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트라우고트 베를린에 터를 잡은 미국 오페라 가수. 레지에로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무대 밖에서는 컬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더불어 예술 컨설팅 회사 아테리어 모티브(arteriormotive.co)의 설립자로 디자이너·작가·큐레이터 네트워크와 아트페어 경험에 기반해 맞춤형 컬렉션을 제안하고 있다.
음악가의 감성과 컬렉터의 안목이 만난 지점이 궁금합니다.
컬렉팅의 시작은 꽤 독특했습니다. 오랜 세월 음악과 오페라에 몰두한 저에게 소유라는 개념은 와닿지 않았어요. 그런 저를 바꿔놓은 인물은 카르슈텐 크레치마어Karsten Kretzschmar예요. 막 서로를 알아가던 때에 그가 빈 아트페어에 가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낯선 영역이었지만,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이 커서 설렘을 안고 동행했어요. 그날 처음으로 미술이 제 삶 안으로 스며드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에 불과했지, 캔버스가 우리 집 벽을 채울 수 있다는 발상은 해본 적이 없었죠. 이후 미술은 저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차원으로 초대했고,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마저 뒤바꿔놓았습니다. 이를 촉진한 무대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입니다. 갤러리와 스튜디오, 거리의 에너지가 유기적으로 얽힌 이곳은 예술을 일상에서 숨 쉬는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당신에게 미술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나요? 음악가로서 느끼는 시각예술의 리듬이라고 할까요?
미술에도 분명 리듬이 있습니다. 귀로 들리진 않아도 시선이 이동하는 궤적과 화면 속 요소들이 맞물리는 방식에 따라 고유한 템포가 형성돼요. 성악가로서 시간, 움직임, 에너지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다 보니 미술을 볼 때도 저절로 그런 요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작품은 정적이며 고요한 분위기를 띠고, 어떤 작품은 긴장감과 역동성으로 가득해요. 제가 주로 노래하는 레지에로leggiero(가볍고 경쾌하게) 레퍼토리는 경쾌하고 민첩한 성격을 지녀서 저 또한 생기가 넘치면서 명료하고, 예측 불가능한 작업에 강하게 끌립니다. 그런 만남은 저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사고를 환기하거나 감정을 다른 결로 전환하는 계기가 됩니다.
(왼쪽부터)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 아나 파샤우어Anna Fasshauer, 그레이스 위버Grace Weaver, 안드레아스 슐체Andreas Schulze의 작품과 모오나리Moonarij 화병.
컬렉터로서 세운 가치나 기준이 있다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를 매료시키는 작품들은 언제나 제가 질문을 던지고, 개념적이거나 감정적인 긴장을 불러일으켜 끊임없이 저를 시험해요. 익숙한 형식을 흔들거나 고정된 관념을 전복하려는 예술가들에게 끌린다는 의미예요. 그런데도 제가 본질로 여기는 것은 ‘연결’입니다. 작업 그 자체와의 감각적인 소통도 물론 긴요하지만, 작가의 사고, 살아가는 환경, 창작을 둘러싼 맥락과 닿는 지점을 발견해야만 해요. 이는 경청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선 음악을 연주할 때처럼 미술과 마주할 때 열린 마음과 다양한 호기심, 집중이 필수적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작업이 무거운 주제를 다뤄야 뜻깊은 건 아니에요. 뜬금없이 웃음을 유발하거나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것도 저에겐 순도 높은 울림으로 다가오니까요. 예술이 반드시 진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첫 번째로 품에 안은 작품이 기억나나요?
카르슈텐과 함께 소장한 크리스천 홀스태드Christian Holstad의 콜라주 작품 ‘Take Stand’입니다. 식탁 위를 배경으로 계란, 깡통 따개 같은 일상적 물건과 면도 크림, 수류탄 등 다소 이색적인 사물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이미지에 끌렸어요. 당시 카르슈텐에게 “우리가 언젠가 같이 살게 되면 이 그림은 부엌에 걸자”라고 말했는데 그 말처럼 되었고, 지금은 드레스덴 집 부엌에 그대로 걸려 있어요. 단 한 번도 옮긴 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그래서 홀스태드의 작품은 우리 사이의 직감, 공유된 기억, 초기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낭만적인 이야기이자 우리가 왜 컬렉팅하는지를 상기하게 하는 특별한 기억이기도 하고요. 최근 저와 카르슈텐은 실라 힉스Sheila Hicks의 작품을 마이어 리거Meyer Riegger 갤러리에서 데려왔습니다. 강렬한 물질감과 역사성, 심도 있는 개념이 공존하는 작품이죠. 소시에테Société 갤러리에서 만난 코니 마이어Conny Maier의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박함과 시간적 여유가 함께 느껴집니다.
소시에테 갤러리에서 소장한 코니 마이어의 작품은 절박함과 시간적 여유가 함께 느껴진다.
당신의 파트너 카르슈텐 크레치마어는 시계 딜러이자 컬렉터로도 유명해요. 시계와 현대미술의 접점은 무엇일까요?
그는 드레스덴 근교에서 자랐어요. 그곳은 독일 하이엔드 워치메이킹의 중심지인 글라스휘테와 인접해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랑에 운트 죄네Lange & Söhne 같은 브랜드의 전통을 곁에서 접하며 정교한 기계식 타임피스의 구조와 품격에 자연스레 매혹되었죠. 그는 빈티지 워치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과 역사, 시계가 들려주는 서사를 모으는 과정에서 물건 이상의 가치를 체감했다고 말합니다. 처음엔 시계와 미술을 별개의 영역이라고 판단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분야 모두 장인 정신과 시간에 대한 고유 감각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요. 예로, 젊음과 혁신을 표방하는 워치메이커 칼리니히 클레이스의 철학은 그가 수장한 동시대 작가들의 태도와 교차됩니다. 카르슈텐에게 컬렉팅은 진정성과 깊이를 탐구하는 행위이며, 시계든 미술 작품이든 최종 선택은 항상 직관이 좌우합니다. 그 본능이야말로 컬렉션의 기쁨을 완성하는 열쇠라고 옆에서 말하는군요.
특히 끌리는 장르가 있나요?
저와 카르슈텐은 주로 회화를 눈여겨보지만, 매체와 장르에 제한을 두진 않아요. 오랫동안 알리차 크바데Alicja Kwade, 줄리앙 샤리에르Julian Charrière,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ck 같은 개념 미술 작가를 응원해왔고, 최근에는 토마스 쉬테Thomas Schütte의 조각에 푹 빠져 있습니다. 요즘 저희가 흥미롭게 보는 작가는 페인팅으로 사회적 사유의 장을 확장하는 살림 그린Salim Green이에요. 컬렉팅의 희열은 한 작품을 구매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창작자의 예술 세계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모하고 심화되는지 지켜보며, 그들의 생각과 창작 여정에 꾸준히 연결된다는 점은 저희에게 큰 행복입니다.
(왼쪽부터) 코시마 폰 보닌Cosima von Bonin, 미리암 칸Miriam Cahn, 그레고어 힐데브란트Gregor Hildebrandt의 작품.
그런 취향과 관심이 예술 컨설팅 회사 ‘아테리어 모티브Arterior Motive’를 설립하게 된 계기로 보이는군요. ‘공간에 어울리는 예술’을 제안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저는 오래전부터 실내디자인에 애정을 가져왔지만 작품이 늘 ‘마지막에 채워지는 장식품’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림이나 조각은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고 서사를 만드는 주체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아테리어 모티브의 출발점이에요. 이름은 ‘숨은 의도ulterior motive’를 살짝 비틀어, 예술을 디자인의 핵심 동력arterior motive으로 삼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코로나19로 공연이 멈췄던 시기, 저는 창의력을 무대 대신 살아 있는 환경으로 옮기고자 했어요. 저희의 철학이 깃든 대표 사례가 베를린 소더비 인터내셔널Sotheby’s International 의뢰로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덴마크 건축가 시구르 라르센Sigurd Larsen이 설계한 펜트하우스에 40여 점의 작품을 설치 인테리어를 넘어 큐레이션된 전시로 완성했는데요. 이를 통해 작품이 공간의 마감이 아닌 본질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얻을 수 있었습니다.
캐서린 브래드퍼드Katherine Bradford의 회화 작품 ‘One Man’s Pool’(2018) 앞에 있는 컬렉터 케빈 트라우고트(오른쪽)와 그의 파트너 카르슈텐 크레치마어(왼쪽). 아래 있는 조각은 디터 로트Dieter Roth, 앞에 있는 멜론이 연상되는 조각은 알리차 크바데Alicja Kwade의 작품.
베를린에 둥지를 튼 지 15년이라고요. 도시의 바이브가 컬렉팅에 영향을 미치나요?
유서 깊은 갤러리부터 실험적인 팝업 이벤트까지 층위를 넘나드는 베를린의 다채로운 예술 지형 속에서 저와 카르슈텐은 전시장을 벗어나 작가의 스튜디오나 아늑한 사적 공간으로 향하곤 합니다. 갤러리에서 감상한 작품을 계기로 다음 날 바에서 잔을 기울이거나 음식을 먹으며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 작품을 소유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창작의 맥락과 호흡하는 듯해요. 매년 도시 전체가 미술로 물드는 베를린 갤러리 위크엔드는 그 경험의 절정입니다. 생경한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물론, 이미 알고 있던 큐레이터나 해외 컬렉터와도 매번 색다른 인연을 맺는데요. 이처럼 예술이 삶의 리듬 속에 숨 쉬는 베를린은 매일 우리에게 예술과 살아가는 즐거움을 일깨워줍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단 하나의 작품만 남길 수 있다면, 어떤 작품일까요?
크리스천 홀스태드의 작품은 망설임 없이 간직할 소장품이지만, 그 외에 한 점을 꼽으라면 카타리나 그로세Katharina Grosse의 회화를 택할게요. 이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다채로운 색감과 힘 있는 붓질에 압도됩니다. 빛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생동하는 화면을 보노라면, ‘황홀한 몰입감’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올라요. 그로세는 산업용 스프레이건으로 건축물이나 자연 풍경 위에 직접 안료를 분사해 평면과 입체, 장소의 경계를 허무는데요. 우리가 소장한 작품 역시 중첩된 안료와 역동적 붓질이 마치 자기장을 발산하듯, 하루에도 몇 번씩 제 발길을 붙잡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자 겐츠켄Isa Genzken의 ‘Window’ 시리즈는 위시 리스트 최상단에 자리한 작업이에요. 구조를 해체하고 구성하며 인식을 확장하는 그녀의 조형 언어는 닫힌 듯 열려 있고, 경계를 유연하게 가로지르죠. 그 틈과 여백은 제 예술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강렬한 물질감과 역사성, 심도 있는 개념이 공존하는 실라 힉스의 작품 ‘Planet Ten’(2023).
컬렉팅에 영감을 준 음악가의 말이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로시니의 “지루한 음악만 빼고 모든 음악은 좋은 음악이다.” 노래를 부를 때뿐 아니라 컬렉션을 구축할 때도 나침반이 됩니다. 작품이 우아하든 도발적이든, 미니멀하든 화려하든 그건 부차적이에요. 핵심은 ‘그것이 내 마음을 흔들고, 질문을 던지며, 눈길을 붙잡아두느냐’입니다. 음악과 미술 모두 아무 울림도 남기지 않는 지루함은 피하고 싶어요. 반대로 계속 감각을 자극하는 작업은 반가운 신호라고 믿습니다. 둘째는 바그너의 “상상력이 현실을 만든다.” 성악가로서 목소리와 해석으로 무형의 세계를 드러내듯 작품을 모으는 건 상상력과 교감하는 과정이에요. 매력적인 작가들은 세상을 새롭게 읽고 기존 틀을 뛰어넘는 시각을 제시해요. 상상은 결국 공간과 일상, 사고방식을 진화시키고, 바그너의 문장은 그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모이저Meuser, 조르조 그리파Giorgio Griffa, 지크마어 폴케Sigmar Polke, 토마스 쉬테Thomas Schütte, 윌리엄 코플리William Copley의 작품.
시계 딜러이자 컬렉터인 케빈의 파트너 카르슈텐이 소장한 시계. 칼리니히 클레이스Kallinich & Claeys는
젊음과 혁신을 표방하는 워치메이커다. klassische-uhr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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