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최은주 관장,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한정희 관장.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서 본관과 분관을 총괄하며 서울의 미술 정책과 미술관 운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5년간 재직하며 학예연구1실장 등을 역임했고, 연구와 전시 기획 실무를 두루 경험했다. 이후 경기도미술관(2015~2019), 대구미술관(2019~2023) 관장을 역임하며 공공 미술관의 운영과 공공성을 강화하는 기획과 정책을 이끌었다.
한정희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장. 관람객 중심의 사고와 국내 최초 공립 사진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숙고하며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을 준비 중이다. 2011년부터 2023년 1월까지 대림미술관, 디뮤지엄의 교육과 관람객 서비스 부서장, 대림미술관 실장, 그리고 두 미술관의 부관장으로 근무하며 미술관과 관람객, 아티스트가 소통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민해왔다.
서울이 예술로 더 넓어진다. 8개 거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네트워크형 미술관’ 체계 위에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감각의 공간이 개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성과 실험성을 동시에 껴안은 거대한 흐름의 교차점에서 서울시립미술관 최은주 관장과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한정희 관장이 마주 앉았다. 그 자리에선 서울이라는 도시가 예술을 통해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하는지에 관한 깊은 사유가 오갔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전경. ⓒ 윤준환,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서울시립미술관은 8개 거점을 아우르는 ‘네트워크형 미술관’ 체계를 목표로 하고 있어요.
최은주 서소문본관, 북서울미술관, 남서울미술관, 사진미술관, 미술아카이브,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백남준기념관, 서서울미술관(11월 개관 예정)을 묶어 유기적인 네트워크로 운영하려고 해요. 핵심은 각자의 색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서소문본관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 작가 전시를 기획하는 중심축 역할을 하고, 북서울미술관은 지역 주민과의 교류 및 실험적 전시에, 남서울미술관은 조각과 건축에 초점을 맞추는 형식이죠. 더욱이 사진미술관과 뉴 미디어 아트에 특화한 서서울미술관을 개관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은 미술관이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소장품 관리와 전시 기획의 효율성을 높이며, 각 관의 전문성과 자원을 상호 융합하고 공유하는 토대가 됩니다. 2024년 기관 의제였던 ‘연결’을 주제로 개최한 소장품 기획전 <SeMA 옴니버스>
일각에서는 서울에 미술관이 너무 많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최은주 숫자의 과잉보다는, ‘메갈로폴리스로서의 서울이 어떤 문화 인프라를 품을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싶어요. 최근 도쿄를 다녀오면서 두 도시의 미술관 수용력을 비교해봤습니다. 도쿄는 국공립, 사립, 디자인 전문관 등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미술관이 존재하더군요. 당시 저는 ‘서울은 여전히 가능성이 남아 있는 도시’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하지만 결국 관건은 ‘질’입니다. 서울에 문화 기관이 많은 건 사실인지만, 과연 콘텐츠의 질이 충분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는 재고해야 할 부분이에요. 이에 따라 저 또한 서울시립미술관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공공 미술관과 도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최은주 큐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한 1989년부터 “미술관은 단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 아닌, 우리의 삶의 단면을 비추는 장소여야 한다”라고 강조했어요. 그런데 최근 국내 미술관 지형을 보면, 그런 시대가 도래했음을 실감합니다. 개인, 가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미술관을 찾고 있으니까요.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미술관에 가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잖아요. 막상 가더라도 “여긴 내가 올 곳이 아니네”라며 낯설어하는 분위기였고요.
한정희 맞아요. 한동안 해외 콘퍼런스에서 자주 언급되는 ‘로컬리티’, ‘커뮤니티 뮤지엄’ 같은 개념이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확실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네트워크형 미술관 체계 덕분에 굳이 도시 중심부까지 가지 않아도, 자신이 사는 곳 20~30분 거리 안에서 전시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죠. 이는 일상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발견하고, 사색하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지역사회 안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에 참여하는 원성원의 ‘완성되지 않은 건축, 지어지는 중인 자연’(2025). 미술관 건축에 사용된 재료들의 자연적 기원을 추적한다.
이에 발맞춰 미술관들도 관객과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하고 있죠.
최은주 현대미술은 표현 방법이 낯설거나 과격하다는 인식 탓에 공공성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지만, 오히려 지금의 미술관은 여러 전시와 실험을 통해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 있어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 보여주던 것에서 나아가, 아름답지 않은 것, 개인의 삶과 감정, 고독 등을 다루며 균형 잡힌 시선을 제안하는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도, 의견이 나뉠 수도 있을 거예요.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미술관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한정희 현대미술은 특정 주제를 옳고 그름으로 나누기보다는, 수많은 관점과 시선이 조화를 이루는 장이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정답을 제시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심사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질문을 던지고, 논의하고, 세계를 확장하는 ‘공존의 공간’이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역시 그런 철학 아래 다층적인 담론이 흐르고, 누구든 자신만의 스타일로 머물며 해석할 수 있는 열린 미술관을 지향하고 있어요.
말씀하신 내용을 실현한 사례가 있다면요?
최은주 서소문본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말하는 머리들>(~7월 6일)을 꼽고 싶습니다. 특히 청각장애인인 김은설 작가의 작업을 마주하며, 감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소리를 진동으로 느끼는 방식에서 출발한 단어 ‘므브프’를 활용한 작가의 작업은 그동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감각의 구조를 전복시켰거든요. 미술관이 작품을 ‘보여주는’ 행위에 관해서도 다시금 고민하게 됐습니다. 노동과 비노동, 장애와 비장애 등 사회가 만들어낸 구분을 미술관이 어떻게 동일한 맥락 안에서 수렴하고 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죠. 올해 서울시립미술관의 의제는 ‘행동’인데, 실험적 전시로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진전된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정희 정식 개관 전이라 아직 프로그램을 세팅하는 단계지만, 관람 진입 장벽을 낮추는 첫걸음은 ‘관객을 아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사진미술관은 도심에서 다소 떨어진 지역에 있고, 사진이라는 매체에 특화된 만큼 관람객 구성을 예측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문을 연 다음에는 실제 방문한 사람들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면밀히 관찰하고자 합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감각의 구조를 전복시킨 청각장애인 작가 김은설의 ‘진동하는 몸의 대화’(2023).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말하는 머리들>(~7월 6일)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미술관은 네트워크형 미술관에 방점을 찍는 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번 개관이 서울의 미술 지형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 보시나요?
한정희 미술관 한 곳이 추가되는 것을 넘어, 서울 미술 생태계의 구심점을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심었다고 생각합니다. 창동은 서울시가 문화 확장을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지역이에요. 실제로 문화적 밀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여기에 사진미술관이 더해지면서 광화문과 경복궁 일대에 집중된 예술 흐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성을 선보일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거죠. 물론, 진정한 거점으로 기능하려면 차별성이 필요합니다. 사진이라는 매체적 특성에 기대기보다는, 미술관만의 시각과 언어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여운을 남길 수 있어야 관심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요? 언젠가 “사진미술관은 꼭 가봐야 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오가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단기적인 화제성이 중시되는 시대, 미술관의 고민이 궁금합니다.
최은주 2025년 서울시립미술관은 ‘행동’을 기관 의제로, ‘행성’을 전시 의제로 삼아 지속 가능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행성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전시 의제는 우리가 사는 지구를 걱정하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담론에만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연결해보려 해요. 예로, 전시 브로슈어를 QR코드로 전환했어요. 또 인쇄물 제작 물량을 기존 70% 수준으로 축소했는데, 이는 소독을 거쳐 재사용할 수 있게 했고요. 그리고 탄소 절감 수치를 직접 산출하는 동시에 예술적 접근도 놓치지 않으려 해요. 연말에는 최재은 작가와 협업해 예술이 어떻게 행성을 사유하고, 어떻게 관객에게 문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전시로 풀어내려 합니다. 덧붙이자면, 저희는 유행하는 테제를 좇는 대신, 철저히 공부하며 방향을 설정해요. 올 초 큐레이터 워크숍에 AI 전문가, 미래학자를 초청해 의견을 나눴는데요. 이미 내년, 내후년 의제까지 설정된 상태로,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성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정희 서울시립미술관의 의제라는 큰 틀을 따라가되, 신생 미술관의 지속 가능성은 처음 세운 목표와 방향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사진미술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른 기관이 맡기 어려운 한국 사진사 정립을 위한 연구, 주요 사진 작품 수집 및 보존 등을 수행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연속성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과업이야말로 사진미술관이 지닌 본질적 임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내 최초의 공공 사진 미술관의 수장으로서 한정희 관장님이 세운 목표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한정희 사진을 시대의 감수성과 시각 언어를 담아내는 예술 형식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현재 예술성과 사회적 메시지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기획 중인데요. 동시대 작업 조명, 소장품 전시, 대중성과 전문성을 아우르는 마스터피스 소개, 신진 작가와의 협업, 사진 축제의 재정비 총 5가지 접근 방식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교육은 대상별 특성을 반영해 설계 중이에요. 어린이, 청소년, 성인, 전문가, 지역 주민 맞춤형 과정은 물론, 향후 사회적·신체적 제약이 있는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에 참여하는 서동신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2025). 사진미술관에 입고된 물품을 직접 촬영한 사진을 소재로 이용했다.
사진미술관이 구축한 2만여 점의 방대한 컬렉션도 눈에 띕니다.
한정희 컬렉션은 한국 사진이 걸어온 여정을 시기별로 정리하는 작업에서 출발했습니다. 초기 사진술 도입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며, 그 안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와 사건들을 선별했어요. 이어 국내 주요 미술관들의 사진 소장 현황을 조사해 상대적으로 소외되거나 누락된 시기와 주제를 파악했고, 인지도보다는 사진사적 중요성과 보존의 시급성을 기준으로 삼아 26명의 작가를 우선 선정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진 작품 7000여 점을 포함해 노트·문서·필름 등의 자료 2만 점 이상을 수집했으며, 필름 전용 보관실을 별도로 운영 중입니다. 아카이브는 개관전 <광채光彩: 시작의 순간들>(5월 29일~10월 12일)처럼 한국 사진사의 결정적 장면과 작가를 담아낸 전시, 연구 및 교육 자원으로 폭넓게 활용할 예정입니다.
서소문본관의 리모델링 그리고 사진미술관의 개관전 <광채: 시작의 순간들>과 <스토리지 스토리>를 기점으로, 미술관 운영은 어떤 방향을 그리고 있나요?
최은주 서소문본관 전시동의 기능과 환경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전면적으로 개편하려고 합니다. 노후화된 공조 설비와 교육 및 보존 인프라 전반을 개선하려고 해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외관은 유지하되, 내부는 유연한 활용이 가능한 구조로 재정비할 계획입니다. 워낙 대형 공사인지라 2029~2030년 즈음에 완공될 것으로 보여요. 한편, 독립적인 전시 기획 역량을 토대로 해외 협력 관계도 점차 넓혀가고 있어요. 대표적으로, 아부다비 음악예술재단과 체결한 파트너십의 일환으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마나라트 알 사디야트Manarat Al Saadiyat’ 미술관에선 6월 30일까지 작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 <SeMA 옴니버스 _ 끝없이 갈라지는 세계의 끝에서>
한정희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라는 이름에는 ‘박물관’이 아닌, ‘미술관’이라는 명칭을 택한 이유가 담겨 있어요. 단순히 사진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진을 예술의 언어로 해석하고 탐구하는 창의적 장소로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저는 공공 미술관이기에 예술성과 공공성 사이에서 더욱 책임 있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루기 낯선 주제, 불편한 감각, 예상치 못한 방식 앞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사진이라는 장르 안에 머무르지 않고 회화, 패션, 다큐멘터리, 순수예술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하려는 작가들이 마음껏 시도하고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기존의 경계와 틀을 부드럽게 허물고, 매체를 통해 질문을 나누며 감각을 넓혀가는 열린 장. 그것이 제가 사진미술관에서 실현하고 싶은 공공 미술관의 역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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