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발트 아샤우어Ewald Aschauer의 ‘MarrakechⅠ-Ⅳ’(2020) 앞에 앉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수잔네 앙거홀처. 귀고리와 팔찌는 이소리 작가의 작품, 가슴에 단 곤충 브로치는 이요재 작가의 작품.
수잔네 앙거홀처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문화 예술을 통해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문화 교류 증진에 힘쓰고 있다. 특히 공예 분야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작년 이맘때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장식 너머 발언>이 떠오른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반짝이는 장신구 대신 작가들의 숨결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 당시 전시에 참여한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현대 주얼리 작가들은 장식품이라는 전통적 장신구의 성격을 해체하고, 개념과 감정을 몸 위에 매단 작은 우주를 펼쳐 보여 눈길을 끌었다. 당시 장신구와 몸이 시대를 말하는 또 하나의 예술 언어임을 증명한 이는 전시의 출발점이자 연결 고리였던 오스트리아 대사 부인 수잔네 앙거홀처다. 그는 “국경을 넘는 프로젝트에선 개방성·유연성·호기심이 핵심”이라며, 서로 다른 문화권이 지닌 시각을 이해하는 것이 협업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언어와 제도 차이로 오해가 생기기 쉬운 상황에서도 항상 해결과 결과에 집중해야 완주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 이러한 철학이 있었기에 작가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지. 흥미로운 점은 수잔네 앙거홀처의 철학이 모국의 수도 빈에서도 펼쳐진다는 것. 먼저, 전통 미술에 집중하는 것으로 유명한 알베르티나 미술관Albertina Museum과 벨베데레 미술관Belvedere Museum은, 각각 ‘알베르티나 모던’과 ‘벨베데레 21’이라는 별도의 전시 공간을 열어 다채로운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또 벨베데레 미술관과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은 수년에 걸쳐 구스타프 클림트를 연구한 결과물을 토대로 반 고흐·마티스·모네 등을 함께 선보이며, 작품 간의 신선한 대화를 구성하기도 한다. 한편, 페르분트 컬렉션Verbund Collection의 페미니스트 아방가르드 섹션은 신디 셔먼·프란체스카 우드먼 등의 작업을 통해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 여성 정체성을 고찰한다. 빈 역시 전통과 동시대를 연결하는 실험을 멈추지 않는 셈. 이처럼 전통과 동시대가 교차하는 도시에서 다진 안목으로, 수잔네 앙거홀처는 지난 5년간 서울에서도 쉼 없이 변화하는 예술 현장을 목도했다. 한국의 따뜻한 환대와 끊임없는 에너지는 그의 가치관에 또 다른 색을 더했다. 이번에 만난 수잔네 앙거홀처는 두 문화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에 더욱 집중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다음 협업 지도에는 어떤 좌표가 찍힐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23년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린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전시
한국에서의 일상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한국에서의 삶은 늘 풍성하고 생기가 넘칩니다. 성북동에 머무는 지금, 집을 나서서 10분만 걸으면 아기자기한 산책로와 숲길, 고즈넉한 언덕이 이어지는데요. 2020년 팬데믹으로 도시가 멈췄을 때 저는 거의 매일 그 길을 걸으며 위안을 얻었어요. 이후 거리 두기가 해제되자 대한민국 예술계는 놀라운 속도로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공연장과 전시장을 가득 채운 젊은 관객을 보노라면, 진정한 ‘럭셔리’란 풍요로운 경험에 기꺼이 시간을 내는 태도임을 새삼 느껴요. 이러한 에너지가 오스트리아, 나아가 유럽 전역에도 퍼지길 바라요.
국내에 오스트리아 문화 예술을 선보이는 자리마다 부인이 계셔서 놀라웠어요.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품으로 이뤄진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2022~2023)과 레오폴트 미술관과 협력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2024~2025) 같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성공적 사례로 기록될 만큼 반응이 뜨거웠어요. 헤르만 니치의 개인전 <총체예술>(K&L 뮤지엄, 2023), 오스트리아·한국 작가 111인이 참여한 <장식 너머 발언>(서울공예박물관, 2024)도 관객과 언론의 호평을 받았고요. 기후변화를 다룬 <피곤한 야자수>(아트선재센터, 2024)처럼 실험적인 협업도 이어졌죠. 최근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믈라덴 야드리치Mladen Jadric가 설계해 더욱 뜻깊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예술 생태계에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빈 소년 합창단 등의 공연도 활발히 열리지만, 한국은 현대 시각예술의 비중이 유독 높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통 미술이 중심이죠. 양국이 전통과 동시대성을 조금씩 조율한다면, 독특한 문화 지형이 펼쳐질 거예요.
두 나라가 꾸준히 교류하면 금상첨화겠어요.
문화 예술 교류는 상호 학습의 장입니다. 예술을 바라보는 접근법,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방식 등은 서로에게 배움이 되고 자극이 되죠. 다만, 성공 조건은 ‘완성도’와 ‘진정성’이에요. 훌륭한 퀄리티가 담보되어야 문화 예술이 관객의 마음에 진한 흔적으로 남으니까요.
결국 부인의 모든 말씀은 ‘전통의 동시대화’라는 지점으로 모이는군요.
전통을 거스르는 시도조차 전통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린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전시
부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국 문화 예술의 구체적 요소는 무엇인가요?
한국 공예에 깃든 절제된 미니멀리즘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도자, 옻칠, 유리, 패션 등에서 드러나는 형태 하나, 색채 하나에 집중하는 섬세한 태도가 작품의 밀도를 끌어올리더군요. 특히 전통 소재를 감각적이고 실용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돋보이는데, 이는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지속 가능성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현재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나요?
서울에서 오스트리아 작가의 개인전과 오스트리아 기관의 컬렉션 전시를 추진하고 있어요. 아울러 서울의 주요 미술관 중 한 곳에서 현대 주얼리 아트를 상설 전시 형태로 소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 장르에서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한국 작가들이 많은데, 전시 공간이 마련된다면 그들의 작업이 많은 이에게 다가가고, 나아가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을 거예요. 반대로, 한국 전통 건축을 주제로 한 전시와 한국 현대 주얼리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오스트리아에 알리는 일 또한 저에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편, 모로코에 거주하던 시절 아프리카 현대미술의 생동감과 강렬한 에너지에 매료됐는데, 언젠가 그 활기찬 흐름을 한국 관객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부인 삶에 어떤 가치관을 더해주었나요?
지난 5년은 단순한 체류를 넘어, 한국과 호흡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도 따뜻한 환대로 맺어진 인연 덕분에 제 내면이 단단해졌죠. 한국의 온정은 마음을 데워줍니다. 무엇보다 숨 가쁘게 변화하는 도시 한가운데서 예술은 묵직한 축이 되어 뜨거운 문화의 흐름을 견인한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다만, 저는 예술이 유행을 좇아 소비되는 물건이 아니라, 시간과 정성으로 관객과 호흡을 맞추는 의미 있는 행위라 믿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하늘 높이 빛나는 문화적 별이에요. 그 궤적을 걸어간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앞으로 펼쳐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술애愛에 물든 대사관저
수잔네 앙거홀처의 폭넓은 문화 예술 사랑을 드러내는 대사관저 내 소장 작품들.
말리카 스칼리Malika Sqalli, ‘Ohne Titel 10/25’, 2018 / ‘Ohne Titel 14/25’, 2018
오스트리아와 모로코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경계에 놓인 우리 존재’를 탐구한다. 구체적인 장소나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열린 태도는 말리카 스칼리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고향·정체성·공간 사이의 연결’이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알비나 바우어 Albina Bauer, ‘Dschellabas’, 2020
수잔네 앙거홀처의 60번째 생일을 맞아 작가가 선물로 제작한 작품. 모로코의 색채와 문양을 담은 작품은 서울로 떠나는 대사 부부를 보호하는 장막처럼 다가왔다고.
에트가어 호네칠레거 Edgar Honetschläger, ‘Chicken Suit’, 2005
닭의 과장된 깃털과 익살스러운 포즈로 동시대 소비문화를 유머러스하게 꼬집는 사진 작품. 보이지 않는 소비의 손길을 무심코 따르는 우리의 본능적 선택을 비판한다.
율리아 아젠바움Julia Asenbaum, ‘Hirschkäfer’, 2019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곤충의 숨결과 숲속의 이슬 맺힌 흙냄새까지 공간에 불러오는 사슴벌레 드로잉. 곤충 생태의 생명력을 실감나게 느끼게 한다.
권순익, ‘무제’ 2019
심오한 사유와 완벽한 기교가 만나, 시각적 아름다움 위에 영적인 울림과 지적 깊이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크리스티네 데 치란치Christine de Grancy, ‘Nike, Turmspitzen’, 1980
예리하고 정교한 시선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크리스티네 데 치란치가 촬영한,
의회 지붕 위에서 승리의 전차를 몰고 있는 니케 상. 저 멀리 슈테판 대성당과 성 미카엘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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