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rakami Takashi, ‘Summer Vacation Flowers under the Golden Sky’, 2025,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 2025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미술관 전시와 갤러리 전시는 차별화된 맥락을 갖습니다. 미술관 전시는 입구부터 출구까지 연결되는 서사가 중요합니다. 영화나 소설의 기승전결 구조처럼요. 반면 갤러리는 관객이 개별 작품에 집중해야 하기에 하나의 작품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도록 고민합니다. 특히 가고시안과 함께 APMA 캐비닛에서 선보이는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Seoul, Kawaii Summer Vacation>은 아트페어 일정에 맞춰 개최되는 전시인 만큼 갤러리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는데요. 많은 이에게 친숙하면서 꾸준히 사랑받는 꽃 작품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원색의 회화와 입체 작품이 팝 에너지를 발산했던 삼성미술관 플라토의 <수퍼플랫 원더랜드>(2013), 해골과 좀비 모티프로 어둡고 묵직한 정서를 펼친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좀비>(2023)를 거쳐, 현재 개인전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을 진행 중인 무라카미 다카시에게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의 차이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담백했다. 슈퍼스타에게 흔히기대하는, 혹은 실제로 자주 듣는 것은 미사여구나 거대한 기 서사 아니던가. 그러나 흥미롭게도 작가는 각 전시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분명 답변은 간단했는데, 그러한 간단함이 되레 인물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하더라. 금박과 웃는 꽃, 수십 미터의 대작으로 현대미술계를 사로잡은 작가가 이토록 전시 조건을 솔직히 짚다니···. 순간 두 귀를 의심했지만, 이내 존경 섞인 미소가 번졌다.
무라카미 다카시 전통 회 화의 평면성과 금박 장식 위에 만화·애니메이션·오 타쿠 문화, 가와이이 감성 을 결합해 ‘슈퍼플랫’ 개념 을 제시한 작가. 이를 통해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소비사회 와 동시대 일본 정서를 비 판적으로 반영한다. 반복 적 캐릭터 도상, 화려한 색 채, 장식적 금박 화면 등으 로 대표되는 그는 귀여움 과 불안, 희극과 비극을 한 화면에 병치하는 독창적 언어를 선보여왔다.
슈퍼플랫과 웃는 꽃의 탄생
인터뷰를 하는 동안 무라카미 다카시의 화려한 표면과 담백한 언어 사이에 묘한 간극이 있음을, 그리고 그 틈에서 작업이 시작됨을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유년 시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졌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작가가 걸어온 학문의 길은 전통과 정통을 오간다. 그는 니혼가日本画(일본화)를 전공하며 전통 회화의 평면성, 금박 장식, 엄격한 구도를 익혔다. 당시 니혼가의 기법이 치밀하나 동시대 언어와는 거리가 있음을 깨달은 무라카미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오타쿠 문화, ‘귀여움’을 뜻하는 가와이이kawaii 감성 등을 니혼가 문법 위에 얹기로 결심했다고. 이때 제시한 개념이 ‘슈퍼플랫Superflat’으로, 평평한 이미지를 통해 일본 사회의 천박한 소비문화와 무분별한 서구화 등을 비판하고,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의미가 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소셜 미디어에 빠진 현대인을 보면 슈퍼플랫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평한 공간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제가 미래를 예측한 것 같아 만족스러운 측면이 있는데, 슈퍼플랫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무라카미 다카시를 대표하는 도상은 단연 ‘웃는 꽃’이다. 1995년에 등장한 웃는 꽃은 원색의 꽃잎과 둥근 얼굴, 환한 미소가 끝없이 반복돼 귀엽고 경쾌한 첫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반복은 취향의 강박과 소비의 속도를 비춘다. ‘Flower Ball’ 시리즈를 예로 들면, 꽃은 화면을 가득 메워 하나의 구를 이룬다. 가까이 보면 독립적이나, 멀리 보면 하나의 집합으로 인식된다. 가까움과 멀어짐, 단일성과 집합성을 보노라면, 슈퍼플랫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웃는 꽃이 자아내는 감각은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 전시에서도 이어진다. ‘Summer Vacation Flowers under the Golden Sky’(2025)는 해골 문양이 양각된 금박 화면 위로 만개한 꽃들이 펼쳐져 있으며, ‘Tachiaoi-zu’(2025)는 린파(에도 시대의 회화 양식. 주로 자연을 단순화하고 패턴화해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다) 화풍의 화가이자 디자이너 오가타 고린Ogata Korin(1658~1716)이 금박 바탕에 붉은색, 분홍색, 흰색의 접시꽃을 그린 ‘국화도’ 병풍을 무라카미 특유의 시선으로 재해석했다. 또 꽃 얼굴의 작은 인물 형상 두 개로 이뤄진 조각 작품 ‘Hello Flowerian’(2024)은 각각 선명한 무지개색과 반짝이는 금박으로 마감했다. 이들은 명랑한 외양을 지녔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묘사된 캐릭터는 전후 일본이 겪은 경제적·사회적·심리적 불확실성을 향한 작가의 다면적 시각을 담고 있다.“ ‘Summer Vacation Flowers under the Golden Sky’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눈길을 옮겨가며 자신만의 리듬을 직조해보세요. ‘Tachiaoi-zu’는 재현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 윤곽을 다채로운 색으로 나눴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모든 꽃에 얼굴을 넣는 설정은 그대로 유지했어요. 현대미술에서는 ‘자아의 표현’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꽃마다 표정을 부여했습니다. 제 캐릭터를 직접 작품 속에 삽입하기도 했고요. 귀여운 세계 속에서 저의 자아가 드러나는 것이죠.”
‘Superflat Shangri-La Square’(2025) 앞에 서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
“화려한 표면으로 관객을 매혹시키지만, 작품 속에는 소비문화가 지닌 불안과 아이러니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남들이 듣기 좋아할 말보다 솔직한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관객이 제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오고, 작품을 오래 지켜보며 응원해준다고 믿습니다.”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 전시 전경. Photo: JJeon Byung Cheol,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 2025 Takashi Murakami/Kaikai Kiki
충돌과 교차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작가에게 변곡점으로 다가왔다. 이전의 밝고 경쾌한 아이콘이 죽음과 영성의 이미지로 전환된것. 예로, 길이 100m에 이르는 ‘The 500 Arhats’(2012)은 불교의 성인들을 대규모로 그려낸 작품으로 일본 사회가 겪은 집단적 슬픔에 대한 응답이자 작가 자신이 찾은 위안의 길이었다. 밝은 채색과 장식성 위에 무상과 불안을 포개어놓은이 작품은 꽃과 해골,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담아내며 작가 세계의 한 축을 재정의했다. 재난 이후 그는 상반된 모티프들을 한 화면에 병치하고 서로 교배하는 전략으로 작업을 전개했는데, 무라카미는 이를 유전학에서 차용한 개념인 ‘백크로싱 Backcrossing’에 빗댄다. 서로 다른 종의 특성을 반복적으로 교차해 원하는 형질을 얻듯, 작품에서도 이질적 요소가 충돌하고 정제되며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다는 의미.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전에서도 백크로싱은 명확하게 부각된다. 무라카미는 큰 꽃 안에 작은 꽃을 층층이 배치하고, 금박과 색채의 대비로 부분과 전체가 맞물리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Utagawa Hiroshige의 판화를 연구하며 에도 시대 풍속화 우키요에의 핵심이 보는 이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데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주요 부분만 강조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 관객이 작품 안으로 점프(몰입)하게 하는 형식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지닌 즉시성과 맞닿아 있다. 이번 전시 역시 관객이 단순히 작품을 바라보는 차원을 넘어, 화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하도록 설계했다. 여기에는 높은 층고,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 전면 유리 파사드 등 APMA 캐비닛의 건축적 조건을 끌어들인 것도 한몫할 터.
Takashi Murakami, ‘Tachiaoi-zu’, 2025, Courtesy the artist and Gagosian, © 2025 Takashi Murakami/Kaikai Kiki Co., Ltd. All Rights Reserved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이 정면만 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옆과 뒤까지 시야가 트이는 것을 의도했습니다. 정문을 통과하면 신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이어 양옆에 배치한
꽃 연작들이 포착됩니다. 덕분에 공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거예요. 이는 관객이 지루할 틈 없이 여러 경로로 작품을 즐길 수 있게 고려한 결과물입니다.”
화면의 점프 구도는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의 스케일로도 확장된다. 전시장 속 작품들의 형식적 특성은 빛이나 동선과 맞물리며 변화무쌍한 표정을 빚는다. 정오의 강한 햇빛은 금박 표면을 날카롭게 반짝이게 하고, 해 질 무렵의 부드러운 광선은 질감을 은은하게 번지게 하며, 입구에서 좌우·후면으로 이어지는 배치는 전시장을 하나의 파노라마로 읽히게 한다. 즉 큰 꽃
속에 겹쳐진 작은 꽃, 밝음과 불안, 대중성과 전통이 하나의 집합 이미지로 응축된 까닭에 무라카미가 말한 ‘갤러리적 솔직함’이 가장 물리적인 방식으로 확인된다는 의미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솔직함’은 고백이 아니라 태도다. <서울, 귀여운 여름 방학>이라는 전시 제목은 가볍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는 관객과의 접점을 고민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반짝이는 표면은 공허하지 않다. 전통과 대중, 쾌락과 불안, 희극과 비극이 한 화면에 중첩되며, 웃는 꽃의 미소는 시대의 불안을 비춘다. 금박의 화려한 반짝임 속에서 무상의 그림자는 얇게 드리워지고, 서울 한가운데서 이중성은 다시 한 번 또렷하게 나타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꾸밈을 배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30년 넘게 서바이벌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버텨야 한다는 자각 속에서 채널을 넓히며 관객과 거리를좁히려는 태도. 듣기 좋은 말 대신 있는 그대로 말하는 편이 오히려 지지와 응원을 끌어낸다는 그의 믿음은 이번 전시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작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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