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은 지하 2층 벙커룸에 마련한 ‘레트로스펙티브 룸’. 불가리 주얼리의 역사와 독창적인 미학을 조명한다. 메종의 유산과 이를 새롭게 해석한 작가들의 시선이 어우러진 이곳에서는 비제로원이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 BVLGARI
콜로세움이 손가락 위에 올라온 건 1999년이었다. 로마의 거대한 건축 유산에서 영감을 얻은 불가리Bvlgari는 나선형 주얼리 ‘비제로원B.zero1’을 세상에 내놓았다. 27년이 흐른 지금, 비제로원의 조형 언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서울의 전시장에 나타났다.
송은과 불가리가 협력해 선보인 전시 <LIGHT, FORM AND VISION: Roman Heritage in Dialogue with Korean Contemporary Art>에서 여섯 팀의 작가는 비제로원을 주제로 저마다 다른 로마를 펼쳐 보인다. 건축물의 아치는 황동 조각이 되고, 고대 로마에 머물렀을 법한 향기는 작가의 상상 속에서 되살아난다. 또 로마의 골목은 영상 속에서 낯설게 이어지며, 빛과 소리는 텅 빈 듯한 공간을 채운다. 이들은 콜로세움의 외형을 재현하는 대신,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반복되는 구조, 수많은 사람의 흔적에 주목했다. 덕분에 전시장에서는 익숙한 로마의 풍경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로마를 만나게 된다.
11월 14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회화, 조각, 영상, 설치, 사운드 등 2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유산과 혁신, 구조와 변화가 교차하는 순간을 탐색한다. 이를 위해 로마의 유산을 새롭게 읽은 작가들 그레이코드, 지인, 김지수, 박준범, 이은우, 정영호, 최성임이 <럭셔리> 카메라 앞에 섰다.
<LIGHT, FORM AND VISION: Roman Heritage in Dialogue with Korean Contemporary Art>
📆10.29~11.14
그레이코드, 지인
"불가리 B.zero1 컬렉션과 로마 건축물의 형상에서 출발했습니다. 반지나 콜로세움은 중심이 비어 있지만, 그 빈 공간에서 저희는 오히려 가득 찬 밀도를 느꼈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일부가 사라진 콜로세움의 현재 모습 역시 시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비어 있음과 가득 차 있음이 시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다섯 개의 개별 작품으로 구성된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Empty, Yet Already Full’로 발전했습니다.
송은의 지하 공간 역시 층과 층 사이에 원형의 빈 공간이 있어 이러한 생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저희는 금속과 돌, 빛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무한의 음악으로 그 안을 채웠습니다. 그 위로 7분 13초의 음악이 정해진 순간마다 겹쳐지며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 냅니다."
그레이코드, 지인,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 2026
(위) 그레이코드의 램스킨 레더 재킷 ALLSAINTS. 블랙 팬츠는 STUDIO NICHOLSON. 옐로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비제로원’ 네크리스, 로즈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비제로원’ 브레이슬릿 모두 BVLGARI.
(아래) 지인의 캐시미어 코트와 아이보리 셔츠 모두 FENDI. 로즈 골드에 블랙 세라믹을 두른 ‘비제로원’ 이어링, 네크리스, 링 모두 BVLGARI.
그레이코드, 지인의 '비어 있는 듯, 이미 가득 차 있는'(2026).
(위) 그레이코드의 램스킨 레더 재킷 ALLSAINTS. 옐로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비제로원’ 네크리스는 BVLGARI. 지인의 캐시미어 코트 FENDI. 로즈 골드에 블랙 세라믹을 두른 ‘비제로원’ 링 모두 BVLGARI.
(아래) 지인의 캐시미어 코트와 아이보리 셔츠 모두 FENDI. 로즈 골드에 블랙 세라믹을 두른 ‘비제로원’ 이어링, 네크리스 모두 BVLGARI. 그레이코드의 램스킨 레더 재킷 ALLSAINTS. 로즈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비제로원’ 브레이슬릿은 BVLGARI.
최성임
"송은 2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부터 3층 공간 전체에 걸쳐 다섯 덩어리의 작업을 설치했습니다. 이곳은 작품을 담아내는 자리를 넘어 자연광과 작품, 시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공간입니다. 작품들은 계단과 창, 통로와 안쪽 라운지를 연결하고, 그 사이로 빛이 투과해 공간 전체로 퍼지도록 구성했습니다.
B.zero1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원형의 반복과 에너지의 확장성입니다. 하나의 형태가 반복되며 구조를 이루고, 그 안에서 비움과 채움, 단단함과 유연함이 공존하는 모습에 주목했습니다. 생명을 품고 키우는 빛을 모티브로, 작품이 공간 안에서 다양한 감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비물질적인 빛이 물질과 만나 촉각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관람객들이 제 작품을 통해 빛의 따뜻함과 광대함뿐 아니라 그 안에 깃든 긴장과 상처, 생동감까지 온몸으로 느끼기를 바랍니다."
최성임의 '황금 이불'(2026).
스트라이프 셔츠 PORTS INTERNATIONAL. 로즈 골드에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더한 ‘비제로원’ 네크리스와 링, 작가 소장품인 '불가리 투보가스' 링 모두 BVLGARI.
이은우
"콜로세움의 아치와 기둥이 지닌 건축적 엄격함과 장식성, 그리고 관객이 드나들던 보미토리움의 북적이는 일상을 보통의 사물로 풀어냈습니다. 불가리 B.zero1이 거대한 콜로세움을 반지, 목걸이, 귀걸이처럼 신체에 착용할 수 있는 주얼리로 표현했다면, 저는 그것을 휴먼 스케일의 건축으로 재해석했습니다.
전시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게이츠' 연작은 한쪽으로 기울도록 비대칭으로 만든 황동 아치의 균형을 잡는 작업이었습니다. 아치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길에서 주운 돌, 먹고 남은 열매 껍질 같은 사소한 물건들을 매달아 오래된 기억을 불러오는 황동 아치와 물리적·감각적 균형을 이루게 했습니다. 이런 아치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인 집의 ‘방문’ 규격에 맞춰 만들었습니다."
이은우의 '게이츠' 연작(2026) & '기둥'(2026).
블랙 케이프, 블라우스, 팬츠 모두 PORTS 1961. 로즈 골드에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파베 장식한 ‘비제로원’ 네크리스, 브레이슬릿, 링 모두 BVLGARI.
김지수
"저는 오랫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향과 기억, 감각의 흐름을 회화와 설치 작업으로 표현해왔습니다. 올해 선보인 '시공향Scentime'은 향을 통해 시간과 공간, 기억과 감각을 연결하고 후각적 상상을 확장하는 작업입니다. 로마 콜로세움에 축적된 시간의 층위와 불가리 B.zero1의 원형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보이지 않는 향이 공간 속에서 퍼지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제주의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 향과 원목 고유의 색과 결, 회화가 어우러져 하나의 감각적 풍경을 이룹니다. 관람객이 공간을 이동하고 호흡하는 동안 향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각자의 기억과 감각을 불러옵니다. 저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김지수의 '나의 시적 우주'(2025) & '시공향'(2026).
쇼트 더블브레스트 재킷, 팬츠 모두 MAX MARA. 화이트 스트랩 펌프스 COS. 옐로 골드 링크 체인 중앙에 스터드 디테일 펜던트를 더한 '비제로원' 네크리스, 다이아몬드를 파베 세팅한 ‘비제로원’ 링 모두 BVLGARI.
박준범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강하게 질문했던 것은 ‘역사라는 긴 시간의 흐름을, 그보다 짧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시간 스케일에서 바라볼 때 역사적 장면은 어떻게 보이는가’였습니다. B.zero1이라는 작은 브랜드 스토리 안에서도 과거와 현재는 변화와 반복을 거치며 논리적이거나 때로는 추상적인 형태로 진화합니다. 그렇다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장면의 연속을 어떻게 찾고, 그 원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선후가 없는 이미지의 겹침, 스케일과 기울기의 오차가 드러나는 관계의 노출, 되돌리거나 반복할 수 없는 스토리의 선형적 전개, 중복될 수밖에 없는 소재적 요소의 반복은 차용과 전복, 핸디캡과 유사함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온 발전과 퇴보의 모습과 닮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송은과 B.zero1 모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예술과 문화의 장에서 클래식함과 혁신, 적극적인 변화를 꾸준히 보여 왔습니다. 그것은 선형적인 발전이라기보다 매 순간 현재에 충실하면서 지속적으로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해 온 과정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러한 태도 속에서 각자의 역사가 이어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박준범의 '비슷한 골목'(2026).
트리아세테이트 베스트 재킷과 팬츠 모두 RECTO. 화이트 셔츠 BOSS. 로즈 골드 ‘비제로원’ 네크리스, 블랙 세라믹으로 대비감을 더한 ‘비제로원’ 링, 팔각형과 원을 결합한 로즈 골드 케이스가 돋보이는 '옥토 피니씨모' 워치 모두 BVLGARI.
박준범의 '네 개의 비슷한 모서리'(2026).
트리아세테이트 베스트 재킷과 팬츠 모두 RECTO. 화이트 셔츠 BOSS. 블랙 로퍼 AMIRI. 로즈 골드 ‘비제로원’ 네크리스, 블랙 세라믹으로 대비감을 더한 ‘비제로원’ 링, 팔각형과 원을 결합한 로즈 골드 케이스가 돋보이는 '옥토 피니씨모' 워치 모두 BVLGARI.
정영호
"작업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다'는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1668~1744)의 역사관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역사가 과거의 궤적을 공유하면서도 끊임없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나선형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던 중 태양계의 공전 궤도 시뮬레이션을 접했고, 여기에서 제가 생각했던 나선형적 발전 모델 혹은 전진 모델에 적합한 자연적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태양계의 움직임을 태양계 밖에서 바라본 시뮬레이션을 스크린에 띄워 놓고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긴 노출 시간을 통해 나선형의 궤적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았습니다.
이와 함께 초상 연작은 AI로 생성한 이미지를 판매하는 사이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가상의 인물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인종, 나이, 피부색, 성별 등의 파라미터를 조절해 원하는 이미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초상 가운데 저는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지니면서도 마치 형제처럼 서로 닮은 얼굴의 이미지 여섯 개를 선택했습니다. 이 이미지들을 독점 구매하면 곧바로 서버에서 삭제되고 온전히 제가 소유하게 됩니다. 저는 이미지를 스마트폰 화면에 띄운 뒤 다시 촬영해 픽셀과 형상이 동시에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작품 제목은 구매 후 다운로드할 때 자동으로 부여된 파일명입니다."
정영호의 '우리는 반복하고 있지 않다'(2026).
데님 재킷과 팬츠 모두 PORTS INTERNATIONAL. 로즈 골드에 블랙 세라믹을 두른 ‘비제로원’ 네크리스, 가장자리를 따라 다이아몬드가 유려하게 빛나는 ‘비제로원’ 링 모두 BVLGARI.
HAIR·MAKEUP ARTIST 구성은 ASSISTANT 양서윤 COOPERATION 렉토(790-0798), 막스마라(511-3935), 보스(2210-5154), 불가리(6105-2120), 스튜디오 니콜슨(3438-6134), 아미리(@amiri), 에트로(1899-2939), 올세인츠(920-2363), 코스(726-7785), 토템(toteme.com), 펜디(544-1925), 포츠1961, 포츠 인터내셔널(ports196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