇게 먹으면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분명 나의 시간적 개념으로는 개봉한 지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영화들이 ‘클래식’이라는 타이틀을 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듣다가 ‘클래식 록’이라는 플레이리스트를 클릭했다. 나는 생각했다. ‘클래식 록이라면 역시 레드 제플린, 비틀스, 롤링 스톤스 등이 있겠지?’ 아니었다. 너바나가 있었다. 건즈 & 로지스가 있었다. 나는 울었다. 아니, 진짜로 운 건 아니다. 마음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내가 거의 성인이 되고 나서 본 영화마저 이젠 클래식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나온 해는 1989년이다. 내가 비디오로 이걸 본 건 1992년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비디오’라는 매체로 영화를 본 독자가 몇이나 계시는지도 궁금해진다. 이건 딱히 나쁜 일은 아니다. 나에게는 세상 모두가 다 본 대중적인 클래식도 2025년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 나 같은 늙은이들만 본 영화가 됐다. ‘혹시 이건 너무 일반적인 선택 아닌가?’라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1994년 대학 시절 ‘영화의 이론’ 강의에서 “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아직 안 봤니?”라던 교수님이 떠오른다. 1961년도 영화다. 내가 태어나기 15년 전 영화다. 교수님께 감사한다. 덕분에 나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고전 배우의 가장 유명한 로맨틱 코미디를 더 늙기 전에 볼 수 있었다. 계산을 해보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개봉한 지 15년 후는 2004년이다. 2004년 태어난 독자는 지금 스물한 살이다. 이 영화를 열 살 즈음에 본 독자는 없을 것이 틀림없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1977년에 만나 ‘남녀는 정말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설전을 벌인 해리와 샐리가 10년 뒤 만나 친구가 된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되며 끝나는 우정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서로 다른 성격 탓에 만날 때마다 다투고, 하여간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지지고 볶는 남녀가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파티장에서 결국 사랑을 확인한다는 이야기다. 구태의연하다. 그런데 이 구태의연한 영화는 사실 이후에 나온 모든 구태의연한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표본이 됐다. 이 영화를 권하는 이유는 클래식 중에서도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당신이 만약 연말을 같이 보낼 연인이 있는 남자라면 이보다 더 연말에 어울리는 사랑 영화는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연말의 마지막 날을 친구와 연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누군가와 보낼 생각이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실제 새해 카운트다운과 교묘하게 맞춰서 보기 시작하면 된다. 솔직히 좀 너 무 영화 같은 이야기긴 하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지금 당신에게 ‘썸’ 타는 상대가 있다면, 심지어 그 상대와 연말을 보낼 작정이라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뭔가를 더 완성해주기는 할 것이다. 장담한다.


1989년 개봉 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그 인기 덕분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재개봉하고 있다.


플라자 호텔 델리 레스토랑에서 샐리와 해리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로맨틱 코미디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마음을 채우는 클래식 영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연말에 볼 사랑 영화만 쭉 추천해보자. 연말을 오로지 가족이랑 보내는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 이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긴 하겠다. 너무 행복한 영화를 권할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연말은 어쩐지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우울해지기 십상인 시기다. 올해는 심지어 한파도 자주 온다고 한다. 게다가 여러분, 서로에게 솔직해지자. 연말에 갑자기 샐리를 만난 해리처럼 누군가를 만나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당신을 위한 슬픈 연말의 영화적 발라드가 있다. 남자를 위한 영화다. 클래식이다. 이름만 듣고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한 영화라는 소리다. 보고 나면 이 늙고 지친 영화평론가에게 마음으로 고마워하게 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9 FILMS FOR YEAR-END

김도훈 영화 칼럼니스트가 손꼽는 연말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

미국인들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이 영화를 본다. 빠짐없이 본다. 모든 걸 잃은 남자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가 남긴 선의들이 기적처럼 되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종교가 있는 남자라면 죽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봐야 할 영화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The Apartment, 1960)

나처럼 아파트에 혼자 사는 남자를 위한 추천작. 회사 동료들의 불륜 장소로 자기 아파트를 내주는 이 남자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홀로 아파트를 지킨다. 물론 뜻밖의 따뜻한 온기가 찾아오고야 만다. 냉소적인 남자의 낭만에 대한, 어른의 연말 영화다.


〈러브 스토리〉(Love Story, 1970)

설마 이걸 권하느냐고? 맞다, 권한다. 어차피 여러분은 조부모님 세대가 극장에서 보고 오열했던 이 영화를 직접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겨울, 눈, 첫사랑, 계급의 차이, 가족의 반대, 불치병! 지금 한국 드라마의 모든 클리셰는 여기서 시작됐다.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 1965)

러시아혁명을 무대로 한 이 전설적인 블록버스터 시대극은 이름만 알고 실제로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다행히 올해 리마스터링판으로 재개봉했다. 겨울 러시아를 배경으로, 서로를 죽도록 찾아 헤매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는 남녀의 비극.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 2003)

올 연말에는 혼자 ‘호캉스’라도 할 생각이라고? 그러다 호텔 라운지 바에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집이든 호텔이든 우리는 외롭다. 대신 도시의 네온처럼 빛나는 이 영화의 외로움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東京ゴッドファーザーズ, 2003)

일본 애니메이션의 총아였으나 이르게 세상을 떠난 천재, 곤 사토시의 대표작. 노숙자 세 남녀가 크리스마스 밤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다. 도시의 가장 외로운 존재들이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깨닫는 이야기. 올 연말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대신 이 작품을 택하자.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연말 직전에 이별한 남자만 큼 처절한 존재는 없다. 만약 당신이 그 처절한 존재라면, 추천할 영화는 이것뿐이다. 사랑의 기억을 지우려 애써봐야 소용없다. 술도 소용없다. 마음은 영원히 남는다. 이 영화는 그런 당신을 위한 위로다.


〈그녀〉(Her, 2013)

그러나, 어쩌면, 아마도, 분명히 연말을 챗GPT와 보내는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다. 챗GPT라도 있으니 덜 외롭긴 하다. 인공지능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우리의 미래, 아니 현재를 예언했다. 외롭지만 버텨라.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

혹여 가족과 함께 보낼 생각이라면 이 시리즈를 추천한다.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를 모두 관통하는 유일한 로맨스 3부작이다. 어차피 연말에는 시간이 많다. 이 애틋한 사랑의 흐름을 줄줄이 지켜보기 딱 좋다.

목록으로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