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11월호

개인 취향의 설계학

롤스로이스는 럭셔리 카 제조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각 오너의 삶과 취향을 세밀하게 해석해 한 대의 자동차를 작품처럼 완성하고, 전동화를 통해 미래 럭셔리의 기준을 세워가고 있다. 여기에 프라이빗 오피스 확장과 정교해진 비스포크 문화로 고객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구현하며 브랜드의 변화를 견인하는 중이다. 그 중심에서 만난 아시아태평양 총괄 아이린 니케인과의 대화.

EDITOR 박이현

아이린 니케인 일본, 한국,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아시아태평 양 시장에서 롤스로이스 모터카 브랜드의 성장과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지 난 18년간 BMW 그룹 내 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MINI 일본의 브랜드 커뮤 니케이션 및 제품 기획을 총괄했고, BMW와 MINI 의 지역 마케팅 및 브랜드 체험 전략을 이끌었다.


팬텀 출시 100주년 외에 올해 롤스로이스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영국 굿우드 본사 증설 투자(3억 파운드, 약 5700억 원 투자), 전동화 가속, 비스포크 고도화일 거예요. 내부에서는 각각의 비중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아울러 고객이 피부로 느끼는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말씀하신 요소들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대상이 아닌,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하는 축입니다. 브랜드의 전체 전략 안에서 각자 역할을 수행하며 시너지를 내죠. 아시아태평양 클라이언트가 가장 크게 체감한 변화는 비스포크Bespoke(맞춤 제작) 경험의 확장입니다. 지난해 서울 잠실에 문을 연 ‘프라이빗 오피스 서울Private Office Seoul’은 단순한 차량 그 자체를 넘어, 고객 각자의 삶과 이야기가 정교한 비스포크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롤스로이스의 장인 정신도 한층 정밀해진 덕분에 매끄럽고 몰입감 있는 럭셔리 경험을 제공하고 있고요. 전동화 로드맵도 구체화됐습니다. 올봄 ‘블랙 배지 스펙터’를 공개하면서 기존 스펙터와 함께 두 가지 선택지를 마련했으니까요.


맞아요. 실제 블랙 배지 스펙터Black Badge Spectre를 시승해보니 퍼포먼스와 미학이 경쾌하고 날렵해졌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분들을 위한 롤스로이스의 강력한 또 다른 자아입니다. 자기 의사가 분명한 젊은 오너층과, 퍼포먼스와 존재감을 동시에 원하는 고객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죠. 블랙 배지 스펙터는 롤스로이스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고 불릴 만큼 성능이 뛰어나며(최고출력 659마력, 최대토크 약 109kg·m, 제로백 4.3초), 대담 한 블랙 디테일과 새로운 테크니컬 파이버 등 현대적 소재로 시각적 개성을 강화했어요.


영국 굿우드 본사 ‘홈 오브 롤스로이스’ 내 인테리어 트림 센터 가죽 파트에서 RR 모노그램 자수를 놓는 모습.


팬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에서 열린 클래식 카 및 콘셉트 카 전시회 <콩코르소 델레간차 빌라 데스테>에서 공개된, 단 한 대뿐인 비스포크 모델 ‘팬텀 골드핑거’.


팬텀 100주년과 관련한 이벤트 역시 활발히 진행됐습니다. 기념 모델 출시, 스토리 아카이빙, 아트워크 등을 테마로 한 활동이 젊은 초고액 자산가Ultra High Net Worth Individuals(UHNWI) 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다고 분석하시나요? 팬텀의 100주년은 한 세기 동안 진정한 럭셔리 문화의 진화를 비추는 순간입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과의 일화를 재조명하고, 문화 예술과의 접점을 넓혀 가치를 부각했죠. 그래서 팬텀을 소유하는 일은 단순한 자동차 구매에 그치지 않고, 한점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한 세기의 역사에 자신의 장을 보태 타임라인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롤스로이스의 정점이자 문화 예술의 아이콘인 팬텀은 소유하는 행위 자체가 탁월한 안목과 지위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해요. 이번 100주년은 젊은 고객에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컬렉터로서의 정체성을 환기시키며, 롤스로이스를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를 뛰어넘어 세대와 세대를 만나게 하고, 그들의 지위와 취향을 반영하는 상징적 창조물로 각인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굿우드, 두바이, 상하이, 뉴욕에 이은 다섯 번째 맞춤형 매장인 ‘프라이빗 오피스 서울’.


비스포크는 가족·여행·예술 취향 같은 개인의 내러티브를 자동차에 번역하는 과정입니다. 이를 소재와 공예 기법으로 구현할 때 세대별(기성 vs. 젊음) 초고액 자산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롤스로이스 고객을 세대로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저희 고객은 탁월한 감수성으로 세계 트렌드를 이끌어온 통찰력 있는 분들이에요. 목적은 같아도 자신의 스타일을 나타내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예전에는 가문의 문장, 고향의 색, 대대로 내려온 기법처럼 ‘이어짐’을 기리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 롤스로이스 자동차가 곧 헤리티지의 상징적 연대기로 작용했다는 뜻이에요. 반면 최근에는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의뢰가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24K 금박, 3D 마키트리, 레이저 에칭, 잉크 레이어링 등 전통 기법과 첨단 기술을 접목해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순간이나 주제를 재료와 패턴으로 담아내는 식이지요. 결국 비스포크는 유산을 비추던 자리에서 자기표현을 돕는 방향으로 스펙트럼이 넓어졌지만, ‘움직이는 캔버스’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최고의 품질로 풀어낸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프라이빗 오피스 네트워크가 본사와 현지 간 소통 시간을 단축하고 커미션 몰입도를 높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올해 초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이 채널을 통해 탄생한 차량이 평균 25%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서울을 포함한 각 프라이빗 오피스에서 확인된 정량·정성 지표(고객 체류 시간, 평균 커미션 규모 등)를 공유해주실 수 있을까요? 각 커미셔닝 과정은 유일무이하기에 세부적인 수치 공개는 어렵습니다. 다만 프라이빗 오피스 서울을 예로 들면, 이곳은 굿우드, 두바 이, 상하이, 뉴욕에 이은 다섯 번째 맞춤형 거점으로, 클라이언트 매니저와 굿우드 본사에서 파견된 디자이너가 상주해 고객과 본사의 소통을 더욱 긴밀하게 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이 공간은 평범한 장소가 아니라 영감을 교류하고 바랜드에 몰입하는 창조적 허브로 자리 잡아 비스포크 수요와 참여도를 눈에 띄게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리테일 공간은 ‘살롱’과 ‘스튜디오’ 형태로 진화 중인데요. 3D 비주얼과 실시간 시뮬레이션 같은 디지털 툴이 고객의 의사 결정 과정에 불러온 변화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롤스로이스는 비스포크 커미션 과정의 일부로 시각화 시뮬레이션을 제공해 고객이 소재·색상·디자인 조합을 직관적으로 가늠하고 자신의 비전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디지털이 기술과 체험에만 머무르지 않고, 영감을 북돋우는 보조 도구로 쓰인다는 점이에요. 핵심은 고객이 고요한 환경에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며 가죽의 결, 금속의 광택, 나무의 질감을 직접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고객이 머무는 환경 설계에 각별히 신경을 썼어요. 쇼룸에는 전용 비스포크 아틀리에를 마련해 다양한 소재를 탐색하고 조합할 수 있게 했고, 스피키지 바speakeasy bar를 운용해 휴식과 프라이빗한 모임을 지원합니다. 또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고객 간 유대를 형성하는 커뮤니티 역할도 수행하고요. 이와 더불어 프라이빗 오피스 서울에는 전시 차량 대신 편안한 소파, 다이닝 테이블, 키즈 플레이 룸을 갖춰 자동차를 판매하는 매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의견을 경청하고 공감하며 아이디어를 나누는 공간으로서 기능합니다.


영국 웨스트 서식스 17헥타르(약 5만 평) 부지에 자리 잡은 롤스로이스의 심장 ‘홈 오브 롤스로이스’.


홈 오브 롤스로이스의 어셈블리 라인.


롤스로이스 브랜드 역사상 가장 강력한 모델인 ‘블랙 배지 스펙터’.


다양한 지역을 이끄는 리더로서 본사 표준과 현지 자율성을 조율하는 본인만의 철학이 궁금합니다. 아시아에서 성장하면서 문화가 비즈니스 방식 자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저는 본사 표준을 우리의 DNA, 즉 타협할 수 없는 기준으로 보되 고객 환대와 커뮤니케이션, 파트너십에서는 문화적관련성과 개성을 더하도록 현지 팀에 권한을 부여해요. 제 역할은 ‘번역가’에 가깝습니다. 글로벌 차원에서 브랜드 자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로컬 시장에서 공명하도록 만들고, 본사에는 우리의 표준이 안전하게 지켜진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한편, 현지 팀에는 적절한 자율성으로 대응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지요. 결국 관건은 균형입니다. 롤스로이스의 글로벌 자산을 지키면서 로컬의 뉘앙스를 살려 고객과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높은 신뢰와 관련성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BMW 그룹 18년 근무 등의 사회적 경력이 아시아태평양 총괄 역할에 어떤 감각과 이해도를 제공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로벌 전략을 지역 실행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구축한 본인만의 프레임워크가 있나요? 제 프레임워크는 세 단계로 정리됩니다. 첫째, 경청하고 번역하기. 본사의 비전과 전략을 충분히 듣고 이를 아시아태평양의 현실(고객 기대, 딜러 역량, 시장 성숙도 등)에 맞게 해석합니다. 둘째, 진정성을 담은 현지화. 팀의 실행을 현지화하되 브랜드 DNA를 지켜 현지화가 정체성 희석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셋째, 피드백 루프. 지역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본사에 전달해 글로벌 전략이 실제 시장 정보와 변화에 따라 진화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사이클은 본사의 기대와 지역 실행을 맞추고 팀의 동기를 유지하며, 고객의 주도적 참여를 이끕니다. 이는 고정된틀은 아니지만 지속적 개선과 유연성으로 모두를 한 방향으로 이끄는 주요 장치죠. 이를 가능케 하는 건 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이고요.

목록으로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