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인생살이를 각기 다른 형태로 엮이고 풀어지는 매듭을 통해 표현한
리슨커뮤니케이션 × 최민정의 ‘꽃 같은 실들의 잔치’, 사진 제공: 김재윤
조선 시대 여인에게 바느질은 부덕婦德, 용모, 말씨, 길쌈과 더불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범절이자 덕목이었다. 여자아이는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나 침모에게 바느질을 배웠다. 실을 뽑고, 베를 짜고, 천을 손질하는 일은 소녀에서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로 여겨졌다. 부모는 딸을 낳으면 실패를 장난감처럼 쥐여주고, 혼기를 앞둔 처녀는 백수白壽 골무를 만들었다. 그렇게 조선의 여인들은 규중칠우(바늘, 실, 골무, 인두, 바늘꽂이, 가위, 자)를 품에 두고 생활 속 창작자로 살아갔다. 공예는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을 아름답고 쓸모 있게 만드는 일이다. 처음에는 실용적인 물건을 만들다가 자연스럽게 자신과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예술품을 만들게 됐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소망을 담기도 했다. 자투리 천으로 기하학적이고 창의적인 패턴에 멋스러움까지 더한 조각보, 천연 염색으로 은은한 색을 드러내며 운치를 더하는 발, 다양한 색상의 끈을 맺고 죄어 앞뒤와 좌우의 대칭을 이루는 전통 매듭 등. 규방 공예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일상과 아름다움, 그리고 공동체적 삶의 결을 드러내는 독특한 한국 전통 공예 장르다.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 속 길쌈 장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규방은 여성만의 안방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엄격한 유교 질서 속에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철저히 제한되던 시대, 여성들은 규방에 모여 자신의 정체성을 기록했고, 혼인과 출산, 가족의 의례와 공동체 형성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손수 가족의 옷과 생활 도구를 만들고, 수를 놓아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특별한 날에는 솜씨 좋은 아낙들이 모여 혼수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닫힌 공간처럼 보이는 이 규방은 여성 공동체의 창의성과 생명력을 퍼뜨리는 배경이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한국 특유의 섬세한 미와 따뜻한 생활 미학이 탄생했다. 손으로 짠 옷과 보자기, 조각보, 바늘집, 주머니, 골무 등은 생활 도구를 넘어 개인의 소망과 가족을 위한 바람, 여성 고유의 감수성이 함께 깃든 작은 우주였던 것이다. 규방의 바느질은 기술이자 미덕이었고, 실용성과 장식성이 공존하는 생활예술이었다. 닫힌 방에서 피어난 삶의 미학은 지금도 많은 이에게 창의와 치유, 정성과 감성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운다. 현대에 와서 규방 공예는 창의적인 색채 조합과 디자인, 실용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생활 공예로 재해석된다. 더 이상 여성에게만 머물지 않으며, 천연재료와 친환경 소재, 수공예의 가치 등 오늘날 우리 삶에 맞춰 다양하게 재현되고 있다.
좌) 라벤더의 색감을 담은 매듭 장식
‘Lavender Ornament’. 우) 전통 짜임을 휴대할 수 있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다회치기’.
실로 엮어내는 선율, 최민정
전통 매듭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각을
더해 누구나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공
예를 연구한다. 전통 매듭의 구조적 아
름다움과 상징성을 존중하면서도 현대
적 디자인과 접목해 장신구, 오브제, 생
활 소품 등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고 있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최민정 작가는 손끝으로 표현하는 섬세한 움직임에 매료되어
매듭 공예를 시작했다. 춤이 몸으로 그리는 선율이라면, 매듭
은 실로 엮어내는 선율인 셈. 실 한 올 한 올을 엮어 형태를 이
루듯, 사람의 삶과 마음도 그 안에 담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고. 그의 작품은 전통 매듭의 정형미를 살리되, 현대적 감각을
더한 것이 특징. 미니멀한 디자인에 실험적인 색감과 다른 소
재의 융합을 시도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준다.
좌) 자연의 색과 소재를 담은 ‘문방기명보’. 우) 은은한 자연의 색이 드러나는 천연 염색
‘매화 노리개’와 ‘노리개보’.
자연 재료의 본질, 김경희
할머니는 전통 방식의 명주와 삼베 짜기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늘 바느질을 했다.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했던 김경희 작가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전통 자수와 한복, 염색, 매듭을 배웠다. 이후 전국 각지의 장인을 찾아가 무명 베 짜기, 쪽 염색, 전통 자수 등을 익혔다. 그 다음에는 직접 염료 식물을 재배하고, 천과 실을 염색해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만들었다. 현재는 시골로 거처를 옮겨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 만든 작품이 화려한 컬러와 값비싼 재료, 복잡한 기교가 넘쳐났다면, 요즘 작품은 삼베나 모시의 심심한 자연의 색을 살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다. 재료를 꿰매고, 잇고, 감치는 작업은 여전히 자발적 고립의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료의 본질을 연구하며 전통과 현재가 미래에 어떤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지를 탐구 중이다.
잣나무 열매 모양을 형상화한 ‘잣씨공’ 시리즈.
염원을 담은 오브제의 부활, 김옥희
칠보 무늬를 입체적으로 만든 공예품인 칠보공은 목화솜과 쌀겨로 채워진다. 목화솜은 자손 번창과 풍요로움을, 쌀겨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넉넉한 식복을 의미한다. 무병장수, 자손 번창, 부귀영화의 염원이 담긴 칠보공은 과거 시집가는 여식의 꽃가마에 넣어주던 물건이기도 하다. 김옥희 작가는 이 칠보공을 역사 속에서 꺼내 규방 및 민속공예적 의미를 연구한다.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공예품을 연구하다 탄생한 것이 잣씨공. 전통 바느질 장식 기법인 잣씨 접기, 잣씨 끼우기, 잣씨 물림 방법으로 만든 잣씨공은 자투리 천을 접어 천과 천 사이에 끼워 넣거나 연달아 붙여 잣나무 열매 모양을 형상화했다. 바느질장이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 셋이 모두 바느질과 염색, 규방 공예를 하고 있다.
좌) 자연을 닮은 오브제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우) 김현정 작가가 바느질할 때 사용하는 반짇고리 오브제.
바늘로 엮은 일상의 이야기, 김현정
전통 바느질 기법을 토대로 일상 속 사물을 직물과 실로 구현하는 침선 작가. 한복과 복주머니부터 공연 의상과 소품까지 다양한 영역과 장르를 넘나든다. 직접 염색한 조각 천을 조합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바느질하면 팔자가 세진다”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면이 입체가 되는 과정, 여러 가지 색이 모여 세상에 하나뿐인 색 조합을 만들어 내는 신비로운 과정이 즐거워 스무 살 무렵부터 바느질을 시작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물건이 만들어지고 작업 과정에 생긴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들이 모여 유일무이한 작품이 된다고 믿는다. 작은 것들이 모여 가치 있는 것을 탄생시킨다는 의미의 공간 ‘미티테이즈’를 운영 중이다.
좌) 무명에 자수를 놓아 완성한 테이블 웨어. 우) 손으로 수놓은 무명 누비 자수 패드.
대를 이어 이불 짓는 모자, 우영미 & 이건우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침구’를 만드는 우영미 작가. 소박한 소재라 인식되는 무명을 단아한 소재로 바꾸고 싶어 이불에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첫째 아들 이건우 디자이너는 자수와 공예에 개인의 이야기를 담아 어머니의 작업을 확장하는데, 전통 자수 속 꽃문양에 회화적 요소를 더해 개인의 삶과 바람을 불어넣는다. 우영미 작가와 이건우 디자이너는 조선 시대 아녀자들의 방을 의미하는 규방, 나라의 대소사를 집행하는 관청을 의미하는 도감에서 이름을 딴 ‘규방도감’과 식문화 공간 ‘규방도감 집’을 함께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