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스트 안테스의 ‘Rotes Haus mit gelbem Dach vor Rot’(2023). 문과 창을 생략한 단순한 선으로 집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88세 거장이 현대 독일사의 굴곡 속에서 느낀 실망과 좌절을 투박하면서도 온기를 담아내 표현한 점이 와닿아 수집했다.
오병재의 ‘Patterend Place’(2018). 김주영 컬렉터가 처음으로 구매한 작품이다. 액자를 맞추러 갔다가 샘플을 보던 중 우연히 발견했다고.
머릿속에 자리 잡은 미술사는 독일 마이어리거 갤러리 한국 디렉터 김주영의 집에서 생생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벽과 바닥, 햇살이 스미는 창가에 놓인 작품들은 마치 한 권의 책장을 넘기듯 이어진다. 회화, 조각, 설치를 넘나드는 수집은 취향을 넓히는 동시에 시선을 단련하는 훈련이 됐다. 그는 망설임이 올 때마다 피카소의 문장을 떠올린다. “그림에서도 삶에서도 행동해야 한다In Painting as in Life, you must act directly.” 전시를 기획하는 순간에도, 작품을 선택하는 자리에서도 피카소의 이 문장은 결정을 이끄는 나침반이 된다. 갤러리 디렉터로서 작가와 컬렉터를 잇는 경험은 시장 논리 너머의 세계로 김주영을 안내했다. 이제 그는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 한국 작가들이 글로벌 무대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여정의 중심에는 ‘미술은 일상에서 숨 쉬어야 한다’라는 믿음, ‘컬렉팅이 곧 살아 있는 미술사’라는 확신이 있다.
김주영 컬렉터 뒤에 있는 작품은 김영주의 ‘문제의 영역’(2021),
바닥에 놓인 조각은 이선종의 ‘생각하는 사람’(1983).
김주영 독일 마이어리거 갤러리 한국 디렉터이자 프랑스 미술 전문 서적 출판사 카예르다르Cahiers d'Art의 아시아 개발이사로서 한국과 유럽의 미술을 연결하고 있다.
디렉터님과 갤러리에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내린 결론은 하나였던 것 같아요. 미술사 연구는 ‘책상 앞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대학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던 시절 국내 환경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습니다. 양질의 작품을 직접 감상할 기회가 드물었고, 해외 논문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죠. 여러 선후배가 외국 대학 도서관에 등록해 오래 머물며 자료를 모았습니다. 저는 초현실주의 여성 작가 리어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었는데, 참고 이미지는 책 속 도판이 전부였어요. 미국 라이스 대학교의 낸시 데프백Nancy Deffebach 교수님이 본인의 논문을 보내주셨지만, 안타깝게도 실린 사진은 모두 흑백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자료를 넘기다 문득 ‘실물을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쓰는 논문은 의미가 없다’라는 판단이 들더군요. 곧바로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곳을 검색했고, 샌프란시스코의 한 갤러리에 메일을 보내 일정을 잡은 뒤 방문했습니다. 그러한 경험 이후 미술사는 서면 연구와 현장 감상이 결합할 때 비로소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미술사 연구에서 쌓은 경험이 실제 컬렉팅으로 어떻게 이어지게 되었나요?
대학원 수료 후 현장에서 작가들과 교류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다른 컬렉터들의 소장품을 보았는데, 제 컬렉팅 방식이 다소 독특하더라고요. 부모님께 물려받은 작품을 포함해 페인팅 몇 점이 쌓이자 ‘회화만이 미술은 아니다’라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었을까요? 벽을 한 장르로 채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매체에 눈이 가더군요. 당시 처음 들인 작품은 이스라엘 작가 로이 야리브Roy Yariv가 철판을 구겨서 만든 ‘Exit’(2018)였습니다. 이어 들인 작품은 이선종 작가의 ‘생각하는 사람’(1983)으로, 조형물이 들어오자 집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기존 회화와의 관계도 재정립되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이후 허우중 작가의 ‘그림자 그리기 1’(2019), 김영주 작가의 ‘문제의 영역’(2021) 같은 부조와 김선희 작가의 전원을 연결하는 설치 작품을 차례로 더했습니다. 매체를 미리 정해두고 마음이 끌리는 작품을 모으는 방식은 흔치 않지만, 컬렉팅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리슈루이Li Shurui의 ‘Light No.109’(2010)과 그가 제작한 ‘제3회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 에디션.
그러한 깨달음에 다다르기 전에 소장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부모님께 물려받은 작품을 제외하면, 첫 구매는 오병재 작가의 ‘Patterned Place’(2018)였습니다. 액자를 맞추러 갔다가 샘플을 보던 중 우연히 발견했는데요. 이후 작가를 만나 집안 배경(할아버지 오지호 화백, 아버지 오승윤 화백)과 역원근법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소장해야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당장 구할 수 있는 작품이 없어 약 6개월을 기다려야 했지만요. 양쪽을 바꿔 걸 수 있는 딥틱diptych(두 폭 화) 형태라 기분에 따라 수없이 위치를 달리하다 5년 만에 자리를 정해 액자를 맞췄습니다.
최근 소장한 작품은요?
2022년 아트부산에서 독일 작가 하나 조피 둥켈베르크Hannah Sophie Dunkelberg의 ‘Verano’(2022)를 들였어요. 늘 새로운 매체를 찾는 저에게 그의 작품은 재료와 기법이 모두 신선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묵직한 금속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가벼운 폴리에스테르 캐스팅으로 조각의 전제를 비트는 발상이 매력적이죠. 또 독일 마이어리거 갤러리 서울 개관전에 참여했던 독일의 호르스트 안테스Horst Antes의 ‘Rotes Haus mit gelbem Dach vor Rot’(2023)도 소장했습니다. 문과 창을 생략한 단순한 선으로 집을 형상화한 작품인데요. 88세 거장이 현대 독일사의 굴곡 속에서 느낀 실망과 좌절을 투박하지만 따뜻하게 담아낸 점이 와닿았습니다.
갤러리 디렉터와 컬렉터라는 두 역할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갤러리를 이끌며 예술과 시장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전시 준비 단계에선 작가와 밀도 있게 소통하고, 전시 기간에는 컬렉터들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교류하기 때문입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참 많아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신중히 작품을 고른 커플, 결혼 20주년을 기념해 소장을 결정한 부부, 수술 후 요양하는 동안 위안을 얻고자 아트페어를 찾은 분, 가족의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한 상심을 달래려 작품을 들인 분까지. 현장에서 마주한 수집의 세계는 밖에서 보는 투자 일변도와 달랐습니다. 삶과 함께하는 컬렉팅을 본 이런 경험은 저의 컬렉팅 관점을 바꾸게 했고, 인생관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2년 아트부산에서 컬렉팅한 독일 작가 하나 조피 둥켈베르크의 ‘Verano’(2022).
기획자로서의 결정과 개인 수집 사이에 경계가 생기기도 하나요?
전시 기획은 본사 큐레이터들과 긴밀히 논의해 결정합니다. 제가 중점적으로 보는 건 미술사적 맥락, 국내 전시 환경, 컬렉터의 선호와 수요예요. 개인 수집에서는 취향이 우선이지만, 갤러리 프로그램에는 가능한 한 이를 배제하려고 해요. 갤러리스트가 아니었다면 취향에 맞는 전시와 작품만 취사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취향과 무관하게 다양한 전시와 아트페어를 접하는 환경에 있어서인지, 점점 기존의 선호에서 벗어난 지점에도 눈길이 가더군요.
9월 개관하는 마이어리거울프 서울을 두 갤러리가 공동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오픈한 독일 마이어리거Meyer Riegger 갤러리 서울이 새로운 국면을 모색하며 이전을 추진하면서, 오랜 파트너인 프랑스 갈레리 조슬린 울프Galerie Jocelyn Wolff와 손을 잡고 마이어리거울프 서울을 공동으로 운영합니다. 두 갤러리는 대표 작가 미리암 칸Miriam Cahn을 공동 지원하며 동행을 시작했고, 현재 카팅카 보크Katinka Bock, 산티아고 데 파올리Santiago de Paoli까지 협업 범위를 넓혔습니다. 2022년과 2024년 프리즈 서울에서 합동 부스로 호응을 얻은 흐름을 서울 공간으로 이어가 프로그램을 융합해 고유한 전시 언어를 제시하려 해요. 오랜 인연이 서울에서 새 장을 여는 만큼 앞으로 선보일 전시에 귀한 발걸음 부탁드립니다.
소속 작가 외에 주목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왕위양Wang Yuyang을 꼽습니다. 과거 중국 갤러리에서 일한 경험 덕분에 중국 현대미술을 꾸준히 주시해왔습니다. 그때는 중국 현대 작가들이 거의 매일 기록적인 가격 경신을 하던 시기였어요. 비록 지금은 국내에서 중국 작가를 향한 관심이 줄었지만요. 왕위양은 202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예요. 우리나라에는 주로 회화가 소개됐죠. AI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대규모 설치 작업은 한동안 국내에서 보기 어려웠는데, AI가 화두가 아닌 시절부터 과학기술을 일찍이 작품 세계에 접목해온 왕위양의 궤적은 예술과 기술이 긴밀하게 맞물려 발전하는 오늘날 주목해야 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작가 로이 야리브가 철판을 구겨서 만든 작품 ‘Exit’(2018).
갤러리를 찾는 분들께 어떤 팁을 드리나요?
자주 듣는 질문은 아무래도 “어떤 작품이 투자 가치가 있나요?”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은 시간이 흐른 뒤 가격이 크게 오르곤 했어요. 과거에는 작품의 가치가 시장에 반영되기까지 시차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는 환경에서는 간격이 짧아지는 추세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미학적으로 탁월한 작품이 장기적으로 투자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에요. 미술사에서 전례 없는 실험으로 한 걸음 앞서간 작가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남깁니다. 그래서 작가의 발상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수지요. 또 다른 컬렉터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시각을 공유하면 나이, 성별, 국적을 넘어서는 보편적 대화가 가능해지는데요. 컬렉팅에 흥미가 있다면, 먼저 공간을 찾아 작품을 보고 작가나 갤러리스트와 깊은 대화를 나눠보길 바랍니다. 분명 나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또 한 가지, 제가 만난 진지한 컬렉터들은 모두 책을 가까이했습니다. 저 역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서를 꾸준히 하고 있는데, 축적된 독서량은 작품 이해에 뛰어난 자산이 됩니다. 컬렉터 모임이나 독서 모임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은 컬렉팅 활동의 자양분이라고 믿어요.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컬렉터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요?
해외에 나가보면 10년 전과 비교해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실감합니다. 짧은 기간에 해외 갤러리들이 한국에 지점을 열고, 수준 높은 전시를 기획하는 움직임은 눈에 띄는 변화입니다. 이 시점에서 컬렉터이자 갤러리스트의 핵심 역할은 훌륭한 국내 작가를 세계 무대에 알리는 일일 거예요. 컬렉터가 작가들의 작업을 꾸준히 지지하고 지원한다면, 더 큰 무대에서 성과를 내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제 컬렉션은 해외 작가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만, 아트페어 등에서 우연히 품에 안은 국내 작가들(김영주, 김선희, 허우중 등)을 항상 응원합니다. 이들이 해외로 진출해 좋은 결과를 거둘 때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껴요. 앞으로도 유럽과 한국을 잇는 다리가 되어 국내 작가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요.
전원을 연결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김선희 작가의 설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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