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은 독일 뮌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추상화가다. 세종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으나 정형화된 교육 방식에 답답함을 느껴 자퇴 후 유럽으로 떠났다. 진짜 자기 모습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도시를 찾아 두 달간 여행했고, 독일로 향했다. 뮌스터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독일의 미술대학을 돌며 교수들을 만났다. 뮌헨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귄터 푀르크Günther Förg 교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뮌헨 아트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귄터 푀르크의 지도 아래 석사과정을 마쳤다.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독일의 자유로운 예술 환경과 푀르크 교수가 제안한 ‘배경Hintergrund’ 개념이다. 푀르크는 “그것은 어디에서 왔느냐”를 끊임없이 물으며 근원, 즉 보이지 않는 뿌리를 찾게 했다. 이유진 작가에게 ‘배경’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캔버스 위 잠재의식의 표면으로, 작가와 관객의 시선과 감정이 교차하는 시각적 무대다. 다른 하나는 동서양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 즉 내면의 기억과 감각이 축적된 삶의 이야기다. 작품 속 배경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내면과 현실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능하며, ‘잠재의식=배경’이라는 독특한 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개념은 작가에게 동서양의 근원과 정체성을 탐구하고, 한지와 캔버스, 동서양 재료와 철학이 교차하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자각하게 했다. 이유진 작가는 한지 섬유와 캔버스 직조, 드로잉과 페인팅을 융합해 모호한 모티프와 깊은 여백을 만든다. 전경과 배경, 내부와 외부를 뒤섞는 실험으로 경계 없는 ‘가능성의 공간’을 창조하며, 형태를 고정하지 않고 작업을 통해 변화시켜 현실과 허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초경계적 실험’을 이어간다. 갤러리 지우헌에서 열리는 작가의 세 번째 국내 개인전 <부드러운 야생Soft Wild>에서도 초경계적 실험은 계속된다. ‘부드러움’은 모호하면서도 꿈결 같은 질감을, ‘야생’은 작가의 그림에 반복해 등장하는 동물·인간·자연의 모티프를 의미한다. ‘부드러움’은 ‘야생성’이라는 내면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언어이며, ‘야생성’은 ‘부드러움’이라는 형식에 생명력과 강렬한 깊이를 불어넣는 심장이다. 긴장감 넘치는 조화 속에 작가의 고유한 정체성이 드러난다.
빛의 뿌리, 2025, acrylic, oil, oil pastel on Hanji Korean papermounted on canvas, 30×24cm.
평론가들이 “이유진의 작품 세계는 동서양의 문화가 교차하고 융합한다”고 평해 작품 안에서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나눠 찾다가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작업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을 나누다 포기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해요. 어쩌면 그 지점에서 제 작업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르죠. 저는 제 작업을 양극단 사이의 줄타기로 비유하곤 해요. 어느 한쪽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 위 또는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죠. 한국에서의 시간과 독일에서의 경험은 제 안에서 분리되지 않고,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인 물감층처럼 서로 스며들어 하나의 부드러운 풍경이 돼요. 의식적으로 조합한 요소가 아니라 삶을 통해 체화된 저만의 시각언어죠. 제 작업을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아요. 경계에서 발견한 제 정체성의 기록이자 풍경이기 때문이죠. 제 작업은 캔버스 위에 펼쳐진 저의 ‘열린 공존’의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기를 ‘두 번째 사춘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한국에서 한국적 정체성은 공기와 같아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러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놓이면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됐죠. 많은 것을 새롭게 정의하며 판단해야 했고, 나만의 기준과 시각도 찾아야 했어요. 이전의 나라고 믿었던 정체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해방의 과정이 있었어요. 한국적 뿌리를 버리는 과정이 아니에요. 오히려 저의 정체성, 철학, 사고방식이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음을 선명하게 깨닫는 계기였죠. 과거의 뿌리를 이해하고 인지하려는 탐구와 현재의 삶에서 현실을 이해하고 인지하려는 탐구를 지속했어요. 갈등처럼 보이지만 자기 성찰의 과정이자 삶의 균형을 잡는 과정이었어요.
그 차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고민하던 것이 작가의 작품 세계의 근간이 된 듯합니다.
내면의 변화는 작품에 그대로 반영돼요. 그림 속 선들은 경계가 아닌 열린 통로죠. 안과 밖,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모호해지고, 서로에게 스며들며 관계를 맺어요. 저의 한국적 뿌리는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이루는 살아 숨 쉬는 일부예요. 모든 작품이 그 기억과 현재 사이의 공간에서 피어나기 때문이죠.
대부분의 시간을 독일에서 보내는데, 이런 환경은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시간이 역전됐어요. 한국에서 22년을 살았고, 독일에서 23년째 살면서 가끔 한국을 방문해요. 이전에는 물리적 거리가 제 안의 한국을 더 선명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개인적인 일로 1~2년 간격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새로운 감정의 층위가 더해졌음을 느껴요. 지금 저에게 한국은 강렬한 기억의 응축이자 꿈의 원형과 같아요. 공기, 냄새, 소리, 빛 등 모든 것이 한꺼번에 스며드는 느낌을 받곤 하죠. 몸이 기억하는 본능적인 정서는 깊은 안도감을 느끼게 해요. 동시에 이방인으로서 미묘한 낯섦과 긴장감이 공존해요. 양가적 감정이 부딪치면서 제 안의 창작 에너지가 더욱 강렬하고 팽팽해졌어요. 이제 한국은 제게 거리감과 친밀함, 안도와 긴장이 교차하며 끝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곳이 됐어요.
‘연못의 정령’, 2025, acrylic, oil, oil pastel on Hanji Korean papermounted on canvas, 40×35cm
‘부다 III’, 2025, Keramik, 7×6×7cm
‘달팽이 버니’, 2024, Keramik, 7×11×17cm
초안 없는 즉흥적 드로잉, 평면 스케치 등 ‘탐구를 멈추지 않는’ 작가로 불립니다.
탐구의 중심에는 직관과 즉흥성이 있어요. 저에게 제스처, 즉 신체성이 담긴 몸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해요. 미리 스케치하거나 구성을 정해두면 그리는 행위가 계획을 실행하는 기술적인 과정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어요. 이를 피하고자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작업합니다. 그러면 그림 그리는 과정과 평가, 수정 사이에 자연스러운 거리가 생기는데, 이 자세는 제가 캔버스 위로 몸을 숙여 팔과 어깨를 비롯한 온몸을 움직이고 사용하게 해요. 그 과정에서 나오는 선과 형태는 계획하던 것이 아니라 몸의 기억과 그 순간의 감정이 즉흥적으로 표출된 결과물이죠. 초안이 없다는 것은 기억과 감각이 필터 없이 캔버스에 바로 옮겨진다는 의미기도 해요.
그러한 독창적인 작업 방식은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주나요?
예측 불가능한 생명력을 긴장감 있게 불어넣어요. 그림은 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내 감정과 신체 행위가 기록된 ‘흔적’이자 ‘사건’이 돼요. 선은 경계가 아니라 움직임의 궤적이 되고, 형태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줘요. 이 방식은 생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생각하고 느끼게 해요. 그 과정의 솔직한 기록이 나의 작품인 셈이죠.
창작에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영감의 원천은 퀄리아Qualia예요. 퀄리아는 감각을 통해 느끼는 것 자체를 말해요. 철학에서는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각의 질을 의미하기도 하죠.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빨간색의 느낌 혹은 지끈거리는 두통의 감각처럼 명확하게 말로 설명할 수 없고 타인과 공유할 수도 없는 고유한 ‘느낌’이요. 퀄리아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지만 제 작업에서는 개인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잠재의식과 연결돼요. 저의 잠재의식은 고립된 섬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공유하는 광대한 공동체 의식의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요. 제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물, 자연, 인물 등의 원형archetype은 그 깊은 바다에서 길어 올린 보편적 감각의 파편, 즉 우리 모두 막연하게 느끼지만 말로는 포착할 수 없는 감정들입니다.
개인전 <부드러운 야생>을 앞두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야생>은 제 작업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개념 ‘부드러움’과 ‘야생성’이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는 전시예요. 예를 들어 ‘연못의 정령The Spirit of the Pond’에서는 꿈결 같은 푸른색 화면을 통해 연못과 하늘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했고, ‘빛의 뿌리Roots of Light’와 ‘바다 나무Ocean Tree’에서는 잠재의식 속 풍경에서 길어 올린 특별한 시선을 담았어요. 이 작품들은 선명한 비전이자 감각적인 직관의 흔적이라 할 수 있어요. 주제는 평면을 넘어 조각 작업으로도 이어져요. ‘부드러움’과 ‘야생성’은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가 아니라 균형을 이루며 완성되는 상호 보완적 관계죠. 명확한 경계 없이 경계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요소이고. 부드러운 외피는 관객이 작품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돼요. 그 안에는 통제되지 않은 원시적 에너지가 숨 쉽니다. 긴장감 넘치는 조화가 이번 전시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제 작업이 머무는 자리예요.
한옥 갤러리 지우헌의 공간적 ‘배경’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을지 궁금합니다.
이번 전시는 소작 위주로 구성했어요. 캔버스를 넘어 한지(장지)와 흙(점토)으로 만든 조소 작업도 함께 선보일 거예요. 나무와 흙, 종이로 지어진 한옥은 ‘숨 쉬는 공간’이에요.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자연을 품는 한옥의 철학은 형상과 배경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내 그림 세계와 닮아 있어요. 제 작품 세계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 제 잠재의식과 삶의 이야기라면, 한국의 정서가 깃든 지우헌은 그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깊고 단단한 뿌리가 되어줄 거라고 믿어요.
<럭셔리> 독자들에게 관람 팁을 공유한다면요?
‘이것이 무엇일까’ 정의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길 바랍니다. 제 작업은 감각을 일깨우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형체와 배경이 서로 스며드는 모호한 경계를 따라 시선을 옮겨주세요. 그곳에서 직관으로만 닿을 수 있는 자신만의 ‘퀄리아’를 깨울 수 있길 바랍니다. 갤러리 지우헌 공간도 작품의 일부로 느껴주면 좋겠습니다. 한옥의 나무 기둥과 고요한 공기는 내 작품과 함께 호흡하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배경’이에요. 이 모든 경험이 어우러질 때 비로소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고유의 부드러운 야생과 마주하는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바다나무’, 2025,acrylic,
oil, oil pastel on Hanji
Korean papermounted
on canvas, 18×24cm
이유진 개인전 <부드러운 야생Wild Things>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과 심상을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추상화가 이유진의 개인전이 갤러리 지우헌에서 열린다. 신작 12점을 포함한 회화와 드로잉, 세라믹 작품 25점이 공개된다. 9월 4일 오후 4시부터 진행되는 오프닝 행사에서는 자연주의 스킨케어 브랜드 다자연의 ‘화해’ 마스크 팩 정품 세트를 선착순으로 증정한다.
기간 9월 3일~10월 18일(일·월요일, 공휴일 휴관) 장소 갤러리 지우헌 북촌로11라길 13 문의 765-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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