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2025년 6월호

SOFT POWER, STRONG VISION - 기울지 않는 미술, 리만머핀 서울 손엠마

여성 리더십이 우리나라 예술계의 흐름을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바꾸고 있다. 그 주인공인 서울시립미술관 최은주 관장과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한정희 관장, 에스더쉬퍼 서울 김선일 대표와 리만머핀 서울 손엠마 대표를 만났다.

EDITOR 박이현 PHOTOGRAPHER 이우경(인물)

손엠마  미국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장식미술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수년간의 국제 경험을 토대로 국제갤러리 부디렉터를 거쳐, 2007년 청담동에 갤러리 EM을 설립한 경력이 있다. 현재 뉴욕, 런던, 서울에 전시 공간을 둔 리만머핀 파트너로 재직 중이다. 전시 기획 및 작가 발굴에 힘쓰며 한국 동시대 미술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글로벌 미술 시장이 호황과 침체를 오갈 때마다 균형을 지키는 갤러리스트의 역할은 더욱 선명해진다. 아시아 유일의 리만머핀 파트너인 리만머핀 서울 손엠마 대표는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치우치지 않는 중립의 미학을 찾아가고 있다. 안국동의 작은 전시장에서 한남동의 탁 트인 새 공간까지, 그는 서울을 글로벌 미술 지형 위에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그 중심에는 작품과 공간, 작가와 관객을 아우르는 그녀만의 섬세한 균형 감각이 있다. 손엠마의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본 서울 미술의 오늘.


리만머핀의 파트너로 승진하셨습니다. 파트너라는 직함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갤러리 파트너는 경영전략 등 커다란 틀 안에서 이뤄지는 결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갤러리의 방향성과 의사 결정 구조에서 최고위 직책으로서 책임을 지는 자리예요. 2017년부터 리만머핀 서울을 이끌며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돌이켜보면 이 모든 건 지금의 단단한 토대가 된 것 같아요. 리만머핀이라는 글로벌 브랜드를 서울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국내에 있는 해외 갤러리들 가운데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죠. 또 해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김윤신, 성능경 같은 원로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에도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자부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 5명뿐인 파트너 중 1명으로서 세운 목표가 있나요?

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유일한 파트너인 만큼 앞으로도 아시아 출신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하고자 해요. 리만머핀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홍콩 기반의 전문 인력을 보강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베이징·밀라노·애스펀·타이베이·팜비치 등에도 시즌별 전시 공간을 마련해 새로운 시장의 성장 기회에 발맞춰 지리적 확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안국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진행한 세실리아 비쿠냐의 <Quipu Girok(Knot Record)>(2021년 2월 18일~4월 24일) 전시 전경. Photo: OnArt Studio


2017년 리만머핀 합류 이전의 시간으로 잠시 되돌아가볼게요. 대표님께서 미술 분야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궁금합니다.

환기미술관 인턴 경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어요. 2002년 국제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미술업계만의 매력을 알게 됐고요. 2007년 제가 설립한 갤러리EM에서는 샌 정, 성낙희, 이재용, 이진한, 채지민 등 당시 미술계에 갓 발걸음을 내디딘 작가들, 그리고 미술계에서 저평가되었던 작가들과 일하며 그들의 작업 모멘텀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수많은 작가와 전시를 진행했던 일들은 저에게 소중한 자산이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미술업계만의 매력이라면?

여러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미술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감각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고, 세상의 변화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 작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모두가 존재한다는 걸 실감했고요. 그리고 미술 분야의 또 다른 매력은 정해진 진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작가, 평론가, 전시 기획자, 갤러리스트, 아트 딜러, 예술 행정가 등의 역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각자의 색깔을 살릴 수 있는 유연성이 미술업계의 큰 장점이에요.


2022년 한남동으로 갤러리를 확장 이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국동 공간에 방문할 때마다 반전의 미학을 마주했던 것 같아요. 약 20평 규모로 작았지만, 검은색 철골 구조로 된 2층 공간이 전시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죠. 이와는 달리, 한남동 갤러리는 모던한 흰색 입방체 성격이 짙습니다.

뷰잉 룸과 오피스를 겸했던 안국동 리만머핀은 ‘작지만 알차다’라는 표현이 안성맞춤이에요. 높은 층고 덕분에 다양한 설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고, 미술관과 국내외 갤러리가 밀집한 지역 특성상 다른 갤러리와 긴밀한 교류를 할 수 있었죠. 반면, 약 70평 규모의 한남동 리만머핀은 안국동에 비해 탁 트인 개방감을 제공해요. 2개 층을 각각 구획함으로써 독립적인 두 전시를 따로 혹은 연계해 기획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했고요. 햇빛이 풍부하게 드는 2층 전시장의 긴 창문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요소로, 자연광을 중요시하는 리만머핀 뉴욕과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 같은 통일성은 관객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요. 이는 리만머핀이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얼마나 긴요하게 여기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오스제미오스OSGEMEOS의 <Portal of Dreams>(2024년 11월 5일~12월 28일) 전시 전경. Photo: OnArt Studio


코로나 19 막바지 시기, 증강현실(AR) 플랫폼을 활용한 미술품 전시 등 갤러리의 디지털화를 선도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2022년 프리즈 서울 첫 회를 맞아, 에르빈 부름Erwin Wurm과 톰 프리드먼Tom Friedman 등의 설치 작품을 증강현실 플랫폼을 통해 공개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팬데믹 시기 미술 시장에 온라인 및 디지털화 바람이 불면서 기존과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자 했어요. 그러나 엔데믹에 접어들면서 점차 아날로그 전시와 아트페어로 회귀하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실제 작품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일에 무게 추가 다시 기울어진 것이죠. 그런데도 갤러리 웹사이트나 아트시Artsy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세일즈 문의는 계속 들어오고 있어요. 그 결과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을 병행하는 일이 이제는 필수라는 점을 몸소 느끼는 중입니다.


서세옥, 서도호, 성능경, 김윤신, 안나 박Anna Park 등 한국 작가와 전속 관계를 맺고 있는데, 특별한 기억이 있나요?

작가들과 울고 웃었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작년부터 국내외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김윤신 작가와의 만남이 매우 큰 성과로 다가옵니다. 사실 오래전 미술계 지인이 작가님에 관해 이야기를 해줘서 작품 세계는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2023년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시 <김윤신: 더하고 나누며, 하나>에서 직접 작품을 마주했던 그때의 희열은 여전히 잊히질 않네요. 이후 라쉘 리만Rachel Lehmann 대표님과 전시를 다시 방문했고, 자연스럽게 작가님과 일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런던과 뉴욕에서 작가님의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그 여정을 더 의미 있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한국 작가의 전시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유귀미·현남·켄건민·임미애가 참여했던 전시 <원더랜드>(2024), 김창억·홍순명·스콧 칸 등으로 이뤄졌던 전시 <숭고한 시뮬라크라>(2025)를 떠올리면, 비전속 작가들의 움직임이 기대됩니다.

현재 리만머핀 서울은 김윤신 작가와 서도호 작가의 개인전 일정을 조율하는 중입니다. 더불어 다가오는 6월 12일부터 엄태근 게스트 큐레이터가 기획한 정상화·윤형근·맥아서 비니언McArthur Binion·스탠리 휘트니Stanley Whitney의 그룹전이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데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글로벌 미술 시장이 둔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리만머핀 서울이 맡은 역할을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서울의 국공립 및 사립 미술관, 비영리 공간에선 다채로운 전시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광주비엔날레·부산비엔날레·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등 입지를 공고히 다진 국제적 행사도 이를 뒷받침하고요. 훌륭한 젊은 작가를 끊임없이 양성하고 배출하는 미술대학 시스템 역시 미술 인프라의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창조적 예술 환경은 해외 컬렉터층을 서울에 유입시키는 원동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리만머핀의 핵심 가치는 지역 미술 시장 다각화에 있어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소속 작가들을 새로운 지역에 소개하는 것이 리만머핀의 고유한 방향성입니다. 특히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국제적 작가들이 내는 예술적 목소리를 옹호하죠. 세실리아 비쿠냐Cecilia Vicuña, 쉬라제 후쉬아리Shirazeh Houshiary, 하이디 부허Heidi Bucher 등 원로 여성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점도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더욱이 리만머핀 소속 작가들은 갤러리, 미술관의 개인전과 단체전, 비엔날레, 아트페어 등에서 작업을 선보이며 인지도와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데요. 리만머핀 서울의 주된 모토는 아직 한국에 진출하지 않은 해외 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그들의 첫 개인전을 개최하는 것에 방점을 찍습니다.


한남동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헤르난 바스Hernan Bas의 <The Space between needful & needless>(2025년 4월 10일~5월 31일) 전시 전경. Photo: OnArt Studio


뉴욕, 런던 등 갤러리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서울 지점의 전시 기획이나 작가 지원에 어떤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을까요?

아시아 유일 지점인 리만머핀 서울은 단순한 전시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아시아 미술 시장을 연결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예로, 지난 3월 막을 내린 4인 그룹전 <숭고한 시뮬라크라>는 시장 가능성을 염두에 둔 큐레이션이자, 성장세가 주춤한 현 미술 시장 상황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는 전략적 접근이었어요. 전시는 한국 기반 작가들(김윤신, 김창억, 홍순명)로 구성했고, 제반 비용을 효과적으로 절감했으며, 비전속 작가들(김창억, 홍순명, 스콧 칸)의 작품을 활용해 국내외 관객과의 스킨십을 늘렸습니다. 동시에 서울 기반의 평론가 및 큐레이터인 앤디 세인트 루이스Andy St. Louis와 협업해 갤러리 프로그램 내에서의 전시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그룹전을 만들 수 있었고요.


상업 갤러리에서 근무 중이지만, 미술의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갤러리스트로서 어떤 균형을 고민하고 계신가요?

20년 넘게 미술업계에 몸담으며 깨달은 것은 다방면으로 재능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하고,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을 찾아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여러 작가의 걸음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멋진 전시를 접할 때마다 자신의 안목을 조금씩 키워가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관심과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신뢰가 이 일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어요.

요즘 저는 상업성과 비상업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간 지점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발굴하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해가는 균형을 고민하고 있어요. 예술성과 상업성이 조화를 이루려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스스로 맥락화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흐름을 읽어내는 감각은 물론 대중의 즉각적인 반응에 기대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묵묵히 밀고 나갈 수 있는 내공을 지녀야 해요. 그런 저력을 가진 이들과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보람과 감동을 안겨줍니다.


마지막으로, 미술계 선배로서 미술계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무엇보다도 일하면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해요. 즐거움이 있어야 그 일이 삶 속에서 힘이 되고,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는 자세, 포기하지 않고 파고들며 깊이를 더하려는 노력, 어려운 순간에도 버텨내고자 하는 의지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러한 마음가짐이 결국 성장을 끌어낼 테니까요.

목록으로

Related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