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호 정치학을 전공한 아트부산 대표이자 페어 디렉터. 올해까지 4회 연속 페어를 이끌어왔다. 도시와 예술의 관계, 아시아 미술 생태계의 연결성과 연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아트페어를 넘는 문화 플랫폼으로의 확장을 실험하고 있다.
5월의 부산은 예술이 머무는 계절이다. 바닷바람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결마다 작품과 사람이 천천히 스며든다. 이러한 정경에서 출발한 부산의 첫 아트페어인 아트부산은 그동안 미술 작품을 거래하던 장터에서 나아가, 도시의 리듬을 묘사하고 지역과 관객이 만나는 새로운 장면을 그려왔다. 그 중심에 정석호 대표가 있다. 그는 예술을 일상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며, 미술이 어떻게 삶과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다. 그래서일까. 그가 걸어온 길 위에는 조용하지만 선명한 시선이 남는다.
‘정치학을 전공한 아트페어 대표’란 표현이 이젠 어색하지 않겠어요.
처음엔 미술과 거리가 멀었어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2011년 어머니(손영희 이사장)께서 ‘아트쇼부산’을 설립하셨고, 2012년 아트부산의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엔 해외 손님의 통역과 안내 정도만 도와드렸는데, 갈수록 언어는 통해도 대화는 쉽지 않더라고요. 그분들은 전 세계를 누비며 갤러리·미술관·비엔날레·아트페어를 일상처럼 즐기는 분들인지라 이야기가 겉돌았던 것이죠. 그런데도 ‘억지로라도 미술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라는 생각은 사실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웃음) 하지만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달라지더군요. 워낙 예술적으로 열린 도시다 보니 자연스럽게 전시를 보게 되고, 다양한 관점과 이슈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미술이라는 렌즈로 ‘내가 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탐색하는 자신을 발견했어요. 또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과 예술이 말하는 방식이 맞닿아 있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이를 통해 ‘나도 미술 신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고, 2020년 아트부산부터 본격적으로 팀에 합류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보낸 시간이 아트부산과 디파인 서울을 운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베를린은 미술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지역 컬렉터층은 얇은 특이한 시장이에요. 오프닝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티셔츠에 백팩을 멘 채 등장하고, 격식보다는 편안한 소통을 중시하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 역시 미술을 함께 나누는 대상으로 편하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아트부산과 디파인 서울을 준비하면서 단순히 작품을 판매하는 페어를 넘어, 도시의 결 속에 예술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어요. 그중 디파인 서울은 요즘 컬렉터들 취향과 태도에 응답하는 플랫폼입니다. 소위 MZ 컬렉터들은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잖아요. 작품을 구매한다는 건 이제 “이게 나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고, 그만큼 컬렉팅의 영역도 공예, 아트 토이 등으로 확장되고 있어요. 오늘날에는 미술 작품만이 아니라, 가구와 오브제가 어우러지는 공간 전체의 조화가 중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유영국 작가가 한 말인데, 이를 곱씹으면 오롯이 자신의 감각에 반응하는, 다시 말해 외부의 기준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돼요.”
아트부산과 디파인 서울의 지향점은 각각 무엇인가요?
아트부산은 클래식한 형태의 아트페어예요. 회화, 미디어, 설치 등 다양한 현대미술 장르를 아우르죠. ‘지역성’이 키워드라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나 기관과의 협업에도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디파인 서울은 실험적 색채가 짙어요. 디자인과 미술, 실용성과 미학 사이를 넘나들며 유연한 시각언어를 제안합니다. 성수라는 지역 특성상 20~40대의 관람 비중이 높고, 실제 컬렉팅은 주로 30대 이상에서 이뤄지고 있어요. 디파인 서울은 작품을 사는 행위보다는 미적 감각을 확장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삶의 공간에 예술적 영감을 더하는 경험의 장이라고 할까요? 전통적인 컬렉터층과 미술 시장의 맥을 잇는 것이 아트부산이라면, 디파인 서울은 새로운 세대가 시각예술을 누리고 탐색할 수 있도록 마련된 장입니다. 그래서 두 행사를 구성할 때는 서로의 정체성이 겹치지 않도록 콘텐츠를 정교하게 조율하고 있어요.
이번에도 체감했지만, 5월의 부산은 시각예술의 열기로 뜨겁더라고요.
아트부산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감도와 리듬을 환기하는 존재’라는 평을 들을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희가 특별히 잘해서라기보다는 ‘5월의 부산’이라는 계절성과 장소성이 설렘 포인트로 작동하는 듯해요. “아트부산 할 때지? 맞춰서 한번 내려가볼까?” 하는 기대요. 이에 발맞춰 저희도 ‘부산아트위크’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실제 5월의 부산을 찾는 관객 중 40%가 타 지역과 해외에서 온 컬렉터예요. 그런데 컬렉터라고 해서 매번 작품을 구매할 순 없잖아요. 그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이유에는 도시와 예술이 만들어낸 정서를 즐기고 싶은 바람도 분명 있을 거예요.
부산이라는 도시를 거시적인 ‘예술의 터’로 보고 계시네요.
세계적인 아트페어조차 결국은 소수를 위한 시장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 안에서도 경계가 생긴다는 거예요. 누군가는 부스 앞에서 ‘내가 들어가도 될까?’라며 망설이고, 어떤 아이는 조심하라는 눈치를 받기도 하죠. 메이저 갤러리 부스일수록 그런 벽은 더 뚜렷하게 다가오고요. 마찬가지로 저도 멈칫할 때가 있어요. 예술을 즐기는 데 자격이 따로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희는 단지 아트페어를 기획한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5월의 부산만큼은 누구든 ‘보이지 않는 거리감’ 없이 예술을 향유하셨으면 해요. 더 많은 이에게 열려 있는 아트페어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컬렉터로서든 기획자로서든 저의 일관된 기준이었습니다. 올해는 그 연결의 가능성을 여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어 뜻깊었어요. 도쿄 겐다이와의 연간 파트너십을 시작으로 개러지 현대미술관, 아트 자카르타, 서퍼클럽 홍콩 등과 협업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도심 곳곳에서 장소 특정적 전시와 부산아트위크가 함께 펼쳐졌으니까요. 또 VIP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 컬렉터들이 지역 갤러리, 작가 스튜디오, 프라이빗 컬렉션을 직접 방문하며 도시의 결과 예술이 밀도 있게 연결되는 시간이라고 느꼈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대표님의 활동과 정치학의 관계가 궁금해집니다.
정치학은 어떤 이슈를 해석하거나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풍부하게 해주는 토대가 됩니다. 저는 미술을 미적 대상으로만 보지 않아요. 오히려 작품에서 사회적 메시지, 시대성 등을 읽어내고자 해요. 이는 전시와 컬렉팅을 계획할 때 하나의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취향의 나열이 아닌 ‘왜 이 작품이어야 할까?’, ‘작품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런 대표님의 취향이 담긴 소장품을 몇 점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컬렉션인 임창민 작가의 ‘Into a Time Frame’(2014)은 작품 속 병원 복도에 있는 창틀 너머로 잔잔히 움직이던 동해의 파도에 매료돼 2015년에 구매했어요. 2024년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 제시 천Jesse Chun의 영상 설치 작품 ‘시: sea’(2022)도 매력적이에요. 바다를 투영한 스크린 아래 유리를 두고, 그 위에 돌을 얹어놓은 작품인데, 이를 보노라면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참! 이 작품에는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작가의 영상 작품을 개인이 소장한 건 제가 최초라 하더라고요. 그러니 추후 작품이 미술관 전시에 출품될 때 작가에게 꼭 연락해달라는 인보이스를 작성해달라고 해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어요. 이 외에도 안다빈 작가의 ‘Trace of Time(2)’(2024)은 빛의 명암을 서정적으로 표현해 묘한 인상을 자아내고요. 어쩌면 하찮다고 여겨지는 재료로 제작한 이안리 작가의 설치 작품 ‘모이와 등 I’(2022)은 생명의 순환을 떠오르게 합니다.
프레임 안에 머물던 작품이 점점 밖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재테크와는 거리가 먼 작품을 알아본다”라고 말해요. 하지만 제시 천 작가의 일화처럼, 저는 작품의 경제적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얻고 있어요. 보통 국공립 미술관에서 주목할 법한 작업에 끌려서 아무도 쉽게 하지 못하는 저만의 소중한 기억을 쌓아가고 있으니까요.
인터뷰를 하고 있는 아트부산 사옥 3층을 보면, 차가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지닌 작품이 눈길을 끌어요. 특히 톰 하우스의 ‘Meadow Way Simulation’(2023)이 그렇습니다.
톰 하우스의 작품은 창을 매개로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거나 분리합니다. 바쁜 현대인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안온한 정원 풍경을 보는 것 같기도 해요. 흡사 미술을 감상하는 현대인이 떠오르지 않나요? 3층을 그렇게 꾸민 건 우리가 어떤 회사인지, 무슨 일을 위해 이곳에 모여 있는지를 자각하기 위함이에요. 공간 구석구석에 작품이 있어야 일상에서도 우리만의 정체성과 예술적 가치를 되새길 수 있죠.
평소 작품을 어떻게 컬렉팅하나요?
작품의 수익성보다는 작가의 시선과 서사에 집중하려 합니다. 단기적인 투자가 아닌 장기적인 감응이 컬렉팅의 본질일 테니까요. 저는 전시나 아트페어에서 눈길이 간 작품이 있어도 바로 구매하지 않고, 다음 행사에서 다시 확인한 후 확신이 들 때 선택합니다. 물론, 그사이 작품이 다른 사람의 품으로 가면 아쉬움이 들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남아 있는 작품을 다시 마주할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작품을 구매할 때는 갤러리에 가서 갤러리스트에게 이것저것 꼼꼼하게 물어보는 편이에요. 아트페어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형평성을 고려해 자사 페어에서의 구매는 지양합니다.
언젠가 꼭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가나 출신 작가 서지 아투크웨이 클로티Serge Attukwei Clottey가 버려진 물건과 폐기물로 제작한 태피스트리 형식의 작품이요. 그의 작업 과정에는 지역 주민이 참여하는데, 이는 공동체의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이기도 해요. 지역 공동체가 그대로 스튜디오이자 작업이 되는 셈이죠. 돌아보면, 저는 아트페어든 작업이든, 이들이 탄생하는 과정에 녹아 있는 지역성과 공동체성에 깊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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