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11월호

현실 경험을 증폭케 하는 이미지 '비주얼 아티스트 구기정'

자연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는 물리적 세계의 자연보다 디지털화된 자연을 더 많이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비주얼 아티스트 구기정의 작업은 이러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EDITOR 김민지 GUEST EDITOR 유승현 PHOTOGRAPHER 박나희


구기정 홍익대학교 조형대 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 과를 졸업했고, 스위스 로 잔 예술대학교(ECAL) 사진 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 진을 기반으로 비주얼 아트 를 탐구하며, 관람자의 체 험으로 확장되는 ‘경험 예 술’을 지향한다.


비주얼 아트를 근간으로 경험 예술을 지향하는 구기정의 작업은 매우 사소한 한 마디에서 출발했다. 스위스 유학 시절, 산속에서 자연광에 반사돼 조화처럼 번들거리는 잎사귀를 발견한 그는 실재하는 자연물임에도 “그래픽 같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어쩌면 우리 현대인은 실제보다 이미지화된 대상이나 경험에 더 익숙한 것은 아닐까. 그는 카메라를 들어 가까이의 자연을 찍기 시작했고, 실제보다 더 선명한 화질과 데이터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현실의 풍경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다. 사진은 눈보다 더 선명하게 세계를 포착하고, 디지털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현실감을 획득한다. 구기정은 고화질 카메라가 보여주는 미세한 디테일과 데이터 변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펌핑 효과를 활용해 자연을 낯설게 만든다. 실제보다 더 극적으로 부각된 화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재고하게 한다. 이러한 시도를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2021년 피크닉에서 열린 전시 <정원 만들기>에서였다. 그는 모니터 속 디지털 풍경과 실제 식물을 나란히 배치하고, 사운드와 영상을 얽어 다감각적 공간을 연출한 작품 ‘초과된 풍경’을 발표했다. 조경가와 사운드 아티스트의 협업을 통해 관람자는 ‘모니터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원에 들어온 듯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작가는 작업이 경험 예술로 확장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작가에게 이미지란 단순한 재현의 도구가 아니다. 사진, 스크린샷, 3D 스캔 모두 이미지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관람자의 인식 방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구기정은 “비주얼이란 단순히 보는 차원을 넘어 경험을 지속시키는 매개”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의 화면 속 풍경 역시 전시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관람자가 걸으며 체득하고,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잔상처럼 남을 때 작품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러한 태도는 기술 발전과도 맞닿아 있다. 2023년 그는 LG 디스플레이와 협업해 커브드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몰입감을 강화하는 곡면 구조는 단순한 출력장치가 아니라 관람 경험 자체를 변화시키는 매체였다. 그는 “기술의 진화는 곧 경험 예술의 확장”이라 설명하며 매체마다의 이미지 인식과 감각을 탐구하고 있다. 작가는 올 하반기 백남준아트센터를 비롯해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 대구사진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미디어 아트의 거장인 백남준 선생의 작품들 사이에 자신의 화면을 놓는 일은 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만 구기정은 스스로를 ‘미디어 아티스트’라 부르기보다, 비주얼 아트를 근간으로 관람자의 체험을 중시하는 ‘경험 예술가’로 소개하곤 한다. 특정 장르의 호칭보다 자신의 작업이 지향하는 맥락을 드러내는 데 더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최근 구기정은 일본 정원과 분재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위스의 대자연이 압도적인 스케일로 다가온다면, 일본의 정원은 인공미와 장인 정신이 응축된 세계다. 그는 이를 ‘좁은 담장 안에서 구축된 생태계’라 표현하며 자신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생태계와 닮아 있다고 본다. 이미지를 통해 자연을 원초성과 인공이 교차하는 장으로 재편하는 그의 시선 역시 한층 다층적으로 확장되지 않을까.


INSPIRATION IN LIFE

구기정 작가의 세계관을 만든 예술, 자연적 경험들



자비에 돌란 감독의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가족 간의 미묘한 관계성과 긴장을 화려한 장치 없이 드러내는 힘이 돋보이는 영화다. 관계의 복잡성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방식에서, 개인적 서사가 어떻게 보편적 감각으로 확장되는지를 배웠다. 작업에서 풍경을 다룰 때 작은 장면이 큰 울림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 영화에서 배웠다고.



Olafur Eliasson, , 2003, Tate Modern, London ⓒStudio Olafur Eliasson

인공의 태양과 안개가 만든 공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 같은 체험을 공유하는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작품 ‘The Weather Project’는 관람객이 직접 체험하고 감각하며 작품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체험형 예술은 작가의 지향점으로 늘 자리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은 보이지 않는 힘이 거대한 서사를 전복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이 영웅적으로 승리한다기보다 지구의 조건 자체가 상황을 뒤집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미지가 열어줄 다른 해석과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사운드를 적재적소에 설계하는 감독의 미덕도 특히 높이 본다.



USM 모듈 가구는 스위스 유학 시절 다니던 학교 공간을 가득 채우던 풍경이었다. 당시의 시스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에 돌아와 직접 구입했다. “그때 공부하던 감각을 계속 가지고 가고 싶었다”라는 고백처럼 일상 속에서도 작업의 맥락을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다.



중정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뒤, 야외에서 오래 앉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헤이HAY의 '팔리사드Palissade' 체어를 들였다. 비와 바람을 견디는 마감, 편안한 착석감 덕분에 작업과 휴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자리다.



소니 'α7C' 카메라와 매크로렌즈의 조합은 작고 가벼워 언제든 들고 나갈 수 있고, 눈보다 더 선명한 디테일을 포착해준다. 무거운 촬영 장비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지나가다 찍을 수 있어 작가의 리듬에 잘 맞는다.



대형 TV 디스플레이는 그에게 엔터테인먼트 기기가 아니라 확장된 캔버스다. 전시에서도 프로젝터 대신 TV를 주로 쓰며, 8K 화면이 보여주는 해상도와 ‘콘텐츠라는 생태계’를 작업으로 끌어온다. 심지어 75인치 TV가 들어가는 차를 고를 정도로 작업과 일상의 경계를 잇는 도구다.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은 시각보다 청각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 작품으로 기억한다. 풀벌레 소리를 직접 녹음해 삽입하는 등 디테일이 살아 있어, 화면 속 가상이 오히려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안겨준다. 이 충격이 이미지와 감각의 관계를 탐구하는 출발점 중 하나가 됐다.



시간이 날 때면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듣는다. 가사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목소리만으로 감정이 전달되는 경험을 전해주기 때문. 언어를 넘어서는 울림, 그 비언어적 감정의 선명함이 이미지가 경험을 지속시키는 방식과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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