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으로서의 성장
나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예술, 패션, 뷰티, 럭셔리 업계를 넘나들며 일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여성들이 주축이 된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다. 대표로서 또래 여성 팀원 20명을 이끌며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반대로 국제적 기업의 막내로서 수많은 여자 선배들 사이에서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 속에는 언제나 빛과 그림자가 공존했다. 흔히 ‘여적여女敵女’라는 말로 회자되는 여성 간의 관계는, 유리처럼 섬세하고 때로는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질투와 경쟁심, 실망을 경험한 순간도 많았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막연히 존경했던 선배의 시기, 생각보다 좁은 마음의 그릇에 대한 실망까지. 한때는 그런 환경을 벗어나고자 ‘테스토스테론’이 가득한 금융권에 몸을 담은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인생과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마다 나를 밀어주고 이끌어준 것은 언제나 여성들이었다. 강단 있고 따 뜻한 선배들, 자신감 넘치고 주체적인 동료들 덕분에 우리는 함께 성장했고, 여러 마일스톤을 세우며 단단해질 수 있었다. 결국 나를 만들어준 것은 ‘여자의 힘’이었다.

핑크리본모나코
갈라에서 프린세스
그레이스 병원의 유방암
치료 연구와 임상 시험에
기증되는 기금 모금을 위해
열린 경매에 직접 경매사로
참여했다. 여성 암 환우의
가족 경험을 공유하고,
경매 아이템으로 기부된
여성 작가의 예술 작품을
소개하며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
보람된 행사였다.
드레스는 르블랑.
주얼리는 쇼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럭셔리.”
꽃이 아닌, 빛으로 살아남기
일을 하다 보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종종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곤 한다. 공과 사의 경계가 흐려지고, 그 틈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럴 때마다 커리어 우먼으로서 나의 롤 모델인 엄마의 조언을 떠올렸다. “남자들과 일할 때는 그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마. 너의 반짝임을 꺾어보고 싶은 꽃처럼 대하는 태도에 상처받거나, 그걸 내면화하지도 마. 그 안에서 네가 더 당당하고 유연해야 해. 하지만 진짜 일을 잘해내고 싶다면, 여자들의 여자가 되어야 해.” 그 말은 어느 순간부터 나의 본능적인 생존의 좌표가 되었고, 이제는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일이 진전되지 않고 막힐 때의 답답함 속에서 그리고 남녀 간 누가 우위에 있는지를 가늠하려는 자존의 힘겨루기 속에서, 여성들과의 협업은 놀라울 만큼 쿨하고, 명확하며, 직관적이었다. 서로의 역할이 분명했고, 감정의 교감 위에 신뢰가 쌓였다. 여성의 직감과 공감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남성 중심의 구조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참석자들과 함께한 테이블에는 유럽 각지에서 이번 행사를 위해 날아온 친구들이 자리했다. 왼쪽부터 프랑스 사교계의 친한 친구인 클라라 마르즐로프Clara Marzloff, 뒤제스 공작 샤를 드 크뤼솔Charles de Crussol d’Uzès, 율랄리아 드 오를레앙 부르봉Eulalia de Orleans Bourbon 공주. 모두가 뜻을 함께하며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여성성은 나의 갑옷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이념적으로 페미니즘 이나 성평등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다. 여성과 남성의 본질적인 다름을 인 정하며, 그것을 결핍이 아닌 서로의 역할로 받아들일 때, 가장 이상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에너지이자 생명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멋진 여성의 ‘하이 페미닌 에너지High Feminine Energy’는 남 성적인 테일러링 슈트를 입는 순간보다, 높은 구두를 신고 피 부와 머릿결을 가꾸며 몸의 실루엣과 존재를 자신 있게 표현 할 때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화장을 하고 주얼리를 착용하며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는 행위는 단순한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향유하는 선언으로 여겨진다. 여성성을 ‘주체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자기 결정권empowerment이며, 그것은 섹시함이나 미적 기 준을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변화시킨다. 다양한 형태의 ‘소프트 파워’가 세상을 움직이는 오늘날, 여성성은 그 자체로 강력한 아머armour, 즉 가장 아름 다운 갑옷이 아닐까. 드레스와 주얼리, 그리고 자신감으로 무 장한 여성은 그 존재 자체로 힘을 상징하며, 이것이 바로 여성 성이 가진 럭셔리라 생각한다.

드라마 <섹스 &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아이코닉하게 신었던 마놀로 블라닉의 ‘행이시Hangisi’ 시리즈를 여러 컬러로 소장하고 있다. 그녀처럼 패션에 열정적이고, 자신의 칼럼을 통해 여성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캐릭터에 자연스레 이입되다 보니, 럭셔리 에디터로서 오버랩이 되며 마놀로의 슈즈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실루엣을 좋아해 다양한 하이힐을 수집한다. 드레스는 레페토. 슈즈는 마놀로 블라닉.

‘조세핀 아그레뜨 임페리얼’ 하이주얼리 네크리스와
‘조세핀 수와르 드 페트’ 하이주얼리 이어링 모두 쇼메.

“쇼메는 나에게 첫사랑 같은 브랜드다. 프랑스 왕실의 강력한 헤리티지를 지닌 로열 블러드 하우스로서, 어린 시절 공주같은 여성스러움을 좋아하던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그 가치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쇼메의 티아라는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을 지닌다.” 화이트 골드에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조세핀 아그레뜨 임페리얼 디아뎀’ 티아라, ‘조세핀 아그레뜨’ 링, ‘조세핀 아그레뜨’ 이어링, 2개를 레이어드한 ‘조세핀 롱드 다그레트’ 네크리스 모두 쇼메. 옐로 드레스는 르블랑.
공감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끈

여성들의 연대는 가치의 공유에서 비롯된다. 그 연결이 때로는 가볍고, 때로는 진하며, 언제나 깊은 이해와 공감 위에 놓여 있다. 특히 여성의 건강과 생명, 존재와 관련된 주제는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삶의 다양한 희로애락 속에서 누구도 갑작스러운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특히 여성 질환과 암은 존재의 근간을 흔드는 깊은 아픔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여성 건강’을 하나의 공통 언어로 생각한다. 그것은 세대를 넘어 모든 여성을 연결하는 가장 단단한 끈이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딸, 친구이자 동료로서, 여성 건강은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을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존재한다. 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감과 생존의 감각으로 서로를 단단히 묶는다. 이 공감과 연대의 흐름 속에서 여성들은 내면의 상처와 외적인 아픔을 함께 치유하며, 서로를 북돋우고 나아가며 더욱 강해진다. 건강한 관계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응원과 손길을 통해 형성되며, 이는 여성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을 단단하게 만든다.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 안에서 우리 모두는 ‘행동의 부름Call to Action’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서로를 지지하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의미 있는 선택이다.

이정은, ‘자개화훼도’, 2025
예술계에 첫발을 디뎠을 때부터, 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컬렉팅하는 데 깊은 열정을 품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류 아트 시장에서 여성 작가의 점유율은 남성 작가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 지점은 우리가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서로를 지지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경우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본능적으로 생명력과 따뜻함,
유기적이고 공감력 높은 결을 담고 있다. 그런 작품들은 공간 속에서
차갑거나 딱딱하지 않은, 섬세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앞으로도 나는 여성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이야기하며 성장해가는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 핑크빛 행사를
위해 분홍색으로 특별히 제작된 이정은 작가의 ‘자개화훼도’.

드레스는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벨트는 알라이아.
실제로 가장 좋아하거나 즐겨 입는 브랜드나 컬렉션을 물을 때, 나는 여성 디자이너 또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찬사로 풀어낸 브랜드의 옷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을 단순히 ‘대상’이나 ‘옷걸이’, 혹은 ‘작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닌, 여성이 진정 원하는 것을 담아낸 시선에서 탄생한 디자인은 내 마음속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낸다. 최근 여러 브랜드의 컬렉션을 보면, 여성적 욕망이나 신체에 대한 주체적 관점보다는, 디자이너 자신의 캐릭터와 비전을 여성의 몸 위에 얹은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옷을 입는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가장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 것에 가치를 둔다. 한 시즌이 지나면 유행이 사라질 옷보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을 찾아가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

핑크리본모나코 나타샤
프로스트-사비오 회장(왼쪽),
여성 암 권위자인
비르깃 쇼이어 니로 박사와
갈라의 포토 월에서 함께.
아끼는 동생인 모나코 출신의 율랄리아 드 오를레앙 부르봉 공주와 함께.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재학 중인 그녀는 핑크리본 갈라 디너와 행사를 위해 모나코까지 날아왔다.

유스라 니샨Youssra Nichane (아래)은 모로코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인연을 맺은 오랜 친구다. 북아프리카의 독특한 문화권인 모로코의 화려한 장식 전통과 장인 정신을 계승한 주얼리 브랜드를 운영하며, 이번 핑크빛 행사에 어울리는 원석 목걸이를 선물해주었다. 그녀 역시 이 자리를 함께하기 위해 런던에서 찾아왔다.

비르깃 쇼이어 니로 박사는 파리에서 활동하는 유방암 및 여성 암 전문의로, 탁월한 패션 감각까지 겸비한 다방면의 롤 모델 같은 인물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세대와 문화를 잇는 교류 속에서 그녀와의 만남이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키르기스스탄 출신으로 모나코가 맺어준 지인이자 여성 투자자인 아이다 타키르바셰바Aida Takyrbasheva(오른쪽)는 어머니와 함께 앰배서더 취임 행사 및 환영식에 참석했다. 모나코 여성 투자자 모임에서 인연을 맺은 그녀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모녀의 참여는 이 뜻깊은 행사에서 한층 따뜻한 빛을 발했다.
지난 10월, 여성 건강의 달을 맞아 모나코에서 열린 핑크리본 갈라Pink Ribbon Monaco Gala는 여성 연대의 상징적인 순간이었
다. 파리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이자 호주 출신의 파워 여성인 홀리의 소개로, 재단의 회장 나타샤를 만났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커뮤니티에 젊은 세대의 국제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세요.”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꼭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수개월간 행사를 준비하며 수많은 도전과 변수를 마주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공감과 신뢰로 행사를 실현해냈고, 그 여정 속에서 다시 한번 확신했다. 같은 여성으로서 서로를 아껴 줄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함께할 때 더 단단해지고, 더 강해진다. 진정한 럭셔리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희소성에 있는 것이 아닌 ‘가치 있는
것을 지키는 힘’이다. 그리고 여성의 삶에서 그 힘은 여성적 경험과 연대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고 빛나게 할 때, 여성
성은 가장 찬란한 형태의 럭셔리가 된다.
HAIR 김승원 MAKEUP 홍현정 ASSISTANT 김채현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