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덕주 작가가 2009년 제작한 명주 가리개.
다채로운 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조각보 역시 최덕주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럭셔리의 표상은 장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흔히 사용되는 ‘한 땀 한 땀’이라는 장인 정신의 관용적 표현 속 ‘땀’은 실을 꿴 바늘로 한 번 뜨는 것 혹은 그 과정에서 생긴 작은 자국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의 근간은 섬유공예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섬유는 가늘고 부드럽지만 강하고, 투박하지만 섬세하다. 그저 ‘오늘은 무엇을 지어볼까’ 하는 마음만 지닌 채 성실한 손놀림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무늬가 생기고 가닥이 잡힌다. 문자가 모여 낱말과 문장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되듯 한 올의 섬유는 치열하게 일일이 얽히고 겹겹이 들어차며 비로소 하나의 완성품이 된다. 다만, 섬유는 오랫동안 미술품보다 생활품의 영역에 더 가까웠다. 가장 직접적인 예가 바로 규방 공예다. ‘규방’은 조선 시대 여인의 거주 공간을 뜻하는 단어로, 규방 공예는 규방에 모인 여인들이 바느질을 돕는 소품을 비롯해 옷과 장신구, 생활 소품 등을 만드는 것을 통칭한다. 과거의 여성들은 자신의 손에서 탄생하는 결과물을 통해 강인하고도 주체적인 정체성을 표현해왔다. 대개의 공예가 그러하겠지만, 우리가 입고 걸치고 덮으며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바로 섬유공예품이었기에, 그 아름다움과 완성도보다도 생활적인 측면이 부각되어 바느질로 탄생한 일련의 결과물은 작품보다는 생활용품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중반 이후, 삶의 세계와 동떨어진 모더니즘 사조의 공허한 형식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흐름이 발생했고, 공예의 형식이나 재료가 가진 특질을 작가 의식을 보여주는 도전의 도구로 사용하며 그 시각은 서서히 변화했다. 그 덕에 생활성에 가려진 공예의 조형성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미와 실용의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섬유공예의 가치 확장 역시 힘을 얻게 됐다. 특히 작품에 사용되는 섬유의 원료나 제작 기법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고찰은 부드러움, 여성성, 가변성 등 전통적으로 섬유공예를 특정해왔던 개념의 한계를 무너뜨렸다. 짜기, 엮기, 꿰매기, 묶기, 잇기 등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특징적 요소 역시 장르의 고유성을 뒷받침하는 주요 요소가 됐다. 나아가 섬유공예는 평면을 넘어 입체 오브제, 설치미술이 되는 한편, 모시나 명주 같은 전통 재료 대신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 등 기존의 관례 역시 탈피하고 있다. 섬유가 캔버스 이상으로 예술가의 창조성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 셈. 작년 연말 한국공예진흥원이 선정한 올해의 공예상을 수상한 장연순 공예가 역시 한국 전통의 쪽염과 금박 기법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섬유 조형의 형태를 접목하는 독창성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런가 하면 전통 조각보를 계승하는 최덕주 작가는 세계적인 텍스타일 아티스트 미나 페르호넨과 협업을 통해 조각보의 새 지평을 여는 시도를 감행하기도. 이렇듯 새로운 부피와 형태, 미감과 메시지를 발산하는 과감한 실험가이자 한 땀 한 땀 전통의 가치 또한 수호하는 섬유공예가들의 작품은 이제 규방 공예라는 단어로 미처 담아내지 못할 만큼 전위적인 것이 되어가는 중이다.
기억을 잇는 섬유 조형, 송해원
“재봉틀 소리가 청각을 자극하고, 이 소리는 이내 실속에 서서히 스며든다. 실로 표현한 텍스처에 드리운 일련의 단어들은 섬유 망에 걸려든 감정의 포획물이다. 때로는 섬유와 얽힌 이 단어들이 넓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의 부표가 안정감을 주듯이 내게는 따뜻한 위안이 된다.” 작가 노트에서 엿볼 수 있듯 송해원 작가가 비치는 패브릭을 실로 자유자재로 재봉한 섬유 조형물은 작가 주변을 둘러싼 기억, 보이지 않는 감정을 대변한다. 이를 위해 프리모션 스티치와 패브릭 머니퓰레이션 기법으로 선과 선 그리고 면과 면을 이어 작품에 입체감을 부여했다. 특히 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글의 윤곽선을 형상화한 자수 패턴의 이미지는 작가 내면의 시어를 의미하는 것이며, 고요 속에서 삶을 이어가고픈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정제된 미학의 조각보, 최덕주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정제된 아름다움을 작품 세계의 근간으로 삼는 최덕주 작가. 최 작가의 조각보에서는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보는 듯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색의 배합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조각보가 예술 작품의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다. 이를 위해 화학 염색은 일절 배제하고 쪽, 잇꽃, 치자, 쑥, 양파 등 천연 재료로 직접 염색을 한다. 발효 시기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색의 채도, 명도를 면밀히 파악해 오묘하고도 깊이 있는 색을 구현해내는 것. 안동포, 한산모시, 명주 등 우리나라 전통 천에 천연 기법으로 염색해 탄생시킨 색으로 표현한 조각보 작품들은 작가만의 감성이 담긴 고아한 매력을 품고 있다.
손끝에서 탄생한 섬유 덩어리, 인영혜
인영혜는 무게와 강도를 견딜 수 있는 유연하고 단단한 소재의 섬유를 선택해 오브제와 아트 퍼니처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섬유 작업을 선보여왔다. 직접 손으로 원단을 엮어 만드는 ‘핸드 소잉Hand Sewing’ 기법은 작가만의 고유 시그너처다. 작품의 울퉁불퉁한 표면 질감은 작품의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를 이루는 동시에 복잡한 관계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고민을 관객에게 전하는 창구로 기능한다. 작가는 몇 개의 도구를 제외하고는 손만을 이용해 작품과 신체의 거리를 좁히고, 노동집약적인 과정을 통해 본인의 이야기와 감정을 불어넣어 작업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 중 다수는 벨벳 소재로 만들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 손으로 직접 원단을 엮는 작품 제작 방식에서 강도를 견디지 못한 원단이 곧잘 찢어지는 시행착오를 겪은 후 지금의 소재를 선택하게 됐다.
실타래로 이은 자연과 삶, 정소윤
정소윤은 유연하면서도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섬유로 자연과 인체를 담은 조형 작업을 하고 있다. 섬유 예술을 전공한 그는 섬유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실을 이용해 드로잉을 하듯 회화의 느낌을 살려 한 폭의 수묵화처럼 표현한다. 실은 재봉틀로 인해 서로 엮이고 엮여 단단한 면이 되어 공간을 드로잉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특히,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을 거듭한 그는 결국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거대한 자연 앞에 작은 하나임을 포용해 솔직하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자 한다. 섬유가 가진 촉각과 조형미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풍경은 초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복잡하고도 오묘한 사고의 은유적인 표현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섬유로 빚은 건축, 정현지 정현지
작가는 전통 규방 공예의 기법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특히 조각보 제작 기법을 활용해 평면적인 섬유의 구조를 건축적인 입체 형태로 치환하는 데 집중한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쌈솔’ 기법이다. 씨실과 날실의 결을 따라 반복적인 라인을 형성하고, 감침질을 통해 구조적인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것. 공간, 건축적 요소는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이며 ‘벽돌’은 이를 대변하는 매개체가 된다. 벽돌이 모여 이루는 건축물은 평면과 입체로 자유로이 변형된다는 점에 착안해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가미해 이를 작품화하는 것. 주로 한국 전통 한복에 사용되는 명주를 활용하는데, 소재 특유의 반투명한 질감과 쌍고치의 불규칙한 결이 빛과 공간 속에서 변화하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독특하다. 그의 작업이 단순한 섬유 조형을 넘어 전통과 현대, 평면과 입체의 접점을 탐구하는 과정으로도 읽히는 이유다.
손바느질로 탄생한 과거와 현재의 가교, 조하나
조하나는 전통 규방 공예의 주요 기법 중 하나인 ‘접기’ 그리고 이 기법을 통해 탄생하는 주름을 활용해 가방이나 장신구 등의 생활 예술품과 조형 작품을 만든다. 이를 작가는 옛 여인들의 예술적 혼을 되살리는 일련의 행위이자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라 표현한다. 접기 기법은 실첩, 빗접, 쌈지, 종이 등, 병풍, 부채, 식지보, 주머니, 갈모 등 종이나 천을 접어 만드는 생활 용품이나 승경도, 딱지치기, 동서남북, 칠교, 지화, 고깔, 지방 등 유희적 또는 주술적 용도의 기물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도 작가가 주창하는 가교적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염색한 바탕감을 자르고 손바느질해 덧대어 잇는 데에서는 전통의 자취가 느껴지는 반면, 접기 기법으로 완성한 절제된 주름의 선에서는 세련된 현대의 인상이 전해지기 때문.
내면의 한 획이 된 태피스트리, 이현화
서양화를 전공한 이현화 작가의 섬유 작업은 태피스트리의 회화적인 표현력에 매료된 순간 시작됐다. 자수와 염색, 직조 등 섬유의 여러 표현 방식이 있지만, 태피스트리를 통해 인간 내면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한 감상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 작가는 태피스트리의 전통 고블랭 기법을 주로 활용하는데, 긴장된 날실에 정교하게 씨실을 직조해 인간 존재에 대한 심연의 이야기를 엮어낸다. 최근 작업 주제는 ‘영혼의 제의’로, 부정한 것들을 모두 태워 보내고 내면의 정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 특징. 태피스트리 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형태의 ‘기원의 돌’, 머리카락을 태운 재가루와 소금 결정, 콩테로 그린 회화 작업 등 재료의 근원적인 상태를 고민하고 실험하며 다양한 재료를 섬유와 함께 풀어내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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