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나-마리아 보이 루마니아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2004년 제약
계에 진출했다. 그 후 25년간 제약업계에 종사하며 유럽과 라틴아
메리카,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국가에서 경험을 축적한 뒤
2024년 한국베링거인겔하임 사장으로 부임했다.
루마니아의 전통 의상인 ‘이에ie’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선 안나-마리아 보이. 벽에 걸린 작품은 2018년부터 2020년 사이에 딸 이리나가 그린 작품이다. 런던 칼리지 오브 패션에서 패션을 전공한 딸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세 그림에는 불완전함으로 가득한 자화상, 이야기를 되찾는 얼굴 없는 인물, 혹은 여성을 통제하려는 세상에 대한 여성의 대응을 재정의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1885년 독일에서 출발해 세계 20대 제약 회사 중 하나로 성장한 베링거인겔하임은 혁신 의약품과 동물 의약품을 기반으로 130여 개국에서 약 4만75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글로벌 제약 기업이다. 1976년 국내 지사를 설립한 이후 헬스케어 현장에서 만성질환·호흡기·심혈관 분야의 치료 혁신을 이끌어왔다. 지난해 1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대표이사로 선임돼 곧 취임 2주년을 맞는 안나-마리아 보이는 자신의 커리어 여정을 “수술복에서 샘플까지From scrubs to samples”라 표
현한다. 2000년대 초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외과전문의가 되겠다는 꿈에 전념하며 인턴 의사로 근무하던 시절, 단기 의료 영업직 제안을 받은 것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두 달짜리 캠페인으로 시작된 일이 결국 정규직 제안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상 현장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이 새로운 길이 의미 있는 방향이라는 직감이 있었어요.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이었죠.” 이후 EMBA 과정을 통해 경영적 역량을 확장한 그는 2009년 베링거인겔하임 루마니
아 지사 마케팅 매니저로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글로벌 제약사의 리더십 여정을 시작했다. 다양한 국가에서 경험을 쌓으며 마케팅과 세일즈, 조직 운영 전반을 깊이 있게 이해했고, 이후 루마니아 총괄 사장과 러시아 지사의 인체 의약품 세일즈 및 커머셜 디렉터 등 핵심 역할을 잇달아 맡으며 회사의 성장을 견인해왔다. 무엇보다 그는 ‘모든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베링거인겔하임의 핵심 기업 가치를 조직 문화에 정착시키며 ‘부드럽고 강한 리더십’을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25년 동안 의료 전문성과 비즈니스적 통찰을 결합해온 그는 현재 유럽상공회의소 헬스케어 위원회 위원장과 한국글로벌의약사업협회 이사회 멤버로도 활동 중이다. 시장과 문화가 달라도 ‘사람을 중심에 두는 방식’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그는, 오늘의 한국 조직에서도 의료 접근성, 협력 생태계 구축 같은 구조적 과제들을 글로벌 경험을 바탕으로 균형 있게 이끌어가고 있다.

작년 1월부터 글로벌 제약사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의
CEO로 재임 중인
안나-마리아 보이는 다양성을
갖춘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럽, 러시아, 독일 등 다양한 시장과 조직에서 근무하셨습니다. 커리어 전반에서 변함없이 지켜온 리더십의 핵심 원칙은 무엇인가요? 제 고향인 루마니아와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한국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일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라와 직책에 상관없이 리더십은 언제나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에요. 사람들은 지시를 받았다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신뢰받고, 존중받고, 이해받으며, 공동의 목적을 느낄 때 최선을 다하죠. 리더십은 다른 사 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저는 과학과 사람, 그리고 헬스케어 생태계를 연결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역할을 제 리더십의 핵심으로 생각해요. 리더십은 직책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믿음 역시 여전히 제 리더십의 중심에 있습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맡으신 시장입니다. 부임 이후 어떤 특징들이 가장 크게 다가왔나요? 한국은 제가 경험한 시장 중 가장 성숙한 헬스케어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뛰어난 의료 인프라와 높은 치료 수준을 자랑하지만 동시에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복잡한 규제라는 압박도 존재하지요. 역동적이고 잠재력이 높지만, 과학의 속도를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의료 접근성은 제가 리더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며, 혁신은 비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산업·의료진·환자 단체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에요.
조직 내에서 특히 강화하고 싶은 기업 문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주도적 책임감’과 ‘심리적 안정감’이 공존하는 환경입니다. 구성원들이 질문하고, 시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조직이 성장할 수 있어요. 인재 개발은 단순한 기술 교육이 아니라, 잠재력을 인정받고 학습의 기회를 보장받는 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솔직하지만 배려가 있는 피드백, 성공을 함께 나누는 문화, 그리고 리더십을 직함이 아닌 행동으로 정의하는 태도가 그 근간이 되지요.
올해 유럽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ECCK 지속 가능성 어워드에서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이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부문을 수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포용성은 우리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가치입니다.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이 건강해지지요. 우리는 ‘모든 세대를 위한 지속 가능한 발전’ 이니셔티브를 통해 포용적이고 공정한 직장 환경 조성과 의미 있는 사회적 진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선도적 출산휴가 지원 등 오랜 노 력으로 다양성을 갖춘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 결과, 5년 연속 ‘최우수 고용 기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죠.
보수적인 제약 산업에서 여성 리더로서 느낀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이었나요? 대다수가 외부의 장애물 이야기를 기대하지만 제가 직면한 가장 큰 장벽은 외부보다 제 스스로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해지기보다, 자신감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어요. 여성 리더십의 여정을 진정으로 지탱하는 것은 단순한 노력, 규율, 지속적인 학습만이 아닙니다. 강력한 지원 체계가 필요해요. 저는 저를 이끌어준 멘토와 저를 믿어준 리더, 그리고 직업적
성공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온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족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저는 여행을 하고, 이주를 하고, 제 커리어를 형성하는 모든 기회에 대해 “예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럭셔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에게 진정한 럭셔리는 삶에 의미를 주는 사람과 장소, 그리고 일상과 그것의 연결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가족과의 유대가 중요한데요. 남편은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과 유럽을 오가고, 딸은 런던에, 부모님과 형제는 루마니아에 있습니다. 비록 잠깐이라도 함께 할 때, 저는 완전히 중심을 되찾습니다.
마지막으로, 리더를 꿈꾸는 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안락한 영역을 벗어나는 용기입니다. 새로운 역할이나 낯선 장소, 다양한 도전을 경험할수록 리더십이 확장되지요. 또한 긍정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는 협업과 성장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어도 태도는 그럴 수 없죠.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지식과 기회를 넓히는 네트워크 역시 필수적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네트워크를 지식, 관점, 기회, 그리고 후원의 원천으로 구축하고 활용하는 거예요. 성공하는 여성들은 단지 유능한 것뿐 아니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도전하게 하고 성장시킬 멘토, 동료, 롤 모델을 적극적으로 찾으세요.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듯이, 삶과 커리어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강력한 지원 체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사적인 리추얼
안나-마리아 보이가 영감과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들.

추리소설 읽기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을 때는 추리소설에 푹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요 네스뵈Jo Nesbo의 작품을 즐겨 읽는데, 복잡한 스토리와 긴장감을 구현하는 능력에 늘 감탄한다. 특히 ‘해리 홀레Harry Hole’ 시리즈를 가장 애정한다. 최근에는 독립 소설인 <더 킹덤The Kingdom>을 막 시작했다.

딸과의 대화 이 의학 서적은 25년 전 내가 의학도일 때 사용한 교과서다.
최근 대학을 졸업하며 그 시절을 겪어낸 딸 이리나가 오늘날의 여성, 예술가, 사상가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삶에서 가장 큰 특권이었다. 부모로서 원하는 모습으로
그녀를 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공간과 신뢰,
자유를 주는 것을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선택했다.

©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발레 공연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 중 하나가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발레 공연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하나의 축제이자 전통이다. 그 무대에서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관람한 것이 정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 Stephan Rabold
클래식 음악 듣기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키릴 페트렌코의 지휘 아래 연주한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 54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슈만의 음악은 깊은 감정의 울림을 지니고 있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 부산시립미술관
미술관 산책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화 경험 중 하나는 부산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을 방문한 것이다. 철판, 큰 돌, 좁은 길, 회색 자갈로 구성된 설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걸어 들어가도록’ 초대하는 듯했다. 그의 예술은 단순한 미니멀리즘 미학을 넘어 더 넓은 문화적 성찰을 이끌어낸다.

뿌리에 대한 기억 루마니아 전통 블라우스인 ‘이에’는 루마니아 각 지역의 고유한 유산과 스타일을 담고 있다. 이브 생 로랑과 디올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오트 쿠튀르에도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그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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