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 페주 2021년부터
에르메스 재단을 이끌어
온 디렉터로 CSR 활동을
총괄하고 있다. 교육과 공
공 정책 전문가로서 파리
국립 오페라 교육 프로그
램과 예술 행정 분야에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 중인 전시 <두 번째 삶>(~10월 5일)에 참여한
박민하의 ‘Ghost Anatomy’(2025),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
‘우리의 행동은 우리를 정의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준다’가 에르메스 재단의 기본 신념이에요. 디렉터님께 제스처란 행위 그 이상일 테지요?
제스처는 제 커리어 전반을 꿰뚫는 개념입니다. 늘 제 곁에 있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니까요. 에르메스 재단이 말하는 제스처는 단순한 신체 동작이 아니라, 어떤 대상을 향해 의도적으로 다가가는 행위에 가까워요. 그 대상이 명분일 수도, 재단이 지원하는 수혜자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움직임 이면에는 언제나 ‘연대’라는 가치가 자리합니다. 저는 공공 정책 관리 분야 전문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스포츠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어요. 덕분에 제 안에는 스포츠인의 경쟁적인 몸짓과 무용수의 시적·표현적 몸짓이 공존합니다. 사람은 하나의 몸과 제스처에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다양한 몸짓과 신체 감각을 가질 때 감각을 자극하는 표현도, 의미를 담아내는 예술적 표현도 확장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제스처의 진정한 범위예요.
말씀하신 제스처는 에르메스 재단의 어떤 활동과 연결되나요?
감각적 제스처는 재단의 교육 활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장인 정신과 기술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는 ‘매뉴팩토Manufacto’ 프로그램에서는 재료의 질감, 도구의 무게, 제작 과정에서의 미세한 손놀림 등을 직접 체험하며 창작 감각을 일깨울 수 있습니다. 예술적 제스처를 북돋우는 활동 역시 중요한 축이에요. 프랑스에서 공연 예술을 지원하는 ‘트랜스폼Transforme’ 프로그램과 한국 현대미술 작가를 지원하는 전시 프로그램이 대표적이지요. 저는 장인 정신 전수, 창작 지원, 환경보호 등 재단의 모든 활동이 ‘연대’라는 가치를 근간 삼아 서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재단을 운영하며 디렉터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두 가지를 원칙으로 삼습니다. 첫째는 사회가 요구하는 지점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타당한 명분이 담겨야 합니다. 둘째는 이러한 과제를 실현할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는 일이에요. 뛰어난 전문성과 실행력을 갖춘 이들과 동행할 때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고 실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단의 활동은 결코 한 조직이 단독으로 완수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주체와 협력하며 진행해야 해요. 그래서 에르메스의 사회 공헌 사업도 늘 집단의 논의와 참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위의 내용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2000년대 초 에르메스 코리아가 한국 현대미술계에 절실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본사에 제안하며 기획된 ‘한국 현대미술가 지원 프로그램Hermès Foundation Missulsang’입니다. 당시 한국은 역동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젊은 작가들은 뛰어난 역량과 가능성이 있음에도 안정적으로 창작을 이어가기 어려웠는데요. 이에 공감한 장-루이 뒤마 회장은 필요성이 분명한 만큼 한국 젊은 예술가의 지속적인 성장을 돕고자 미술상 제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2006년에는 도산대로에 작가들의 신작을 후원하는 전시 공간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오랫동안 지켜본 디렉터님이 꼽는 한국 현대미술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한국 현대미술은 활발하고 풍성하며, 관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점은 작품들이 사회참여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고,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관객에게 다가간다는 것이에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안소연 아티스틱 디렉터가 기획한 전시만 봐도 분명합니다. 심도 있는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긴요한 사회적 의제를 다루며, 소비사회를 향한 비판적 시선까지 담아내잖아요.
시각예술가를 에르메스 공방에 초대해 장인들의 기술과 노하우를
탐구하게 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 © Tadzio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전시가 브랜드 이미지와 상충할 수도 있는 것이 우려되지 않나요?
전혀요. 에르메스는 ‘창작의 자유’를 중시합니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지요. 프랑스가 자유를 존중하는 국가지만, 그 안에서도 에르메스는 예술 표현의 자율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현대미술을 후원할 때도 같은 철학을 적용해 심사 과정에서 어떤 제한이나 필터링도 하지 않아요. 오히려 색다른 표현과 대담한 시도를 펼치는 창작자를 발굴해 지원합니다. 무엇보다 사회참여적 색채가 뚜렷한 한국 현대미술을 보면, 이런 흐름에는 더욱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위 질문의 연장선인데요. 서울·도쿄·브뤼셀에서 갤러리를 운영 중이시죠.
서울, 도쿄, 브뤼셀에 자리한 현대미술 갤러리는 각자 독자성을 추구하며 지역의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을 해왔는데, 좀 더 서로 간의 교류를 확대하고자 2년 전부터 세 도시의 큐레이터를 한자리에 초청하는 세미나를 기획했습니다. 첫 자리에서 각자의 전시 철학과 운영 방식을 공유하면서, 재단 활동에 ‘대화’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꼈어요. 이를 통해 국가별 현대미술의 뚜렷한 기질을 확인했으니까요. 그중 일본 큐레이터가 자국 현대미술을 미적 완성도가 높은 ‘아름다운 정원’에 빗댄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세미나는 재단이 작가와 큐레이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됐고, 각 큐레이터에게는 타국의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미래 세대에 지속 가능한 지구를 물려주기 위해 기획한 ‘생물 다양성 & 생태계’ 프로그램. © Intelligence Verte
비슷한 맥락으로 2024년 출범한 ‘라티튜드Latitudes’는 사진으로 세계 곳곳의 사회와 문화를 담아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첫 무대를 코트디부아르로 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라티튜드는 2014년에 시작한 미국·프랑스 사진작가 교환 프로그램 ‘이머전Immersion’을 기반으로 발전시킨 신규 프로젝트예요. 매년 국제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된 지역의 사진가를 선정해 창작 활동을 지원합니다. 첫 대상지 선정에는 사진계의 지원 격차가 기준이었습니다. 여러 후보국을 검토한 끝에 코트디부아르가 보다 성숙한 창작 기반과 활발한 사진 생태계를 보유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첫 주인공은 프랑스계 코트디부아르 사진작가 프랑수아-자비에 그브레François-Xavier Gbré입니다. 그는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과 부르키나파소의 와가두구 사이의 철도 노선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데요. 결과물은 책 출간과 파리 및 뉴욕에서의 전시로 소개될 예정입니다.
‘국제적 시야’와 ‘로컬의 깊이’가 충돌했을 것 같아요.
아무리 세계 무대에서 주목할 만한 잠재력이 있더라도 현지에 최소한의 창작 환경과 실행 구조가 없다면 지원은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코트디부아르는 사진 기관과 인프라, 그리고 긴밀히 협력할 현지 파트너가 활동하고 있어 프로젝트를 추진할 발판이 마련돼 있었어요.
사회적 메시지’가 계속 여운에 남는 대답이에요. 디렉터님은 동시대적 주제를 다루는 예술 작품을 보면,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드나요?
예술은 개인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에서 나아가 사회 전반에 파동을 일으킬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이든 프랑스든 문화와 예술은 한 사람의 시선을 바꾸고, 공동체의 방향에 새 국면을 불러오는 잠재력을 품고 있어요. 일례로, 트랜스폼 프로그램은 이와 같은 확신에서 비롯됐습니다. 무대에서 다루는 여성의 목소리, 사회적 공존, 환경 등의 주제는 예술적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히고, 일상 속 선택과 행동에도 혁신을 촉발하지요. 이는 예술이 사회와 만날 때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 중 하나예요.
예술의 힘에 관한 믿음을 젊은 세대와 어떻게 나누고 싶나요?
타인과 공동체를 세심하게 살피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함께 나아가는 태도인 ‘이타주의’가 떠오르네요. 에르메스 재단의 창작 지원, 기술 전수, 환경 보전, 생물 다양성 보호 활동 등에는 이타주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집단’의 개념과 맞닿아 있는데, 여기서 집단은 형식적인 조직이 아닌, 서로를 북돋우고 지식과 경험을 주고받는 살아 있는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타주의는 CSR 활동에서도 구체적으로 구현됩니다. 예로, 탄소 배출을 줄이고, 생물 다양성을 지키며, 매장이나 제조 시설을 지을 때 환경 부담을 최소화하고 있어요. 이런 실천은 지역 주민과 그곳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아우릅니다.

프랑스에서 공연 예술을 지원하는 ‘트랜스폼’ 프로그램. © David Le Borgne
재단의 지원으로 성장한 젊은 예술가와의 특별한 경험이 있나요?
프랑스로 이주해 연극을 배우고자 했던 청년이 기억납니다. 재단 장학 프로그램을 통해 브르타뉴 렌의 국립 연극학교에 입학한 그는 다양한 공연 예술을 접하며 3년 동안 금전적 부담 없이 학업에 몰두했죠. 2년 전 학교를 찾았을 때 청년의 표정에는 진심 어린 감사와 확신이 서려 있었어요. 저희의 지원이 꿈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진로의 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졸업 후 그는 안무가 마틸드 모니에가 참여한 프로젝트에 합류했고, 작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재단과 재회했습니다. 마침 그 공연은 재단이 후원한 작품이었는데요. 그는 “장학금 덕분에 공부를 계속하며 이렇게 뜻깊은 무대에 설 수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와의 일화는 에르메스 재단 올리비에 푸르니에Olivier Fournier 이사장과 팀원들에게 예술 지원이 한 사람의 인생 궤도를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기 전에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재단의 여러 활동 중 ‘숲’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더군요. 자연은 예술과 더불어 세대를 잇는 고유한 자산이잖아요.
현재 카탈루냐 자연보호 연합이 진행하는 국립자연 보호 구역 내 마싼느 숲Massane Forest 연구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인근 아르줄레스에 위치한 마싼느 숲은 인간의 손길 없이 스스로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생태계예요. 다채로운 종 다양성과 기후·습도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로 기후 위기 시대에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하죠. 마산 숲 프로젝트는 재단 내부를 넘어 에르메스 전체로 관심을 확산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각 제품군의 디렉터들이 현장을 방문해 의미를 체감했어요. 앞으로 재단은 환경보호와 생물종 보존을 위해 장인, 디자이너, 농업 전문가, 연구자 등 다양한 주체가 협력해 지역별 맞춤 해법을 모색하는 ‘공동 실행형 프로그램’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디렉터님께 에르메스 재단에서의 시간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어떤 결정도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재단의 모든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은 여러 관점이 모여 치열한 논의와 합의를 거쳐 결론에 도달하기에 자연스럽게 겸손을 배웠어요. 에르메스에서는 누구도 홀로 돋보이지 않습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 중인 전시 <두 번째 삶>(~10월 5일)에 참여한
한 & 모나의 ‘LISTEN, I KNOW’(2025),
사진: 김상태. © 에르메스 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