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워런트의 기원과 가치
로열 워런트 인증 엠블럼. 왕권이 교체되면 해당 엠블럼과 문구 역시 교체된다.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에 위치한 로얄 브라클라 증류소.
왕실 조달 허가증이라는 의미의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 of Appointment는 영국 왕실이 특정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승인하는 제도다. 이는 해당 제품이 왕실에 납품될 만큼 우수한 품질과 신뢰를 갖췄다는 보증으로 여겨진다. 로열 워런트 개념은 중세 잉글랜드에서 시작됐다. 왕이 특정 상인이나 장인에게 ‘왕실 납품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왕실 인장을 포함한 서면 문서Letter Patent의 형태로 전달되었다. 이것은 해당 상인의 명성을 보장해주는 품질 인증 수단이 되었다. 최초의 워런트는 지금처럼 ‘로열 워런트Royal Warrant’라 불리기 전, 왕실 칙허Royal Charte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55년, 헨리 2세가 직조업자 길드에 수여한 것이다. 15세기부터는 왕실 칙허가 로열 워런트라는 명칭으로 정착되며, 오늘날 같은 공식 시스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왕(또는 여왕)이 서거하면 해당 명의의 로열 워런트는 즉시 효력을 잃으며, 브랜드는 최대 2년의 유예 기간 내에 갱신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형식 절차가 아니라, 브랜드가 여전히 왕실 납품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확인하는 품질·윤리성 평가이기도 하다. 로열 워런트는 일반적으로 5년 단위로 발행되며, 매년 평균 20~40개 정도의 워런트가 회수되고 새로운 인증이 발급된다. 로열 워런트 보유 기업이 왕실에 별도의 수수료를 납부하는 건 아니다. 다만 왕실 문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정을 모두 따라야만 한다. 로열 워런트 소지자 협회Royal Warrant Holders Association의 사전 승인 아래, 문장과 문구 사용 위치, 디자인 크기, 포장 재질까지 철저하게 규정된다. 이처럼 로열 워런트는 법적·경제적 측면에서 단순한 명예 이상의 실질적인 신뢰 자산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다수의 럭셔리 브랜드들은 왕실 인증 자체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브리티시 헤리티지’, ‘책임 있는 제조’, ‘윤리적 유통’이라는 가치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를 글로벌 마케팅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로열 워런트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한 병의 위스키는 왕실의 취향과 역사, 그리고 품격을 대변하는 상징 중 하나가 되는 셈. 지금 잔을 들고 있다면, 당신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발을 들인 것이다.
로얄 브라클라의 시그너처 위스키 중 하나인 ‘로얄 브라클라 18년’과 ‘로얄 브라클라 23년’.
최초의 로열 워런트 위스키, 로얄 브라클라 1835년, 윌리엄 4세로부터 위스키업계 최초로 로열 워런트를 받은 브라클라 증류소. 이로 인해 증류소 이름 앞에 ‘Royal’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붙일 수 있게 되었으며, 지금도 로얄 브라클라는 ‘The King’s Own Whisky’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는 단순한 품질 인증을 넘어, 왕실이 직접 선택한 첫 번째 위스키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갖는다. 오늘날 로얄 브라클라는 바카디Bacardi의 프리미엄 포트폴리오 내 싱글몰트 위스키로 구성되어 있으며, 셰리 캐스크 숙성 위주의 깊고 리치한 풍미로 재조명받고 있다. 대표 제품은 12년, 18년, 21년 숙성 라인으로 구성되며, 클래식한 하이랜드 스타일에 귀족적인 셰리풍의 풍미를 가미한 것이 특징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로열 워런트
로얄 로크나가 증류소는 목가적인 풍경에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다.
작년 말, 찰스 3세 국왕 명의의 새로운 로열 워런트를 획득하며 브랜드 가치를 드높인 듀어스 증류소. 영국 문학에서 나올 법한 인상이다.
1840년대, 빅토리아 여왕 치세 아래에서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소비재 시장이 팽창하면서, 로열 워런트 제도 또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많은 상인이 ‘왕실 납품 업체’를 자처하며 마케팅에 무분별하게 워런트를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왕실은 오남용 방지와 기준 정립을 위해 공식 인증 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이때부터 등록제, 심사제, 갱신제의 틀이 도입되었고, “By Appointment to Her Majesty(왕실의 명을 받들어)”라는 문구와 함께 왕실 문장을 공식적으로 제품 포장이나 간판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깔끔한 피니시를 자랑하는 로얄 로크나가 위스키 라인업. 고연산 위스키인 ‘로얄 오크나가 36년’의 전면부에는 로열 워런트 엠블럼이 크게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왕의 발길이 닿은 증류소, 로얄 로크나가 빅토리아 여왕의 하이랜드 체류 당시 일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듀어스 위스키의 시그너처 라인과 리미티드 에디션.
왕실과 함께한 130년, 듀어스 빅토리아 여왕 말기인 1890년대 말, 듀어스Dewar’s는 왕실 납품을 시작했으며, 1901년 에드워드 7세 즉위 후 공식적으로 로열 워런트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조지 5세,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 워런트가 갱신되며, 무려 120년 이상 왕실 인증을 유지해온 대표적인 블렌디드 위스키 브랜드가 되었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서거 이후, 기존 명의의 워런트는 만료되고 2년 유예 기간 내에 갱신 심사가 이루어져야 했다. 듀어스는 이를 충족하며 2024년 12월, 찰스 3세 국왕 명의의 새로운 로열 워런트를 정식으로 다시 받았다. 로열 워런트는 일반적으로 5년 단위로 발행되며, 품질이나 윤리성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회수된다. 실제로 매년 약 20~40개의 워런트가 회수되며, 이에 상응하는 수의 새로운 인증이 발행된다. 워런트가 철회되면, 해당 기업은 12개월 이내에 제품 라벨과 포장에서 왕실 문장과 “By Appointment to” 문구를 제거해야 한다. 많은 기업이 로열 워런트의 상징성과 그 속에 내포된 ‘브리티시 헤리티지’와 ‘지속 가능한 품질’의 이미지를 활용한 브랜드 마케팅에 집중하는 만큼, 기업 입장에서 워런트 회수는 치명적일 수 있다. 다만 듀어스의 사례는 도리어 소비자로 하여금 듀어스 위스키에 대한 신뢰도를 재확인시켜준 경우로 평가받는 편. 오랜 시간 로열 워런트 위스키로 자리해온 만큼, 발빠르게 기존의 영광을 되찾으며 소비자들에게 구관이 명관임을 톡톡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금, 영국 왕실이 주목하는 위스키
세인트 제임스 궁전 인근에 위치한 베리 브라더스 & 러드에서는 위스키뿐 아니라 와인 등 다양한 주류를 만날 수 있다.
2024년 5월, 새롭게 왕위에 오른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자신의 이름으로 첫 번째 로열 워런트를 발급했다. 특히 위스키 애호가로 알려진 국왕은 주류 기업 중 단 두 곳에만 이 권위를 부여했다. 하나는 런던의 독립 병입자이자 와인 및 증류주 유통업체인 베리 브라더스 & 러드Berry Bros. & Rudd, 또 다른 하나는 아일라에 위치한 싱글몰트위스키 증류소인 라프로익Laphroaig이다. (참고로, 정확히는 D.존스턴 회사D.Johnston & Co.에 부여했는데, 이곳은 라프로익 증류소를 소유하고 있는 산토리 글로벌 스피리츠의 자회사이다.)
이제는 아일라 지역의 관광 명소로 자리 매김한 라프로익 증류소.
아일라의 연기 속으로, 라프로익 라프로익은 찰스 3세와 개인적 인연이 깊은 증류소다. 1994년 6월, 당시 웨일스 공이던 찰스는 아일라섬을 비행기로 방문하던 중 활주로를 벗어나 도랑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겪는다. 큰 부상은 없었지만 날씨 탓에 섬에 체류했고, 이때 인근의 라프로익 증류소를 우연히 찾게 되었다. 아일라 특유의 요오드 향과 강한 피트 향에 반한 찰스는 라프로익에 로열 워런트를 수여하며 왕실과 공식 연결을 맺는다. 이후 2008년, 생일을 기념해 부인 커밀라와 함께 증류소를 재방문했고, 당시 40년 숙성 라프로익에 서명하며 오크통에 사인을 남겼다.
라프로익과 베르 브라더스 & 러드의 메인 라인업 위스키.
왕실 곁의 와인 하우스, 베리 브라더스 & 러드 1698년에 설립된 베리 브라더스 & 러드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및 주류 전문 소매업체로, 세인트 제임스 궁전 인근의 역사적 건물에 본사를 두고 있다. 원래는 차와 커피를 판매하던 가게였으나, 18세기 중반 이후 고급 와인 및 주류 전문점으로 변모했다. 왕실과의 인연은 1760년, 조지 3세 치하에서 와인을 납품하면서 시작되었고, 1903년 에드워드 7세로부터 첫 번째 로열 워런트를 받았다. 이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찰스 3세(당시 웨일스 공)로부터 연이어 인증받았으며, 2024년 5월 찰스 3세 국왕의 이름으로 갱신되었다. 와인 전문 브랜드지만, 뛰어난 블렌딩 실력으로 자체 병입한 위스키 라인업을 선보이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WRITER 정보연(<세상의 끝 위스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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