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8캐럿의 오벌 컷 핑크 스피넬을 감싼 5장의 잎사귀가 돋보이는 ‘쟌 슐럼버제 바이 티파니 파이브 리브스’ 이어링. 18K 옐로 골드로 정교하게 잎맥을 새기고 총 166개의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장식해 꽃봉오리의 생명력을 표현했다. TIFFANY & CO.

불가리 ‘세르펜티’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모습. (1962)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그리고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
2011년, 크리스티 뉴욕의 경매장.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가 남긴 주얼리를 차지하려는 경합은 자정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그날 밤 쏟아진 신기록 사이에서 유독 흥미로운, 아니 수상쩍은 이력의 피스가 하나 있었다. 바로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를 세팅한 불가리의 골드 ‘세르펜티’ 브레이슬릿 워치다. 1962년 영화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배포된 홍보 사진 속 테일러의 손목을 감고 있던 뱀인데, 추정가의 60배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면서 당시 세르펜티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시계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는 것. 불가리의 기록을 보면 로마 콘도티 거리의 부티크에서 판매된 사실까지는 확인되지만, 정작 구매자는 기록에 없다. 누가 구입했는지도 모르는 시계가 사진 한 장으로 세계적인 아이콘이 됐다.
하지만 1962년에서 불과 10여 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하이 주얼리의 주인공은 아직 스크린의 스타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왕실과 국제 사교계의 격식을 따르던 시절이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의 하우스들은 전쟁 전의 화려한 주얼리를 다시 선보이느라 한창이었다.

(왼쪽) 1964년 디자이너 쟌 슐럼버제가 선보인 ‘꽃과 분리형 잎 장식’ 클립 TIFFANY & CO. (오른쪽) 196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착용해 유명해진 산호 링 FD GALLERY.

체인 링크에 여러 개의 고대 금화와 다이아몬드를 장식한 ‘모네떼’ 소투아르 네크리스 BVLGARI.
파리, 다시 백색으로
1947년 크리스챤 디올이 첫 컬렉션을 발표하자 파리 패션계가 술렁였다. 각진 어깨에 일자 치마, 전쟁 내내 그렇게 재단되던 여성복에 우아한 곡선이 돌아왔다. 이른바 ‘뉴룩’이다. 이브닝드레스는 어깨와 데콜테를 드러냈고, 짧은 목걸이와 여러 줄의 진주, 큼직한 귀고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마침 전시에 묶였던 플래티넘의 사용 제한도 풀렸다. 하이 주얼리에 백색이 돌아온 것이다. 낮에는 골드가 여전히 대세였지만, 만찬과 무도회가 열리는 밤만큼은 백색 금속과 다이아몬드 차지였다. 파뤼르Parure(목걸이·팔찌·귀고리 등을 한 벌로 맞춘 세트)가 되살아난 것도 이 무렵이다.
공교롭게도 뉴룩이 등장한 것과 같은 해, 20세기 다이아몬드의 운명을 바꾼 광고 문구 한 줄이 탄생한다. 드비어스의 광고를 맡은 N.W 에이어앤선Ayer & Son의 카피라이터 프랜시스 게러티Frances Gerety가 탄생시킨 "A Diamond Is Forever".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이아몬드의 이미지를 지배한 문구다.
신문과 영화관, 마침내 텔레비전까지 광고가 반복되는 사이 다이아몬드 반지는 청혼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1953년 런던에서는 대관식을 마친 엘리자베스 2세가 다이아몬드가 빼곡한 왕관을 쓰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나섰고, 같은 해 할리우드에서는 매릴린 먼로가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를 노래했다. 전 세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고 외치던 시절이었다.
뉴욕, 스크린과 캔버스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는 1956년 반클리프 아펠의 진주 파뤼르를 결혼 선물로 받고 모나코의 공비가 되었다. 결혼식은 그녀의 영화사였던 MGM이 영화화해 극장에서도 상영했다. 1961년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홍보 사진에서 오드리 헵번은 ‘리본 로제트’ 네크리스를 착용했다. 티파니앤코가 1956년 영입한 쟌 슐럼버제의 디자인으로, 중앙에는 총 128.54캐럿의 다이아몬드가 세팅돼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 본편에서 헵번은 티파니앤코 주얼리를 한 점도 착용하지 않는다.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던 것일까!
헵번의 네크리스를 디자인한 슐럼버제는 뉴욕에 오기 전 1930년대 파리에서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의 코스튬 주얼리를 만들며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어울렸다. 달리 역시 1949년 루비 입술과 ‘시간의 눈’ 같은 주얼리 오브제를 선보였다. 슐럼버제가 뉴욕에 자리 잡을 무렵에는 현대미술의 중심도 파리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있었다. 잭슨 폴록이 바닥에 펼친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고 마크 로스코가 색면만으로 캔버스를 채우던 때였다.

옐로·화이트 골드와 총 2캐럿의 다이아몬드 라인이
유연하게 교차하는 ‘토르세이드’ 네크리스. 메종 고유의 섬세한 금세공 기술로 표면에
실크 같은 부드러운 결을 새겨 넣었다. BUCCELLATI.
라 돌체 비타, 로마의 전성기
이탈리아가 ‘경제 기적’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로마의 영화와 패션도 활기를 띠었다. 할리우드의 제작진과 스타들이 몰려들면서 영화 촬영소 치네치타는 ‘테베레 강변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1960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달콤한 인생〉이 개봉하자 ‘라 돌체 비타’는 로마의 화려한 삶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얼리에서는 불가리가 컬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불가리가 처음부터 강렬한 색을 쓴 것은 아니다. 1958년의 ‘리비에르’ 네크리스만 해도 다이아몬드를 한 줄로 이어 플래티넘에 세팅한 전형적인 파리풍 주얼리였다. 그런데 1960년 무렵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작은 정원’이라는 뜻의 ‘자르디네티’ 브로치에는 루비와 에메랄드, 사파이어로 만든 꽃과 잎이 흐드러졌다. 둥글게 연마한 카보숑은 패싯의 반짝임보다 보석 고유의 색을 풍성하게 드러냈다. 같은 시기 로스코의 캔버스도 사물을 그리지 않고 색만으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회화도, 주얼리도 색을 훨씬 대담하게 다루던 때였다.

뱀 머리 형상의 옐로 골드 커브드 브레이슬릿에 화이트 머더오브펄 다이얼을 더한
‘세르펜티 에테르나’ 워치. 브레이슬릿 끝부분에 총 68개의 라운드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를 세팅해
유려한 곡선미를 극대화했다. BVLGARI.
콘도티 거리, 촬영장의 세르펜티
그 로마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클레오파트라> 촬영차 입성했다. 촬영장에서 가까운 콘도티 거리의 불가리 부티크를 자주 찾았고, 불가리에서도 촬영장으로 주얼리를 보내곤 했다. 문제의 세르펜티가 홍보 사진에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렇다면 구매자는 누구였을까. 상대역이자 훗날 남편이 된 리처드 버턴Richard Burton의 선물은 상당수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세르펜티 워치는 빠져 있다. 남는 후보는 당시 법적 남편이던 배우 에디 피셔 Eddie Fisher와 테일러 본인, 그리고 영화 제작사다. 근래에는 불가리 헤리티지 쪽에서도 ‘제작사 선물설’에 무게를 싣는다. 클레오파트라 역에 뱀 시계만큼 어울리는 선물도 없거니와 테일러가 영화 계약 때 보너스로 주얼리를 종종 요구했다고 하니, 나 역시 그 편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버턴의 선물이 시작된 곳도 콘도티 부티크였다. 첫 선물은 에메랄드 링이었고, 각자 배우자가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세계적인 스캔들이 됐다. 그들이 파파라치를 피해 만나던 부티크의 프라이빗 룸을 지아니 불가리는 ‘머니 룸’이라 불렀다. “나는 그녀에게 맥주를, 그녀는 나에게 불가리를 소개했다.” 버턴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1964년 몬트리올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테일러는 그가 선물한 총 23.44캐럿의 에메랄드 브로치를 착용했다. 펜던트로도 변형할 수 있는 이 브로치는 그녀를 대표하는 주얼리가 되었다.

은은한 로즈 오팔 원반을 따라 18K 옐로 골드 잎사귀를 섬세하게 두른
‘플로라’ 메달과 금빛 반점이 스민 라피스라줄리 ‘플로라’ 메달 모두 ARTHUS BERTRAND.
제트족의 여름, 터키석과 산호
스타들이 로마로 몰려들던 무렵, 대서양을 건너는 시간도 짧아졌다. 1958년 여객기 ‘보잉 707’이 투입되면서 뉴욕에서 유럽까지 하룻밤이면 닿게 된 것이다. 겨울에는 생모리츠, 여름에는 지중해. 철마다 휴양지를 옮겨 다니는 부유층을 일컬어 세간에서는 ‘제트족’이라 불렀고, 1962년 개발이 시작된 사르데냐의 포르토 체르보는 곧 그들의 여름 거점이 되었다. 휴양지의 하루는 무도회장의 밤과 달랐다. 요트 갑판에서 세 줄의 진주와 티아라를 갖춰 착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 한낮의 태양 아래서는 다이아몬드의 광채보다 튀르쿠아즈의 푸른빛, 산호의 붉은빛, 자개의 은은한 광택이 훨씬 잘 어울렸다.
골드도 달라졌다. 매끈한 광택보다 두드리고 새겨 질감을 살린 표면이 유행했다. 밀라노의 부첼라티가 골드에 가느다란 선을 촘촘히 새겨 실크나 리넨 같은 질감을 표현한 인그레이빙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어로 ‘동전’이라는 뜻의 불가리 ‘모네떼’는 1960년대 중반 실제 고대 금화를 골드에 세팅한 주얼리로 탄생했다. 세월이 남긴 마모와 흔적을 그대로 살린 모습은 플래티넘과 다이아몬드가 주도하던 1950년대 파리의 주얼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다시 2011년의 경매장으로 돌아가 보자. 그날 불가리가 되찾아온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에메랄드 브로치와 ‘모네떼’ 등 7점은 헤리티지 전시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세르펜티 워치는 익명의 컬렉터에게 낙찰된 뒤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1962년의 구매자 이름 역시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그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시계를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 말이다.
WRITER 윤성원 주얼리 히스토리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신소재공정공학과 겸임교수. <나는 금 대신 보석을 산다>,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등을 집필했으며 주얼리의 역사, 보석학적 정보 등 모든 분야를 융합적으로 다루고,
나아가 보석 업계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COOPERATION 부첼라티(6905-3490), 불가리(6105-2120), 아르투스 베르트랑(3449-5954), 티파니앤코(1670-1837), FD GALLERY(@fd_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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