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컬렉터들이 주시하는 블루칩 작가 살보Salvo(1947~2015)의 회화가 서울에 상륙했다. 글래드스톤 서울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는 작가가 여행을 통해 마주한 현실과 상상, 기억의 파편을 하나의 파노라마로 엮어낸 전시다. 이번 전시를 위해 방한한 ‘살보 재단Archivio Salvo’의 구성원 크리스티나 투아리볼리, 노르마 만조네, 클라라 다고스타를 만나 살보의 예술과 여정, 그리고 그를 둘러싼 기록의 풍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경옥(인물)
(왼쪽부터) 살보 재단 디렉터 클라라 다고스타Clara Dagosta, 살보의 딸이자 재단 공동 설립자 노르마 만조네Norma Mangione, 살보의 아내이자 재단 공동 설립자 크리스티나 투아리볼리Cristina Tuarivoli.
살보 재단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을 설명해주세요.
크리스티나 살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2016년, 딸 노르마와 살보 재단 ‘아르키비오 살보Archivio Salvo’를 설립했습니다. 초기에는 살보의 삶과 예술 세계를 되짚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정리해 목록화하는 데 주력했어요. 2020년부터는 클라라가 합류하면서 재단 운영을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클라라 크리스티나와 노르마는 재단의 설립자이자 중심이에요. 저는 디렉터로서 계약, 리서치, 아카이빙, 커뮤니케이션 등의 활동을 총괄하고 있고요. 저희는 총 4명(엘사 마소티Elsa Massotti 포함)으로 구성된, 작지만 유연한 분업을 자랑하는 팀이에요. 각자의 전문성에 맞춰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뉘기도 하죠. 저희는 종종 이렇게 농담하곤 해요. “크리스티나는 살보 재단의 여왕, 노르마는 외무부 장관, 클라라는 내무부 장관”이라고요. 우스갯소리 같지만, 실제로 각자의 성향과 업무가 잘 반영된 표현이에요.
재단은 어떤 활동에 집중하나요?
노르마 살보는 매우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약 5000점을 목록화했지만, 전체 규모는 여전히 파악 중이에요. 그는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인물이라 작품 기록이나 보관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카탈로그 레조네는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고, 판매 전 작품의 이미지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아카이브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구축해야 했습니다. 작품을 찾기 위해 소장자와 소통하고, 전시나 출판을 준비하며 기록을 추적하는 과정은 마치 탐정처럼 세밀한 조사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어요.
클라라 아카이브 운영은 매일이 다릅니다. 문서 정리나 서신 교환, 리서치, 행정 업무는 기본이고 큐레이터나 수집가와의 미팅이 연달아 이어지는 날도 있고, 전시 대여나 계약에 몰입하는 시간도 있어요. 하루를 일정하게 정의하긴 어렵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 오히려 흥미와 활력을 느낍니다.
2023년 노르마는 토리노에서 운영 중이던 갤러리를 닫고 재단에 전념하게 되었죠.
노르마 갤러리를 접는 결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살보 재단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가 훨씬 넓어졌거든요. 기존 공간은 유지하되 사무 기능을 확장해 방문객을 더 자주 맞이할 수 있게 바꾸었고, 동시에 소규모 전시도 계속 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지금은 살보의 문화적 유산을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면서 다른 작가와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있어요.
작품 보존과 연구에서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노르마 살보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을 구축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일을 내려놓더라도 결국 남는 건 그에 관해 쓴 글일 거예요. 그래서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의 정교함과 책임감을 크게 실감하고 있죠. 정보가 빠르게 유통되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온라인에 남는 자료의 정확성이 긴요해요. 잘못된 정보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그것이 진실로 여겨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저희는 문서 하나, 문장 하나에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미래 세대가 살보의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지 결정짓는 핵심이 될 거예요. 이와 더불어 살보와 그의 작업에 얽힌 기억, 전시 자료 등도 꾸준히 수집하고 있어요.
클라라 살보의 작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이 재단의 핵심 과제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아요. 현재 그가 동시대 예술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또 미래에는 어떤 의미로 이어질 수 있을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살보는 매우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약 5000점을 목록화했지만, 전체 규모는 여전히 파악 중이에요. 아르키비오 살보의 핵심 과제는 아카이브를 더욱 촘촘히 완성하고, 장기적으로는 그의 카탈로그 레조네를 만드는 것입니다.”
Salvo, ‘Stoccarda’, 1994, Courtesy of Archivio Salvo and Gladstone, © Archivio Salvo, Photo: David Regen
살보의 작업은 문화권마다 어떻게 수용되고 있나요?
노르마 예전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주로 전시가 열렸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미국과 아시아에서도 관심이 부쩍 늘었어요. 특히 현재 글래드스톤 서울에서 진행 중인 <Salvo, in Viaggio>
글래드스톤 갤러리와의 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노르마 1986년 살보는 글래드스톤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후 2020년 같은 장소에서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며 전속 작가로 계약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글래드스톤과 꾸준히 협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글래드스톤 브뤼셀에선 고대 기둥과 고고학 유적지를 다룬 전시 <Capricci>
글래드스톤 서울에선 7월 12일까지 <Salvo, in Viaggio>
크리스티나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마다 콘셉트를 고민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워요. 이번에는 그동안 살보의 단독 전시에서 다루지 않았던 ‘여행’이라는 테마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클라라 작가가 방문했던 장소들을 보여주는 데서 나아가 이동과 탐색, 기억 속 이미지까지 여행의 개념을 입체적으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Strasburgo(스트라스부르)’, ‘Stoccarda(슈트트가르트)’, ‘Khiva(히바)’ 등 구체적 지명을 연상시키는 작업부터 ‘Ottomania’같이 이동을 암시하는 작품, 계곡이나 지중해 풍경처럼 지역적 경계가 느슨한 이미지를 전시에 포함했죠. 이들은 모두 한국에서 처음 보실 거예요. 일부는 개인 소장가에게 협조를 받은 것으로, 다른 어떤 전시에서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살보의 작업에서 여행은 어떤 맥락이었을까요?
크리스티나 삶의 또 다른 구성 방식이었죠. 이동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장소에 따라 감각과 시선이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하고 탐구했습니다.
노르마 살보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건 각자의 파라다이스를 찾기 위해서이거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혹은 기억 속 유토피아를 현실 속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에요”라고요.
클라라 살보는 1969년 아프가니스탄을 시작으로 모로코, 구유고슬라비아, 튀르키예, 중국, 태국,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등 수많은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거리나 낯섦의 정도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토리노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마을도 그에겐 충분한 여정이었죠. 이동하는 상태 자체를 탐닉했고, 직접 운전하다가 낯선 마을에 잠시 들르는 목적 없는 떠남도 즐겼습니다. <Salvo, in Viaggio>
Salvo, ‘Forte dei Marmi’, 1988, Courtesy of Archivio Salvo and Gladstone,
© Archivio Salvo, Photo: David Regen
작품을 보노라면, 무언가 반복되는 특징이 발견됩니다.
노르마 살보의 회화에는 자전적인 흔적이 배어 있습니다. 자신이 방문했던 장소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혹은 여러 장면 속에 변주된 형태로 등장하곤 하죠. 시칠리아, 토스카나 해안, 칼라브리아, 포 밸리, 피에몬테의 랑게와 몬페라토 언덕은 작업에 왕왕 등장하는 배경이에요. 미술사 안을 유영해온 상징적 이미지들 역시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고대 건축의 실루엣, 도시의 질서, 풍경의 구조 등 시대와 문명을 초월해 반복되는 ‘원형archetype’적 요소들이 살보의 화면 위에서 새롭게 조합되며 재해석돼요. 살보에게 회화란 기억 너머의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건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즉, 1차원적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오늘날 살보의 회화는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노르마 살보는 “미술사에 포함되길 원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예술가들이 탐구한 주제에 자신만의 언어를 더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고자 했어요. 저는 이 대목이 살보 작업의 핵심이라고 봐요. 1970년대 초, 한때 아방가르드로 여겨졌던 사조들이 예술계 전반에 수용된 탓에 그의 회화 언어는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난 덕분에 작가들이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잖아요. 그런 흐름 속에서 살보의 작업 역시 재조명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살보가 동시대 미술에 선구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는다는 뜻 아닐까요?
그러한 살보의 예술 여정에도 전환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노르마 1973년은 분명한 전환의 해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진, 텍스트, 퍼포먼스 등 여러 매체를 실험했지만, 그해부터 회화에만 몰두하기로 했어요. 당시엔 회화가 주류에서 한발 비켜난 매체로 여겨졌고, 그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보는 큐레이터와 갤러리스트도 적지 않았죠. 그런데도 살보는 주변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평생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단, 그는 매체만 바꿨을 뿐 작업의 뿌리는 그대로였어요. 초기의 개념적 접근은 회화 안에서 다채롭게 변용됐습니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살보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그의 일관성과 결단력 때문일 거예요.
Salvo, ‘Strasburgo’, 2013, Courtesy of Archivio Salvo and Gladstone,
© Archivio Salvo, Photo: David Regen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노르마 사람들이 가끔 물어요. “살보와 알리기에로 보에티Alighiero Boetti(오랜 친구이자 개념 미술가)가 ‘산레모 음악제Festival di Sanremo’에 출전했다는 게 진짜예요?”라고요. 물론 사실은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와요. 또 이런 일화도 있어요. 1970년대 초, 어느 날 살보와 보에티가 카페에서 “세상에서 커피를 제일 맛있게 내리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대화를 하다 한 사람이 “이스탄불!”이라 답했고, 이내 망설임도 없이 “그럼 가자!” 하며 떠났다더군요.
클라라 살보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재단에서 일하며 그의 존재를 아주 가깝게 느껴왔어요. 크리스티나와 노르마가 들려주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그의 성격과 태도를 알아갔죠. 이는 저에게 행운과 다름없습니다. 그중 인상에 남는 일화가 있어요. 노르마의 어린 시절, 방에는 살보가 그린 팔레르모의 산 조반니 델리 에레미티 성당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무성한 나무와 화사한 색으로 채워져서 그녀는 늘 그곳을 그렇게 기억했대요. 그런데 실제로 그곳에 갔을 땐 그림과는 전혀 달라 적잖이 놀랐다고···. 저는 이런 일화가 살보 회화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풍경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기억과 상상, 눈으로 본 것이 겹쳐 완성된 결과물이니까요.
위 질문의 연장선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요?
크리스티나 ‘St. George and the Dragon’, ‘San Giovanni degli Eremiti’ 그리고 제가 살보에게 푹 빠진 그의 첫 작품 ‘Self-portrait as Raphael’이 소중해요.
노르마 아버지가 저를 위해 그려준 그림들. 어떤 것도 그 의미를 대신할 수 없죠.
클라라 특정 작품을 고르긴 어려워요. 생전 살보는 수천 점의 작품을 남겼고, 이들은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게 달라지거든요. 개인적으로는 화산을 그린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볼 때마다 묘한 울림이 있어서요. 정물화 연작도 매력적이에요. 꽃병, 커피포트, 조개껍질, 책 등 일상의 오브제를 다룬 장면 안에는 고전 회화의 전통과 살보만의 언어가 녹아 있죠.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그가 얼마나 애정을 담아 작업했는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작품들입니다.
Salvo, ‘Tre Colonne’, 1990, Courtesy of Archivio Salvo and Gladstone, © Archivio Salvo, Photo: David Regen
살보의 아내 크리스티나 투아리볼리를 살보에게 푹 빠지게 했던 작가의 첫 작품.
Salvo, ‘Self-portrait as Raphael
(Autoritratto come Raffaello)’,
1970, Courtesy of
Archivio Salvo and Gladstone,
© Archivio Salvo,
Photo: Daniele Molajoli
Making History Visible
글래드스톤 갤러리의 파트너 폴라 차이Paula Tsai가 말하는, 살보와 함께 역사와 맥락을 비추는 회화의 현재
폴라 차이 글래드스톤 갤러리 파트너로, 커뮤니케이션과 아시아 지역 사업을 총괄한다. 서울 지점의 설립과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다.
최근 글래드스톤 갤러리가 집중하는 작가나 컬렉팅 경향이 있다면요?
요즘 컬렉터들은 작품을 소장할 때 매우 신중한 편이에요. 단순한 시각적 매력보다는 작가의 철학, 역사적 맥락, 예술사 속 위치를 분석하고 해석하려는 성향이 강하죠. 이는 미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근현대 작가들, 그리고 주요 사조를 이끈 작가들에게 인기가 쏠리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보는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나요?
살보는 본격적인 회화 작업에 몰입한 1973년 이후 작고할 때까지 자신만의 시각언어를 꾸준히 발전시켜온 인물입니다. 젊은 시절 전위 미술 운동인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에 몸담기도 했지만, 그의 진면목은 단연 회화 작업에서 드러납니다.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기에 그는 정형화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냈어요. 초상화, 정물화, 실내외 풍경화, 건축물 그림 등을 유연하게 오가며, 이탈리아적 정서와 빛, 색채, 상징적 구조를 세심하게 탐구한 살보의 회화는 작가의 궤적을 고스란히 기록한 여정이에요. 작품마다 시간과 역사, 개인적 감각이 공존하기에, 살보는 지금 시대 컬렉터가 찾고 있는 ‘맥락 있는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시아 컬렉터에게는 낯설 수도 있을 거예요.
아시아 컬렉터는 이미 국제적인 시각과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고찰합니다. 유럽 중심의 미술사에도 익숙하고, 여행이나 유학 을 통해 작가의 배경과 문화적 맥락에 대한 감각도 갖추고 있죠. 살보처럼 여행으로 자신의 시각을 형성한 작가의 언어는 오히려 이들에게 가깝게 와닿을 수 있어요. 이번 전시의 주제 ‘Viaggio(여행)’는 그런 점에서 컬렉터들의 공감대를 얻습니다. 작품을 만든 장소를 환기하고, 보는 이가 스스로 기억과 감각을 덧입히며 공명하는 통로를 마련해주니까요.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은 글래드스톤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살보 재단과 협업, 전속 계약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순간이 궁금합니다.
처음 재단을 찾았을 때 저는 살보의 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일이 왜 가치 있는지 직감했어요.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살보 재단은 1956년부터 살보와 그의 가족이 거주했던 집에 기반합니다. 1960년대 아르테 포베라가 태동했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토리노는 지금도 다양한 미술관과 창의적 예술 실천이 교차하는 예술적 허브로 기능하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현재 피나코테카 아녤리Pinacoteca Agnelli에선 살보의 개인전 <Arrivare in Tempo>
글래드스톤 서울 개관 이후 기억에 남는 성과는 무엇인가요?
갤러리 소속 작가들을 아시아 관람객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의 미술관, 기획자, 컬렉터가 저희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기울여주고 있어요. 예로 2024년 서울에서 리처드 올드리치Richard Aldrich 개인전이 있었고, 아니카 이Anicka Yi는 중국 베이징 UCCA에서 6월 15일까지 개인전 <There Exists Another Evolution, but In Thi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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