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엄 산에 있는 세계 최초의 곰리 상설관 ‘그라운드Ground’에 선 작가 앤터니 곰리. 그는 인간의 신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조각, 설치, 공공 미술 작품으로 찬사를 받아온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건 청조갤러리 2관의 드로잉이었어요. 조각을 내세운 전시에서 드로잉이라니! 작가님께선 드로잉을 조각의 준비 과정이 아니라, 공간적 사고를 시각화하는 첫 단계라고 말씀하셨죠?
드로잉을 모든 가능성의 씨앗이 자라는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드로잉이란 행위는 즉각적이며, 재료의 반응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요. 재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작업 과정에서 함께 호흡하며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거든요. 예로, 시간이 흘러 ‘Steady III’(2018)와 ‘Steady IV’(2018)를 다시 마주했더니, 작업 당시엔 떠올리지 못했던 세계가 새로이 열리더군요. 드로잉은 그런 사유가 구체화될 수 있도록 돕는 기반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작업을 시작할 때 먼저 종이를 물에 흠뻑 적십니다. 그다음 탄소와 카세인을 얇게 섞은 붓을 집어 들죠. 그러고는 마치 다이빙 직전, 몸의 감각이 한 점으로 모이는 순간 같은 긴장과 몰입을 떠올리며 선을 긋습니다. 저는 몸의 외형을 그리는 대신 머리의 무게, 손끝의 감각, 무릎과 발에 실리는 압력 등 내면의 감각을 포착하려 해요. ‘Steady III’와 ‘Steady IV’에 등장하는 두 가지 팔의 자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몸의 굴곡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Ready, Steady, Go’ 중 ‘Steady’라는 개념이 작업의 핵심이죠. 제 드로잉은 사건을 묘사하기보다는 무언가 벌어질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이를 위해 몸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구성한 매트릭스 안에 담았어요. 자유로운 선들은 몸의 중심과 드로잉의 중심에 에너지를 모읍니다. 말하자면 몸과 시간, 공간 안에 응축된 순간을 불러오는 장치인 것이지요. 일견 단조로울 수 있으나 매트릭스는 뷰린burin(조각칼)으로 종이를 긁어내면서 만듭니다. 이러한 흠집 안에 색소가 스며들고, 일부는 표면에 흔적을 남기지만, 선은 종이 위에 물질적으로 새겨집니다.
안도 다다오의 설계와 앤터니 곰리의 작품이 만나 탄생한 그라운드. 내부 지름 25m, 천고 7.2m, 지름 2.4m의 원형 천창을 갖춘 돔 형태의 공간으로, 뮤지엄 산의 플라워 가든 아래 조성되었다.
조각의 역할은 은유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아요. 관객의 몸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물리적 개입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웨이어-펠런Weaire–Phelan 구조를 활용해 삼차원 공간을 채워왔어요. 비정형 다면체를 겹겹이 쌓는 방식이죠. 그러다 문득, 거품을 이루는 꼭짓점과 선들만 따로 떼어내 연결하면 조각의 새로운 구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어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켈빈도 말했듯, 거품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Liminal Field’는 꼭짓점들을 잇는 선을 따라 인간의 위치와 불완전함을 보여줍니다. 작품을 보며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자리, 더 큰 세계 속에서의 위치를 고민해보길 바라요.
청조갤러리 3관의 설치 작품 ‘Orbit Field II’(2024)는 관객이 몸을 숙이고 움직이며 통과해야 하는 작품입니다. 몸의 동선을 바꾸고 공간을 다른 차원에서 경험하게 만드는데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많은 물리적, 디지털 모델을 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전시장의 높고 낮은 부분이 어우러져 공간 전체에 에너지가 순환하도록 구상했어요. 모델링한 그대로 설치해봤지만, 현장에 와서 작업을 보니 조정이 필요하더군요. 먼저, 위층에서 내려다봤을 때 링들이 아래 공간에서 에너지를 터뜨리듯 튀어나오는 느낌을 구현하고자 몇 개의 큰 고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른 링들도 서로의 관계를 생동감 있게 조율했고요. 최종적으로는 양쪽 끝의 구조가 최소한의 형태만으로도 우아하게 완성되었어요. 반면, 중간 부분은 관객이 몸을 숙이고 피하면서 지나가도록 했는데요. 이러한 모순이 우리가 몸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나아가 건축 안에서 행동하는 방식까지도요.
안도 다다오의 설계와 앤터니 곰리의 작품이 만나 탄생한 공간 ‘그라운드Ground’는 세계 최초의 ‘곰리 상설관’이에요.
오래전부터 안도의 건축을 잘 알고 있었어요. 땅의 표면과 만나는 방식을 재구성하는 그의 건축적 태도를 늘 존경해왔습니다. 이번 협업은 로마 판테온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며 시작했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질량과 공간, 빛과 자연에 관한 관심을 결합해 건물을 완전히 지하에 두기로 했어요. 대신, 자연과 산등성이를 향해 열린 전망을 조성했죠. 꽤 급진적인 발상이었습니다. 그라운드 안에 있는 7점의 조각 작품 ‘Blockworks’는 인공 동굴 안에서 빛과 소리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관객은 그사이를 걷고 움직이지만, 동시에 별자리처럼 공간 속에 고정된 기준점이 되기도 해요. 일본 료안지의 바위처럼 공간의 흐름을 잠시 붙잡는 정적인 중심이라고 할까요?
계단을 내려가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하길 바랐나요?
오늘날 건축은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해지며 기계화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몸의 원초적인 감각과 생물로서의 본능을 잃어가고 있죠. 그래서 이번 작업에서는 건축을 근원적 형태로 되돌리고자 했습니다. 전기 조명과 인공 장치를 모두 배제하고 자연광, 바람, 공기, 비와 눈, 바람이 불어넣는 낙엽까지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였어요. 이곳은 쉼터로서 건축이 가질 수 있는 본연에 가까운 상태를 드러냅니다. 판테온이나 대부분의 현대건축물이 닫힌 공간을 지향해왔다면, 그라운드는 열린 채로 자연과 호흡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기 몸의 존재를 다시 자각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자연의 순환에 의존하고 있는지, 말이나 개념이 아닌 몸으로 실감하는 경험이요. 빛이 닿지 않는 명상실에서 출발해 돔을 지나 열린 외부로 나아가는 동선은 건축이 몸의 감각과 호흡을 확장하는 또 하나의 기관처럼 움직이는 과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그라운드는 눈과 귀, 입처럼 세상과 연결되는 감각의 기관이자 몸이 연장되는 장소로 귀결됩니다.
‘Liminal Field’ 시리즈는 기포처럼 가볍고 유동적인 형상으로 구현된 7점의 인체 형상들로 이뤄진다. 청조갤러리 1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가님의 작업을 보면 감정이나 서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비워두는 방식을 선택한 것 같아요.
감정의 서사를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보는 이는 그 감정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거든요. 제 작업은 머무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변화하고 흐르는 마음의 움직임을 품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죠. 조용히 존재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요.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조각의 감각적 경험을 확장하려는 시도도 많습니다.
조각은 본질적으로 가상의 세계를 거부해요. 화면 속 이미지나 정보와 달리,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관객의 몸을 움직이고 반응하게 하는 현실의 물질이에요. 우리는 조각 앞에서 멈춰 서고, 둘러보고, 때로는 비켜서서 보게 됩니다. 디지털 인터페이스나 증강현실이 감각적 경험을 확장할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조각의 본질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경험은 분명히 다릅니다.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과정일 뿐, 몸으로 직접 감각하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자신의 몸을 캐스팅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지속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특정 신체를 표준화하는 행위로 읽힐 수도 있어요.
몸을 작업의 재료로 활용하는 건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첫 번째 물질이기 때문이에요. 자기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대상을 멀리서 관찰하거나 거리를 두고 재현하는 방식과는 결이 다릅니다. 몸을 복제하거나 대리하는 게 아니라, 제 안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서구 조각이 유지해온 거리 두기와는 전혀 다른 태도지요. 제 몸을 쓰는 건 주체와 재료를 분리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솔직하기도 하고요. 특정 신체를 표준화하거나 규범을 형성하려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타데우스 로팍 파리에서 열린 앤터니 곰리의 개인전
화이트 큐브 버몬지에서 열린 앤터니 곰리의 개인전 (2023~2024) 전경. © Antony Gormley, © White Cube, Photo: Theo Christelis
오는 9월 화이트 큐브 서울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개인전 <Inextricable(불가분적관계)>
뮤지엄 산의 ‘Liminal Field’와 ‘Orbit Field II’는 유클리드적 공간 안에 유동적인 곡선의 기하를 끌어들이는 작업이었습니다. 직선과 평면, 90도 각도로 이뤄진 산업적 건축 안에 불확정적인 곡선을 개입시키는 실험이었어요. 반면,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는 ‘Blockworks’, ‘Bunker’, ‘Beamer’ 시리즈를 도시 건축의 언어와 연계해 선보이고,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는 ‘Extended Strapworks’ 시리즈를 통해 물리적 구조 안에 감정적 긴장을 담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작가님에게 조각은 어떤 방식으로 삶과 연결되고 있나요?
저는 이제 제 삶의 마지막 4분의 1 지점에 접어들었습니다. 앞으로는 예술과 삶의 간극을 좁히는 방향으로 작업을 이어가려고 해요. 도시든 바위와 나무·물이 있는 자연 환경이든, 인간이 만든 시스템과 자연의 조건이 만나는 지점을 계속 탐색할 계획입니다. 그라운드는 그런 만남의 장면을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이후 과정에서도 이런 방식의 실천을 지속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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