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2025년 에스더쉬퍼 갤러리의 파트너로 승진하며 서울 공간의 확장 이전을 주도했다. 유럽의 컨템퍼러리 아트 신과 아시아 미술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온 그는 다양한 국제 작가와의 협업뿐 아니라 지역 컬렉터 및 기관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에스더쉬퍼의 글로벌 전략에 핵심적 기여를 해오고 있다.
글로벌 미술 시장은 빠르게 변하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느리고 단단한 시간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2022년부터 에스더쉬퍼 서울을 이끌어온 김선일은 3년 만에 베를린과 파리를 잇는 글로벌 네트워크 속 파트너가 되었다. 창립자 에스더 쉬퍼Esther Schipper와 플로리안 보이나어Florian Wojnar에 이은 첫 아시아 출신 파트너라는 점은 직함 그 이상을 의미한다. 전시 기획, 홍보, 세일즈, 공간 확장 등 꾸준한 경험과 흔들림 없는 태도로 쌓아온 시간은 이제 에스더쉬퍼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리더십으로 이어지고 있다.
에스더쉬퍼 갤러리가 11년 만에 임명한 파트너입니다. 파트너라는 직함은 어떤 의미인가요?
‘파트너’는 미국식 경영 문화에서 비롯된 개념이에요. 갤러리 업계에서도 파트너는 회사에 대한 책임과 권한이 동시에 주어지는 매우 긴요한 위치입니다. 주니어·시니어 단계를 거쳐 파트너가 되는 것이 일종의 커리어 정점처럼 여겨지죠. 에스더쉬퍼 서울의 대표이지만, 갤러리 전체의 파트너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서울 지점 운영을 넘어 갤러리 전반의 전략과 운영에 영향력을 갖게 되었음을 뜻해요. 예로, 전속 계약을 검토하거나 신진 작가와 협업을 기획할 때 예전에는 베를린 본사에 세세하게 보고해야 했다면, 이제는 저의 판단과 제안이 공식적으로 존중받게 됐어요. 에스더 쉬퍼 대표님, 파트너 플로리안 보이나어와 긴밀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리더십이나 경영에 관한 마인드도 달라졌겠어요.
저의 매출 목표가 달라졌죠.(웃음)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실질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감을 동반합니다. 초창기에는 전시 기획부터 홍보, 세일즈 등 모든 일을 제가 직접 했지만, 지금은 분야마다 저보다 뛰어난 분들에게 일을 맡기고 있어요. 저는 위에서 끌고 가는 방식보다 팀원들과 수평적으로 고민을 나누고 함께 움직이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에스더쉬퍼 서울 팀원들은 제가 입사할 때부터 손발을 맞춘 분들인데, 3년 동안 한 명도 바뀌지 않았어요. 그만큼 서로서로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방증하죠.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사람 간의 궁합이 맞지 않으면, 한 공간에서 지내는 일이 어렵잖아요. 무거운 책임감을 이겨낼 수 있는 건 멋진 동료들 덕분입니다.
기획전 <CONVERSATIONS>
한남동으로 확장 이전한 에스더쉬퍼 서울과 예전의 이태원 공간 모두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는 아닌 듯해요.
이태원 시절에는 회화 작가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의 매체를 활용했기에 회화만 걸 수 있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보다 비정형적인 공간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죠.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을 실험적으로 풀어가기를 바랐어요. 한남동 역시 비슷한 맥락이에요. 비좁은 골목 삼거리에 자리 잡은 불규칙한 구조로 인해 비디오, 설치 등 여러 형식의 작업을 소화하는 데 유용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는 작가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공간 비율을 착각한 몇몇 작가는 전시 오픈에 임박해 작품 크기를 조정했어요. 대형 갤러리 전시에 익숙해진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작업을 다시 들여다보고, 어떻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고요. 에스더쉬퍼 서울은 일종의 ‘작은 극장’과 같습니다. 작가와 관객 모두 안으로 들어와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특한 무대라고 할까요?
한남동으로 확장 이전을 결정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한남동으로 이전은 작가와의 호흡, 공간에 대한 해석, 보는 이의 경험을 모두 고려한 에스더쉬퍼 서울의 장기적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험에 초점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이태원 공간은 규모가 작고 물리적 제약이 많아 작가들이 자신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충분히 펼치기에 어려움이 있었어요. 저 또한 전시를 준비할 때마다 ‘조금만 더 넓었으면, 조금만 더 높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고요. 그래서 작가들이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했으면 하는 개인적 열망을 원동력 삼아 새로운 공간을 열렬히 찾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의류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이던 이곳을 발견했죠. 단번에 ‘여기’라고 확신했습니다. 당시 파트너가 아닌 상황이라 본사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답정너’ 방식으로 에스더 대표님께 “여기여야만 한다”라고 설득했어요.(웃음) 다행히(?) 필리프 파레노의 대형 작품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된 한남동 공간을 보고 에스더 대표님도 만족하셨답니다.
개인적으로 이태원의 전시는 관객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층 쇼룸 속 안리 살라Anri Sala, 에티엔 샴보Étienne Chambaud, 토미아스 라댕Thomias Radin 등의 작품이 발길을 붙잡았거든요. 하지만 한남동의 1층 윈도 갤러리는 밖에서 보는 시야가 좁아진 것 같아요.
이태원 시절,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공간과 주변 대형 갤러리들의 진출 속에서 에스더쉬퍼 서울은 관객 참여와 경험 확장을 지향했습니다. 예로, 에티엔 샴보 전시는 전체 조명을 끄고 관객들이 휴대폰 플래시로 작품을 비추도록 하는 파격적인 방식을 시도했는데요. 처음엔 본사에서 우려했으나, 결과적으로 강렬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티노 세흐갈Tino Sehgal의 작품은 특정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도록 했어요.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체험 중심의 전시로 관객을 유도하기 위함이었죠. 한남동 1층은 좁은 골목 탓에 시야가 제한적인 게 사실입니다. 저희는 이를 역으로 활용해 ‘마중물 역할’을 하는 윈도 갤러리로 운영하려고 해요. 창문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끈 다음, 내부로 들어와 전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요.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관객 참여로 볼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영역이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적는다든지, 작품 사진을 찍는 물리적 행위만이 참여는 아니라고 봐요. 전시장에 들어오는 것부터 참여 아닐까요? 직전에 말씀드린 에티엔 샴보와 티노 세흐갈의 전시, 2022년 ‘키아프 서울’에서 관객의 이름과 방문 시간을 벽에 쓴 로만 온닥Roman Ondak의 퍼포먼스가 좋은 예죠. 나아가 전시장에서 경험과 자신의 기억이 공명한다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22년 에스더쉬퍼 서울 디렉터 임명 이전의 시간으로 잠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일하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궁금합니다.
큐레이터 학과를 졸업한 뒤 문화재단에 입사했어요. 그러나 공공기관 특성상 행정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점점 지치더군요. 잠시 재충전하면서 제가 무엇을 잘할 수 있나 살펴보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갤러리2 정재호 대표님의 ‘미술 시장과 옥션’ 수업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다짜고짜 대표님께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어요.(웃음) 제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갤러리2 옆에 있는 신생 갤러리에 저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전시 기획부터 홍보, 세일즈까지 정말 즐겁게 일했어요. 이후 런던 유니언 갤러리에선 유럽 갤러리 시스템과 미술 시장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LA의 ‘백아트’, 독일과 파리의 ‘초이앤라거’가 연합해 문을 연 공간의 어소시에이트 디렉터로 활동했고요. 이렇게 오랜 활동을 통해 쌓은 신뢰와 인맥이 있었기에 에스더쉬퍼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중 오늘의 저를 존재하게 한 소중한 자산을 꼽는다면, 초기 갤러리에서의 실무 경험이에요.
에스더쉬퍼 갤러리 소속 유일한 한국 작가 전현선이 참여했던 <Dui Jip Ki / 뒤집기>
글로벌 미술 시장이 침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쉬퍼가 서울을 아시아 미술의 허브로 평가하고 확장에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에스더쉬퍼 갤러리는 유행을 좇지 않습니다. 서울 진출은 갤러리의 장기적인 방향성과 한국 미술계의 발전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한 결과예요. 현재 한국 미술계는 미술관의 급성장과 더불어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뛰어난 안목으로 작품을 소장하고, 우수한 전시를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이 이를 증명하죠. 컬렉터들의 학습 의지와 진지한 접근 방식도 주목해야 합니다. 유럽 컬렉터들과 달리 한국 컬렉터들은 작가에 관해 깊이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질문하거든요. 갤러리에서 진행하는 강의 프로그램에도 꾸준히 참여하고요.
최근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전현선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었죠.
전현선 작가의 작업은 한국적인 특성과 동시대적 감각을 동시에 지녔어요. 갤러리 내부에선 작가의 작업이 한국적인지 논의하지 않았지만, 해외 컬렉터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적인 감성을 느낀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전현선 작가는 수채화를 기반으로 몇 개의 재료를 섞어 독특한 질감과 물성을 창조하는데요. 그의 독창적인 방식은 컬렉터들에게 호응을 얻었고, 해외 미술계에 한국 작가를 소개하는 데 이상적인 첫 단계가 되었습니다.
베를린, 파리 등 갤러리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서울 지점의 전시 기획이나 작가 지원에 어떤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까요?
에스더쉬퍼는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갤러리를 운영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강조해요. 각 지점의 디렉터는 그 지역의 문화와 커뮤니티를 잘 이해하는 인물입니다. 예로, 파리 지점 디렉터는 15년 이상 베를린에서 일한 프랑스 사람인데, 파리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를 확장해나가고 있어요. 오랫동안 쌓아온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내실 있는 프로그램과 함께요. 이러한 글로벌 네트워크는 서울 지점에도 긍정적 효과를 줍니다. 베를린과 파리의 컬렉터가 한국에 왔을 때 서울 지점을 꼭 방문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익숙한 작가의 작품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맞춰 새롭게 해석한 방식을 보며 “이 갤러리는 단지 본사의 지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지역 문화와 진지하게 교류하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죠. 마찬가지로 작가들도 자신의 작품이 서울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걸 보며 놀라워합니다. 이처럼 에스더쉬퍼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컬렉터에게는 신뢰 있는 접근을, 작가에게는 다양한 발표 기회를, 갤러리에는 문화 간 확장의 발판을 마련해줍니다.
상업 갤러리에서 근무 중이지만, 미술의 지나친 상업화를 우려하실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갤러리스트로서 어떤 균형을 고민하고 계신가요?
요즘 온라인이나 SNS 플랫폼에서 작품 이미지만 보고 실제 경험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미술 경험이란, 원론적일지라도 작품을 직접 보고 공간의 공기와 작품의 질감, 조명, 크기 등을 온몸으로 체감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작품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취향과 안목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만들어지지요. 이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공존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투자가치로 접근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진심으로 공감하는 작가를 발견하고 점차 예술적 가치를 조명했는데, 결국엔 상업적 가치까지 지니는 사례를 자주 보았어요. 물론 ‘이 작가를 사면 오른다더라’라는 접근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성숙한 컬렉터는 작가와 작품의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선택하며, 이를 통한 감각의 축적은 결국 예술성과 상업성을 아우르는 컬렉션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미술계 선배로서 미술계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그동안 외국인으로, 젊은 여성으로 겪은 속상한 일도 있었지만 타협하거나 중도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거예요. 화려한 타이틀이나 커리어를 뒤따르기보다는 성실함과 도전 정신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하고요. 분명한 건 지름길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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